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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정무문> 중 한 장면.
영화 <정무문> 중 한 장면. ⓒ 자료사진


퀴퀴한 냄새가 진동하는 변두리 극장, 2본 동시 상영관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정무문>(精武門, 1973)이라는 영화였지만, 제목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부르스 리, 이소룡을 만났다. 바야흐로 이 땅에는 새마을운동으로 '잘살아 보세'라는 구호가 난무했지만, 여전히 보릿고개 넘기가 힘들었던 시기였다.

머리에 기계독이 오른 까까머리 중학생, 여드름투성이의 고등학생들은 저마다 2편 동시 상영관으로 몰려갔다. 당시만 해도 소위 개봉관에 학생들이 출입하는 건 자유롭지 못했기에, 동시 상영관이나 쇼도 보고 영화도 보는 극장은 학생들의 핫플레이스였다. 더군다나 이소룡의 영화는 미성년자 입장불가 딱지가 붙은 영화가 대부분이었다. 150원만 내면, 매일 체육 선생에게 얻어터지고 지긋지긋한 수학 공식을 외워야 했던 현실에서 잠시라도 탈출할 수 있었다. (중략)

'미성년자 입장불가였던 이소룡의 영화를 보기 위해 아빠의 모자와 바바리코트는 필수였다'는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의 감독 유하는 그의 책 <이소룡 세대에게 바친다>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서투른 쌍절봉 돌리기로 붕붕거리던 추억의 한때, 그 쌍절곤 덕분에 하루도 뒤통수가 성할 날이 없었다. 이소룡처럼 살고 싶다는 욕망. 과장되게 말하자면 그 욕망이 내 교복의 나날을 견디게 해줬다.' - 오광수, <낭만 광대 전성시대> 중 발췌


갈라지고, 끊어지고, 잡티 많은 '그때 그 영화'

그랬다. 춥고 배고팠던 시절, 이소룡 영화는 청춘들의 유일한 판타지이자 힘겨운 현실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는 해방구였다. 이소룡의 폭발적인 명성과는 달리, 화질은 개봉 때 맞춰서 가야 기대할 수 있었다. 혹시라도 보름 뒤에 가면 영사기에 걸린 필름이 닳아 스크린에 비가 내리는 건 흔한 일이었다.

갈라지고, 끊어지고, 잡티가 난무하고, 음영도 없이 입혀진 자막은 이리저리 흔들리고... 엔딩 크레딧(영상 매체에서 엔딩 뒤에 나오는 출연진, 제작진의 이름 목록) 잘라먹는 일도 예사였다.

어디 그뿐인가. 화질도 화질이지만 음향은 진심으로 '엉망'이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지방에 사운드 좋은 극장은 거의 없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그냥 배경음악이나 목소리는 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게다가 영사기 필름이 끊기면 기약 없이 다시 시작되기만을 기다려야만 했다. 그래도 그 기다림은 행복한 고민이었다.

'이소룡' 그리고 '경아'와 '영자'로 대표되며, 우리 영화산업을 발전시킨 역사에서 영사기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원동력이었다. 스크린에 비친 이소룡에게 열광하던 그 까까머리 세대(베이비붐 세대)는 산업사회 역군으로 제구실을 다하고 서서히 은퇴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극장의 영사기도 역사 속으로 사라질 운명에 놓여 있다.

이젠 LED로 영화 본다지만, '아날로그 감성' 채울 순 없지

 삼성전자 모델들이 지난 13일 서울 송파구 롯데시네마 월드타워 영화 상영관 '수퍼S'에서 '시네마 LED(발광다이오드)'를 통해 최근 개봉한 '트랜스포머: 최후의 기사'를 보고 있다.
삼성전자 모델들이 지난 13일 서울 송파구 롯데시네마 월드타워 영화 상영관 '수퍼S'에서 '시네마 LED(발광다이오드)'를 통해 최근 개봉한 '트랜스포머: 최후의 기사'를 보고 있다. ⓒ 연합뉴스

삼성전자는 지난 13일 "2020년까지 전 세계 영화 상영관의 10%를 '시네마 LED'로 바꾸는 게 목표"라면서 야심에 찬 계획을 발표했다. 이날 공개한 '시네마 LED'는 가로 10.3m에 LED 캐비닛 96개를 사용했으며 영화 상영에 최적화한 4K(4096x2160) 해상도를 자랑한다. 무엇보다도 1800년대 후반부터 지속해 온 영사기 방식을 쓰지 않고 스크린에서 바로 상영할 수 있다는 점은 획기적이다. 특히 화질과 색상이 기존 것과는 확실히 다르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획기적인 영상 구현으로 지난날 퀴퀴한 냄새와 스크래치가 가득했던 필름과 영사기의 아날로그 감성을 대신할 수 있을까? 그래도 그때는 극장 안의 모든 사람이 하나가 돼 환호성을 지르고 손뼉을 치면서 벅찬 감동을 함께했다. 해상도 위주로 이야기한다면 '시네마 LED'를 앞설 수는 없지만, 그래도 영사기에서 돌아가는 필름은 심도가 깊고 구현하는 색채에 자연스러움이 묻어있었다. 그 감성과 추억을 어떠한 디지털 기술이라도 감히 흉내를 낼 수는 없다.

극장 입구 매표소 앞, 관객은 발 디딜 틈조차 없이 인산인해다. 매표소를 지나니 머리 위에서는 장인이 손으로 직접 그려놓은 이소룡의 권법을 묘사한 엄청난 포스터가 손님을 맞는다. 극장 한 곳에서 하나의 스크린으로 2~3개의 영화를 동시 상영하기에 꽤 오랜 기간 영화 주인공이나 주요 장면을 페인트로 그려놓은 것.

표를 들고 영화관 안에 들어가면 어두워 잘 보이지 않는 번호판을 한참을 더듬어 찾아 자리에 앉는다. 그러면 이내 담배 연기가 관객을 맞이한다. 필름 돌아가는 소리와 그 빛을 따라 움직이는 먼지와 담배 연기만 자욱하다. 영사기사가 뿜은 담배 연기와 이곳저곳 객석에서 한숨처럼 빨아들이는 하얀 연기는 영사기에서 나오는 광선 속으로 더욱 강한 빛을 발하며 사라진다.

 옛 영화관에는 영사기에서 쏟아져 나오는 빛과 그 빛보다 더 빛나는 '담배연기'가 있었다.
옛 영화관에는 영사기에서 쏟아져 나오는 빛과 그 빛보다 더 빛나는 '담배연기'가 있었다. ⓒ pexels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지만, 1980년대 말까지만 해도 극장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은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졌다. 받아들여졌다기보다는 비흡연자도 익숙해 거북함이 조금 덜했다는 표현이 그나마 맞을 듯하다. 금연장소라는 게 거의 없었던 시절이라 2편 동시상영을 하는 삼류극장뿐만 아니라 일류극장까지도 흡연이 가능했다. 지금보다 담배가 매우 독하고 냄새도 심해 몇몇 사람들이 캑캑거리면서 싫은 기색을 보였지만, 흡연자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극장이 굴뚝이 되는 일은 흔했고, 그 와중에 객석 가운데쯤에서 담배 연기로 도넛을 만드는 귀한 가르침(?)을 주는 달인도 있었다.

원래 뒷자리 쪽에 분유통이 놓여있고 담배를 피우는 곳이었지만 담배의 폐해에 대해 그렇게 알려지지 않은 시절이었으니 관대했다. 형편이 넉넉한 사람들이나 쓸 수 있는 라이터보다는 대부분 성냥으로 불을 붙였기에 황이 타는 향과 담배의 첫 향기와 섞이면 그렇게 구수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처음으로 흡연을 하게 된 아주 큰 동기(?)가 되곤 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는 '국기에 대한 맹세'가 나오면 영사기로 쏘는 불빛은 아예 사람 머리로 가려 안 보이기 일쑤였다. 국정을 알리는 <대한 뉴스>에 대통령이 등장해도 누구 하나 불평하는 이가 없었다. 영화를 본다는 그 자체 하나만으로도 모든 걱정 따윈 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투박하고 거칠었던 추억들아, 안녕

 1992년, 우진 필림 미술실의 한 직원이 영화 간판을 그리고 있다.
1992년, 우진 필림 미술실의 한 직원이 영화 간판을 그리고 있다. ⓒ 연합뉴스

뛰어난 미모로 스크린을 빛냈던 정윤희 누님은 하늘에 반짝이는 별보다 더 빛났다. 1970, 1980년대는 서슬 퍼런 당국의 검열로 의식있는 영화를 만들 수 없었던 시절. 때문에 선정적이고 퇴폐적인 영화가 판을 쳤지만, 그래도 명절 때 세뱃돈을 모아야 큰맘 먹고 갈 수 있던 곳이었다.

비록 지금보다 뒤처진 기술, 낙후된 시설이지만, 영사기가 멈추고 필름이 끊겨도 그곳에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좋았던 그때 그 시절. 영화가 끝나고 어두운 극장에서 나오면 한동안 방향감각을 잃고 멍해서 얼떨떨했던 그곳이 이제는 되레 그립다.

춥고 배고픈 시절, 모든 국민의 연모 대상이었던 장미희·정윤희·유지인 트로이카 3인방들은 이 땅의 스크린 풍요를 보면서 어떤 인상을 받을까 자못 궁금하기도 하다. 당신은, 그 시절 비 내리던 스크린에 어떤 추억이 깃들어 있는가?


#영화#시네마 LED#영사기#영화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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