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의 출범으로 국정원은 중대한 기로에 섰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국정원은 ‘정보기관의 가장 나쁜 선례’였다. '국가안보'가 아닌 '정권안보'만을 수호했기 때문이다. 그 9년의 시간 동안 일어난 ‘적폐’들을 제대로 조사하지 않고 국정원 개혁을 얘기할 수는 없다. <오마이뉴스>는 국정원개혁발전위(13개)과 국정원감시네트워크(15개)가 선정한 국정원 적폐사건 목록 가운데 총 9개를 추려서 ‘어떤 사건’인지, ‘무엇’을 재조사해야 하는지를 집중 분석한다. [편집자말] |
2013년 6월 24일 오후 3시30분께 국가정보원이 갑자기 보도자료를 하나 내놓았다.
그동안 2급 비밀로 분류돼온 '2007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전문을 일반문서로 재분류해 공개하겠다는 것이었다.
국정원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NLL 발언과 관련해 조작·왜곡 논란이 지속 제기돼 왔고, 6년 전 남북정상회담 내용이 현시점에서 국가안보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 것으로 판단했다"고 밝혔지만, 정상회담 대화록 공개는 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1953년 7월 27일 오후 10시 이후 한국전쟁이 '휴전' 상태로 접어든 뒤 다양한 형태의 남북 대화가 있었지만, 4시간 6분 분량의 남북 대화 내용이 통째로 공개된 것도 처음이었다.
국정원의 대화록 공개, 논란의 촉발은 2012년 10월부터2007년 10월 3일 평양에서 있었던 남북정상회담 대화의 진위가 쟁점이었지만, 논란의 방아쇠를 당긴 쪽은 분명히 존재했다.
"2007년 백화원초대소에서 남북 정상은 단독회담을 가졌습니다. 국정원에 보관되어 있는 대화록에서 노무현 대통령께서는 김정일에게 'NLL(북방한계선) 때문에 골치 아프다. 미국이 땅 따먹기하려고 제멋대로 그은 선이니까 남측은 앞으로 NLL 주장을 하지 않을 것이며 이곳에서 공동어로 활동을 하면 NLL 문제는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라며 구두약속을 해 주었습니다." (2012년 10월 8일 국회 외교통일통상위원회 통일부 국정감사에서 정문헌 당시 새누리당 의원의 질의) 정 의원은 현재 바른정당 사무총장을 맡고 있다. 이후에도 정 총장은 "NLL은 미국이 땅 따먹기 하려고 제멋대로 그은 선"이라는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을 반복 인용했다. 훗날 정 총장은 이 발언의 출처가 정상회담이 아니라 노 대통령의 민주평통 연설(2007년 11월 1일, "어릴 때 땅 따먹기 할 때와 비슷한 싸움을 지금 하고 있는 것")이라고 정정했지만, 비교적 정확한 인용도 있었다. "(외국 정상들을 만날 때) 내가 북측 대변인 노릇을 했다"는 말이 그랬다.
정 총장은 지난 4일 오전 <오마이뉴스>와 한 전화 통화에서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어떤 논란을 크게 일으키려고 꺼낸 얘기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해 9월 29일 북한 국방위원회 대변인이 "NLL은 미군이 멋대로 그어놓은 유령선이다. 그걸 고수하겠다는 것은 남북공동합의서(10·4 선언)의 경위와 내용조차 모르는 무지의 표현"이라는 논평을 내놓자 북한에 제대로 된 대응을 해야 한다는 취지로 이명박정부의 청와대 통일비서관 시절에 알게 된 사실을 국회에서 공개한 것이라는 게 정 총장의 설명이다.
정 총장은 논란을 원했던 것은 아니라고 했지만, 일단 논란이 시작되자 추가로 공개한 발언들의 '탄착점'은 분명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그해 12월 19일 대선에서 3.6%p의 격차로 문재인 후보에 승리했다. 특히 연천·포천 등 경기 북부와 강원 등 북한과의 접경 지역에서 얻은 60%대의 몰표가 박 대통령의 승리를 견인했다.
그러나 NLL 대화록 논란은 해가 바뀐 후에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2012년 10월 30일 이명박 정부의 마지막 국정원장 원세훈이 국회 정보위원회에 나와 NLL 대화록 공개를 거부하자 새누리당 소속 서상기 정보위원장이 그를 직무유기 혐의로 검찰에 고발한 일이 있었다.
국회 법사위원장 박영선 의원(민주당)이 2013년 6월 17일 회의에서 "대선 당시 원세훈은 공개를 안 하는 척하고 검찰에 발췌본을 밀봉해서 주고 (국정원 대신) 검찰이 공개하는 시나리오가 있었다"는 제보를 공개했다.
'대화록 공개 시나리오' 언급 3일 만에 대화록 발췌본 보여준 국정원그로부터 3일 뒤 한기범 국정원 1차장이 갑자기 국회 정보위원장실을 찾아 2007년 남북정상회담 발췌본을 보여줬다. 서상기 정보위원장이 "노무현 대통령이 정상회담에서 NLL을 포기하는 취지의 발언을 한 것을 직접 확인했다"고 주장하며 'NLL 포기' 발언의 진위에 다시 불이 붙었다.
2013년 6월 24일 오후 국정원의 정상회담 대화록 공개는 이런 논란의 연장선에서 나왔다. 그러나 국정원이나 새누리당이 주장하는 것처럼 노 대통령이 명시적으로 NLL을 포기한 발언은 없었다. 국정원의 대화록 공개 이후 발표된 일부 여론조사에서도 다수 응답은 노무현 대통령이 NLL 포기 의사를 밝힌 것은 아니라는 쪽으로 쏠렸다(디오피니언 7월 1일: NLL 포기다 33.8% - 포기 아니다 54.9%, 한국갤럽 7월 19일: 포기다 21% 포기 아니다 55%).
2012년 대선을 뜨겁게 달궜던 NLL 발언의 진위는 여론 시장에서 자연스럽게 가려졌다. 지난 5월 11일 대통령 보궐선거에서 '노무현 정치'의 계승자인 문재인 대통령이 다시 후보로 나섰지만 'NLL 포기'는 더 이상 쟁점이 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NLL 대화록 논란은 아직 두 가지 의문점을 남기고 있다.
첫째는 2013년의 국정원이 '대화록 공개'라는 무리수를 왜 두었냐는 점이다.
국정원은 "박영선 법사위원장의 발언(6월 17일) 때문에 진위 확인이 불가피했다"고 설명했지만, 당시 여야 원내대표가 협상 중이었던 '국정원 댓글' 국정조사판을 어그러뜨리려는 의도가 아니냐는 정치적 해석이 나왔다(6월 20일 오전 새누리당 최경환·민주당 전병헌 원내대표는 댓글 사건에 대한 국정조사 실시에 큰 틀에서 합의하고, 공식 발표만 남은 상황이었다).
'대화록 공개' 결정의 주체가 박근혜 대통령이었다면 최순실 스캔들에 버금가는 정치적 논란을 빚을 만하겠지만, 아직까지는 남재준 국정원장의 '단독 플레이'였다는 것이 정설이다.
남재준 원장은 "나의 독자적 판단으로 공개했다. (공개 과정에서) 국정원 직원들을 설득했다. (대화록 공개의) 역사적 책임을 지겠다"고 말했다(2013년 8월 5일 국회 국정조사특위 기관보고).
5·11 대선에도 출마했던 그는 "노무현 정부가 2007년 NLL을 포기하겠다고 밝힘에 따라 서해 5도의 우리 국민과 해병대원들이 북한의 인질로 전락할 뻔했다"고 말했다(4월 29일 중도 사퇴).
19대 국회 정보위에 참여했던 새누리당 출신 의원은 "남재준 원장은 노 대통령의 정상회담 발언을 영토주권의 포기로 해석했다. 일단 그렇게 결심이 섰다면 '불허' 결정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임명권자(대통령)에 사전보고를 안 했을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둘째는 국정원이 2013년 '처음' 공개했던 NLL 대화록이 2012년 알 수 없는 경로를 통해 이미 공개된 미스터리다.
박근혜캠프 총괄선대본부장을 맡았던 김무성 의원은 2012년 12월 14일 오후 부산 서면유세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김정일에게 가서 한 굴욕적 발언을 제가 오늘 대한민국 대표로 이 자리에서 공개하겠다"며 정상회담 대화록 일부를 낭독했다.
2012년 대화록 일부 공개한 김무성, 검찰 결론은 '무혐의'당시 언론에는 거의 보도되지 않았지만, 2013년 대화록 전문에만 나오는 표현도 있었다("제일 큰 문제는 미국입니다. 나도 역사적으로 제국주의가 반성하지도 않았고 오늘날에도 패권적 야망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에 저항감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김 의원이 원문에 가까운 형태의 대화록을 읽어본 뒤 유세장에서 내용을 공개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낳았다.
국정원이 보관하고 있던 정상회담 대화록(2급 기밀)은 2013년 6월 공개에 즈음해서야 일반문서로 재분류됐기 때문에 김 의원의 대화록 공개는 공공기록물관리법 위반으로 처벌받을 사안이었다. 이 때문에 국정원이 겉으로는 대화록 공개를 거부하면서 물밑에서는 박근혜캠프를 지원한 게 아니냐는 말도 나왔다. 실제로 당시 국정원의 한 고위간부는 새누리당의 모 최고위원을 찾아와 "우리 원이 박근혜 후보의 당선을 위해 어마어마한 일들을 하고 있다"는 식의 공치사를 하면서 사이버 심리전을 예시하기도 했다.
2012년 김 의원이 공개한 대화록의 출처를 놓고 권영세 전 주중 대사(당시 박근혜캠프 상황실장)와 김 의원(당시 총괄선거대책본부장)의 '역할론'이 부각되기도 했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은 2013년 8월 16일 국정원 국정조사 청문회에서 "(국회 정보위가 열렸던 2012년 12월 13일 권영세와) 개인적으로 가까우니까 너는 (NLL 대화록 공개를) 어떻게 생각하냐고 (전화로) 물어본 적이 있다"고 말했다. 권 전 대사는 2010년 국회 정보위원장을 지냈지만, 2012년 당시에는 공직자가 아니었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의 통화가 있던 다음날 김 의원이 출처 불명의 대화록을 유세장에서 낭독했다.
권 대사는 7일 <오마이뉴스>와 한 전화 인터뷰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발언 내용을 담은 보고서를 김 의원과 공유한 것은 맞다. 하지만, 김 의원이 부산에 내려가서 그걸 읽는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인터뷰 전문 :
박근혜캠프 상황실장 "국정원 '댓글부대', 사실이면 뿌리 뽑아야").
그러나 2014년 6월 9일 서울지검 공안1부(이현철 부장검사)는 공공기록물관리법상 업무처리 당사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김 의원과 권 대사 모두 무혐의 처분했다. '업무처리 중 알게 된 비밀을 누설한 자를 처벌한다'를 법 조항을 엄격히 적용해 청와대 비서관이었던 정문헌 총장은 벌금형으로 약식기소하고, 그로부터 대화록의 존재를 인지한 두 사람에게는 '면죄부'를 준 셈이다.
특히 정 총장의 얘기를 전해들은 김 의원이 어떠한 경로를 거쳐 유세장에서 대화록을 공개했는지에 대해 검찰은 "사실 관계를 특정하기 어렵다"고 두루뭉술하게 넘어갔다. 다음날 국민일보에 따르면, 김 의원이 2013년 11월 13일 검찰 조사 후 귀가하며 "찌라시(사설정보지) 형태로 대화록 문건이 들어왔다"고 입수 경위를 밝힌 것에 대해서는 "유세 당시 대화록 내용이 언론에 많이 보도됐다. 새누리당 선거상황실에 올라오는 보고서를 김 의원이 찌라시라고 지칭한 것"이라고 부연 설명을 해줬다.
결국 구여권 인사들 중에서는 정문헌 총장만이 '나 홀로 기소'를 당했다.
2014년 12월 23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 26부(김우수 부장판사)는 정 총장이 김 의원과 권 실장 그리고 일부 언론사 기자들에게 국정감사 당시의 발언을 사실로 확인해준 것이 '기밀 누설'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정 총장이 김 의원에게 '통일비서관 시절에 대화록을 보았다'고 사실 확인을 해 준 결과, 김 의원은 노무현의 NLL 발언이 사실이라는 점을 알게 됐고, 그 결과 대선 유세현장에서 노무현이 김정일에게 한 발언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게 됐다는 설명이다.
정 총장과 검찰 모두 항소를 포기하며 'NLL 대화록 유출' 사건의 법리 다툼은 종지부를 찍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국정원의 '재조사' 움직임에 대해 당시 사건 당사자들은 "거리낄 게 없다"는 입장이다.
정문헌 총장은 "통일비서관 시절 대화록 입수 과정을 제외하고는 검찰에 가서도 모든 걸 얘기했다. (나에게는) 더 이상 나올 게 없다"고 잘라 말했다. 정 총장은 "법정에서 비밀 누설 말고는 내용으로 다툴 부분은 없었는데, 괜히 더 시끄러워질 필요 있냐고 주변에서 권유해서 항소를 안 한 것이다. 당시 재판부도 나의 대화록 공개가 국민의 알 권리에 부합된다고 판시한 바 있다"고 부연했다.)
권영세 전 대사는 "국정원이 직접 만든 보고서가 아니라 국정원 내부로부터 주워들은 내용과 자기 의견을 가공해 캠프에 올릴 목적의 보고서가 존재했을 수는 있다"며 "그 사건에 연루됐다는 식의 누명에 답답했었는데, 어떤 의미에서는 국정원의 이번 재조사가 내가 해명할 계기가 될 수 있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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