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감리아문(仁川監理衙門, 감리서)'은 지금의 인천광역시 중구 내동 83번지 일원에 위치했었다. 현재 이곳에는 아파트와 상가 등이 들어서 있지만, 100여 년 전 이곳에는 민족의 역사를 바꿀 한 위대한 인물이 머물다 갔다.
1895년(고종 32년) 10월 8일(음력 8월 20일), 국모가 왜적의 칼날에 무참히 시해됐다. '을미사변(乙未事變)'이다.
이듬해(1896년) 2월, 21살 청년 김창수는 국모 시해를 복수하기 위해 안악 치하포에서 왜병 중위 쓰치다(土田壤亮)를 처단했다.
이 일로 김창수는 그해 5월 11일에 체포돼 해주감옥에 수감됐고, 7월 인천감리아문(仁川監理衙門, 감리서)으로 이감됐다. 청년의 죄목은 '국모보수(國母報讎, 국모의 원수를 갚다)'였다.
1896년 8월 26일, 청년이 사형집행장에서 죽음을 눈 앞에 두고 있을 때였다. 그 시각 경성에서 조선 최초의 장거리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대조선국 대군주 고종이었다(<백범일지>에 기록된 내용에 따름).
백범의 여정에 함께한 인천 사람들고종이 살린 조선 청년 김창수는 훗날 조선 독립투쟁의 거목이자 민족지도자로 추앙받는 백범 김구(白凡 金九)다.
1898년 3월 9일, 인천감리서를 탈출한 백범 선생은 애국계몽운동 등에 힘썼고,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이후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1932년 이봉창 의사의 일왕 히로히토 처단 미수 의거와 같은 해 윤봉길 의사의 중국 상하이 홍커우 공원 의거 등이 선생께서 계획한 대표적인 독립투쟁이다.
백범 선생이 인천에서 옥고를 치르다 탈옥하기까지, 그를 도운 많은 인천사람이 있었다. 전 재산을 팔아 선생의 구명에 나선 강화 사람 김주경 형제를 비롯해, 선생이 <백범일지>에 "평생 친구"라고 기록한 독립투사 백초 유완무와 인천의 물상객주 박영문, 안호연 등이다.
그리고, 선생이 탈출에 성공한 그 길에서 민족독립을 향한 위대한 여정의 시작이었다.
이처럼 인천감리서는 민족적·역사적으로 의미가 깊은 곳이지만, 제대로 보존이 이루어지지 않아 많은 이들의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선생을 기억할 수 있는 동상도 이곳에는 없다. 선생의 인천 행적과는 무관한 인천대공원 내에 하나 세워져 있을 뿐이다.
인천시는 현재 문화주권 확립과 인천가치재창조 사업 등을 중점적으로 추진 중이다. 특히 인천감리서 터와 관련해 유정복 인천시장은 지난해 8월 간부회의에서 특별한 관심을 보이기도 했지만, 아직까지 아무런 보존계획도 수립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애국자의 표상인 백범 김구 선생이 머물다 간 인천, 그 위대한 역사를 후손에게 전해질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인천게릴라뉴스’와 ‘KNS뉴스통신’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