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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 전, 연극 <창조경제-공공극장편>을 보았다. 서바이벌 오디션 형식을 차용한 이 연극은 몇몇 청년예술극단이 경쟁자로 참여하고, 관객은 마음에 드는 극단에 투표한다. 서바이벌 오디션 형식은 이미 예능프로그램의 단골로 관객에게도 익숙한 형식이다.

하지만 여느 서바이벌과 달리, 이 공연은 우승자를 가려내는 데 목적이 있는 건 아니었다. '경쟁' 구도에 대해 오히려 관객에게 묻는다. '여러분은 이 서바이벌 형식과 투표방식에 동의하는지, 그로 인해 누군가는 상금을 받고 누군가는 무급으로 창작하는 구조가 괜찮은 건지' 말이다.

<창조경제-공공극장편>의 기원은 2015년 극단 앤드씨어터가 실험극과 상업극, 예술작업과 경제생활 사이에 놓여있는 예술가의 삶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당시 '창조경제'는 박근혜 정부의 정책기조로, 연극 <창조경제>는 이를 비판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지만 동시에 이들이 주목했던 점은 예술가들의 '창조활동과 삶' 그 자체였다. 특히 예술분야에서 강조되었던 창조활동. 그것이 만들어낸 빈곤 경제생태계는 경쟁을 강제하는 '창조경제'의 이면이기 때문이다.

공연 중에 반복되는 "나의 창조활동이 경제생활에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라는 말은 경쟁시스템에서 더 이상 물러날 곳 없는 젊은 예술가들의 생존을 떠올리게 한다. '예술=신성함=비경제적'이라는 문화적 관습은 자신이 좋아하는 예술활동을 위해 기꺼이 경제적 희생을 강요한다. 일찍이 네덜란드 경제학자 한스 애빙은 <왜 예술가는 가난해야 할까>에서 '신성한 예술'이라는 관념이 오히려 예술가들에게 경제적인 것을 불순하게 여기게 하며 희생을 강조한 결과 이들을 빈곤으로 몰아간다고 지적한 바 있다.

"나의 창조활동이 경제생활에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연극 <창조경제-공공극장편>은 '경쟁' 구도에 대해 관객에게 묻는다. '여러분은 이 서바이벌 형식과 투표방식에 동의하는지, 그로 인해 누군가는 상금을 받고 누군가는 무급으로 창작하는 구조가 괜찮은 건지' 말이다.
연극 <창조경제-공공극장편>은 '경쟁' 구도에 대해 관객에게 묻는다. '여러분은 이 서바이벌 형식과 투표방식에 동의하는지, 그로 인해 누군가는 상금을 받고 누군가는 무급으로 창작하는 구조가 괜찮은 건지' 말이다. ⓒ pixabay

그런데 이런 문제가 비단 예술가들에게만 있을까? 공공활동을 위해 비영리단체에서 일하는 청년활동가들도 유사한 경험을 한다. 청년활동가는 공공의 가치를 지향하며 사회활동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이다. 시민들의 관심을 유도하고 사회적 아젠다를 생산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그들은 기획력이 뛰어나야 하고, 소통에도 능숙해야 한다. 특히 온라인을 통한 소통방식이 강조되면서 소셜미디어를 잘 다뤄야 하고, 디자인 능력, 홍보 능력도 있어야 한다. 그들의 노동은 대체로 창의노동의 형태를 보인다.

주어진 업무는 창의적이고 소통이 중요시되는 반면 저임금에 인력 부족으로 1인당 3~4명의 몫을 감당해야 한다. 휴일도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소진된 상태로 몇 달씩 견딘다.

특히 현장에서 사회적 이슈를 생산하고, 시민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노동은 감정과 정신적 노동을 수행한다. 실시간 답변과 회원 관리에 대한 성과압박, 그리고 잦은 야근으로 어려움을 겪는다. 심지어 퇴근 후에도 온종일 활동에 집중해주기를 바란다. 24시간 대기 상태에 노출되는 셈이다.

열악한 노동환경은 활동가의 삶과 시간을 착취하는 방식으로 몰아간다. 조직에 대한 장기적인 전망을 기대할 수 없고, 동시에 개인의 삶을 영위하지 못하게 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위해서는 기꺼이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열정노동과 열정페이가 활동가들 사이에서 공공연한 문화적 관습으로 작동한다. 그러다 보니 1~2년을 못 견디고 '살기 위해' 그만두는 것이다.

사회적 가치가 중요해질수록 노동자로서 활동가의 삶과 권리는 설 자리를 잃는다. 젊은 예술가들이 "나의 창조활동이 경제생활에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라고 외쳤듯이, 젊은 활동가도 '나의 공공활동은 왜 경제생활에 도움이 안 되는지' 고민하는 것이다.

예술가·활동가가 가난해야 할 필요는 없다

 열악한 노동환경은 활동가의 삶과 시간을 착취하는 방식으로 몰아간다. 조직에 대한 장기적인 전망을 기대할 수 없고, 동시에 개인의 삶을 영위하지 못하게 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위해서는 기꺼이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열정노동과 열정페이가 활동가들 사이에서 공공연한 문화적 관습으로 작동한다. 그러다 보니 1~2년을 못 견디고 '살기 위해' 그만두는 것이다.
열악한 노동환경은 활동가의 삶과 시간을 착취하는 방식으로 몰아간다. 조직에 대한 장기적인 전망을 기대할 수 없고, 동시에 개인의 삶을 영위하지 못하게 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위해서는 기꺼이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열정노동과 열정페이가 활동가들 사이에서 공공연한 문화적 관습으로 작동한다. 그러다 보니 1~2년을 못 견디고 '살기 위해' 그만두는 것이다. ⓒ pixabay

젊은 예술가나, 젊은 활동가는 사회에 진출하기 이전부터 대학교육을 받기 위해 학자금 대출을 안고 출발한다. 주로 도시에 거주하는 청년들이 높은 주거비와 생활비로 근근이 생활하듯이, 한 달 벌어 한 달을 생활한다. 최저 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임금은 미래의 가능성을 지운다. 가족, 결혼, 관계, 동료 등과의 단절은 정작 타인을 위해 살아도 나를 위해 살 수 없게 한다.

뿐만 아니라, 현장에서 경험하는 성차별적 발언, 위계적인 조직문화는 활동에 영향을 미친다. 노동윤리와 관계에 대한 감수성이 바뀌었지만, 그런 변화를 조직은 따라가지 못한다. 상시적인 재정난과 인력부족에 시달리는 단체는 활동가들에게 휴식이라는 보상 대신 과도한 노동과 엄격한 노동윤리를 들이대며 노동자이기를 포기하라고 한다.

예술가들이 자신의 가난을 감수하면서 예술활동을 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처럼, 활동가이기 때문에 노동자의 권리를 포기하거나 가난할 이유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둘러싼 경제·문화적 생태계는 공공활동=과잉노동=가난을 감수하도록 한다.

조직의 이익은 구성원의 희생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안정적인 노동환경, 신뢰, 성취감이 만날 때 발생하는 부수적 효과이다. 적어도 사회적 경제나 시민사회영역에서는 말이다. 활동가는 말 그대로 역동적이고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자신의 활동에 의미를 부여하고, 사회적 가치를 만들어가는 사람이다.

공공영역이 지속가능하려면 그 안에서 활동하는 사람이 지속가능한 생태계를 만들어줘야 한다. 그리고 그 출발은 공공활동가의 삶에서 시작해야 한다. 우리가 공공을 이롭게 하는 사람들의 삶에 관심을 보일 때, 그들의 노동과 삶은 더 빛날 것이다. 그 효과로 우리의 삶 또한 풍요로워진다. 이것이 공공활동이 필요한 이유이자, 사회적 가치가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천주희 새사연 연구원이 쓴 글입니다.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saesayon.org)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창조경제#새사연#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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