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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조선화랑 화집을 보고 일본에서 찾아오다

제13회 도쿄전 포스터
 제13회 도쿄전 포스터
ⓒ 문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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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3/4월에 조선화랑에서 열린 소원문은희전 누드 크로키 화집이 운보 김기창 화백을 통해 일본의 미술평론가 우사미 쇼고((宇佐美省吾)에게 전해진다. 우사미 쇼고는 새롭게 시도된 문은희의 수묵 누드에 감동을 받아 서울 신사동 화실을 찾아왔다. 1987년 9월 18일부터 10월 3일까지 도쿄 우에노 도쿄도미술관에서 열리는 제13회 도쿄전에 문은희의 수묵 누드를 전시하면 좋겠다고 제안을 했다.

340명이 출품하는 단체전인데, 문은희에게 개별 전시실을 제공한다는 조건이었다. 이에 문은희는 그 제안을 받아들여 수묵 누드 12점을 도쿄전에 출품하게 되었다. 제13회 도쿄전을 찾은 미술평론가 와시오 도시히코(ワシオ トシヒコ)는 <신미술신문(新美術新聞>에 도쿄전을 총평하며 문은희를 언급했다. 그녀의 누드 크로키가 형태와 선묘를 결합한 기교를 보여주고 있다고 말한다. 

4폭 병풍 작업을 하는 문은희
 4폭 병풍 작업을 하는 문은희
ⓒ 문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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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전은 해마다 열리는 전시여서 문은희의 수묵 누드는 이듬해인 1988년에도 초대를 받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우사미 쇼고로부터 4폭 병풍(140㎝×265㎝)에 누드군상을 그려 보내달라는 주문을 받는다. 문은희는 병풍 50장을 그려 그 중 잘된 작품을 고르기로 하고 작업을 시작했다. 계절이 여름이어서 더위 때문에 작업이 힘들었고, 모델을 여섯 명이나 썼기 때문에 개개인의 움직임에 신경을 써야 했다.

"스무 점 정도를 그렸는데 한 포즈만 잘못 그려도 버려야 했어요. 또 색깔이 잘못 칠해져도 마찬가지고요. 그때 여섯 사람의 군상을 그렸는데 꼭 한 사람이 잘못 되는 거예요. 정말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절실하더군요. 몇 번이나 일본에 못 하겠다고 편지를 쓰고 싶었어요, 그러다 마음을 고쳐먹었지요. 끝까지 해 보자고. 어쨌든 50점을 완성했어요. 다른 작품은 팔이 아파 못 그리는데, 병풍은 몸이 아파 못 그리겠더군요. 병풍이 오죽이나 커요. 한 장 그리고 붙이고 또 그리고 붙이고. 이것이 반복되니까, 다 그리고 나서 결국은 쓰러졌어요."

1988년 도쿄전에 4폭 병풍 수묵 누드 2점을 전시하다.

4폭 병풍의 수묵 누드
 4폭 병풍의 수묵 누드
ⓒ 문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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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은희는 50점의 병풍 중 두 점을 선택해 제14회 도쿄전에 출품했다. 전시회는 9/10월 우에노 도쿄도미술관에서 열렸다. 이때는 4폭 병풍 두 점을 출품했지만 일본 화단에 문은희를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것은 와시오 도시히코가 <신미술신문> 1988년 10월 11일자에 쓴 도쿄전 평을 통해 확인된다.

"금년에도 수묵의 문은희 '누드 군상'이 타 작품을 압도하고 있다. 병풍화로 일회성의 필세가 생명을 간직하고 있으며, 환상적이면서도 기품 있는 에로티시즘을 창출하고 있다."

이 글을 읽는 순간 문은희는 지난 여름의 고생을 잊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일본에서 자신을 알아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번의 전시를 통해 수묵 누드라는 새로운 장르를 일본에 알렸다는데 자부심을 느끼기도 했다. 이들 작품에서 문은희가 추구한 것은 우아한 여인의 몸매, 역동적인 움직임, 드러나는 감정 표현이다. 그런 의미에서 문은희의 수묵 누드는 에로티시즘을 창출한다기보다는 에로티시즘을  승화시키고 있다. 

1989년 문은희 수묵화전 <나부백태>

와시오 도시히코와 스트라이프하우스 미술관장이 문은희와 함께 김기창 화백을 방문
 와시오 도시히코와 스트라이프하우스 미술관장이 문은희와 함께 김기창 화백을 방문
ⓒ 문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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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봄 와시오 도시히코가 스트라이프하우스 미술관장 츠가하라 미사오(塚原 操)를 대동하고 화곡동 화실을 방문한다. 일본 도쿄에서 문은희 수묵화전을 열 테니 작품을 제출할 수 있겠냐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작품들을 살펴보고 작업 장면을 비디오에 담기도 했다. 또한 운보 김기창 화백을 방문해 문은희의 예술역정과 작품에 대해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여기서 와시오 도시히코는 두 가지 질문을 한다.

첫째 문은희가 어떤 제자인가? 둘째 문은희의 수묵 누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에 대한 운보의 생각은 간단명료했다. 첫째 몇 백 명 제자 중 가장 열심히 하는 제자다. 둘째 세계에서 제일이다. 이 말을 들은 스트라이프하우스 미술관장은 6월에 전시를 약속하고 출품작을 선별하게 되었다. 그리고 100점 정도가 6월 5일부터 30일까지 도쿄 스트라이프하우스 미술관에서 전시될 수 있었다.

스트라이프하우스 미술관을 찾은 구상 시인과 이남덕 여사
 스트라이프하우스 미술관을 찾은 구상 시인과 이남덕 여사
ⓒ 문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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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일본을 오가고 체류하는 비용이었다. 친정어머니로부터 20만 엔을 받고, 운보 선생으로부터 여비 일부를 지원 받아 일본으로 떠날 수 있었다. 한 달간의 전시를 위해 <문은희 수묵화전 『나부백태』> 도록이 나왔고, 평론을 와시오 도시히코가 썼다. 전시회는 미술계 인사와 언론계 인사들이 찾아 큰 인기를 얻었다.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는 국내 인사로 구상 시인, 최화국 시인, 이중섭 화백의 부인 이남덕 여사 등이 찾아왔다.

와시오 도시히코는 문은희의 수묵 누드를 서양의 형태와 동양의 선묘를 조형적으로 융합시킨 작품이라고 찬양하고 있다. 그러면서 문은희를 수묵 누드의 효시(嚆矢)라고 말한다.

또 다른 4폭 병풍
 또 다른 4폭 병풍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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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에서는 나부라고 하는 주제는 역사성으로부터 유리되어 왔다. 지금까지 수묵화의 본고장인 중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뚜렷이 묘사된 경우는 없었다. 아마도 이번 전시회에 임하는 한국여류화가 문은희를 그 효시로 꼽아야 할 것이다. 나부군상을 하나의 매스(Mass)로 파악하고, 서양화적인 조형의식을 근저로 하여 파악된 생동감 넘치는 선묘와 생기 있는 에로티시즘, 그것은 확실히 문은희에 의해서 처음으로 달성되려고 한다." (<문은희 수묵화전 『나부백태』> 도록)

<나부백태>전시회에 대한 평가는 어땠을까?

문은희 수묵화전 <나부백태> 전시 포스터
 문은희 수묵화전 <나부백태> 전시 포스터
ⓒ 문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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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은희 수묵화전에 대한 논평은 <신미술신문>에 가장 먼저 실렸다. 6월 11일자 "아트 토픽스(artopics) '89"에 '세계 최초의 수묵화 누드'라는 제목으로 문은희 개인전에 대한 글이 실렸다. 먹을 품은 붓으로 인체의 선을 거침없이 묘사하는 수묵 누드는 이제까지 누구도 도전해보지 못한 테마라는 것이다. 이번에 출품된 병풍은 50작품 정도 그려서 선택한 그림이라는 내용도 있다. 기사와 함께 4폭 수묵 누드 병풍 앞에 한복을 입고 앉아 있는 문은희의 사진도 실렸다.

공명신문(公明新聞)에도 『나부백태』기사가 났다. 이 글 역시 와시오 도시히코가 썼다. 수묵 누드라는 터부에 도전한 용기 있는 여성 동양화가가 문은희라는 것이다. 

"육체의 내부에 숨겨진 감정을 표현한 여러 가지 포즈를 그린 개개 누드화도 아름답지만, 훨씬 더 아름다운 것은 4폭 병풍과 50m 가까운 두 권의 두루마리 그림이다. 이들은 군상으로 압권이다." (공명신문)

전시도록에 실린 문은희
 전시도록에 실린 문은희
ⓒ 문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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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히신문(朝日新聞) 6월 27일자에는 '수묵 누드 신 장르에의 도전'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났다. 문은희가 세계 최초로 수묵 누드라는 새로운 장르에 도전하고 있다. 각양각색의 변화를 보여주는 누드의 아름다움을 수묵의 선을 통해서 십분 표현했다는 내용이다. 

일본 미술계의 대표 월간지 <삼채(三彩)> 6월호도 '금월(今月)의 전람회'란에 "문은희 수묵화전 「나부백태」"를 실었다. 세 쪽에 달하는 긴 기사로, 와시오 도시히코가 썼다. 제목은 '융합되는 서양의 형태와 동양의 선묘'다. 전시회 도록의 평론과 같은 제목으로, 문은희의 수묵 누드를 훨씬 더 자세하고 정확하게 기술했다.

<삼채(三彩)> 6월호에 실린 문은희 기사
 <삼채(三彩)> 6월호에 실린 문은희 기사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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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은희의 수묵 누드는 서양의 형태와 동양의 선묘가 조형적으로 새롭게 융합되는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먹을 사용한 나부군상이 지난 2년간 연속해서 도쿄도미술관에서의 도쿄전에 초대되어 각광을 받은 바 있다. 서양화적 조형의식을 근저에 깔고 농담과 갈필(渴筆)을 자유분방하게 구사하는 선묘를 통해 대단한 기품의 에로티시즘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것에 필자가 매료될 수밖에 없다는 내용이다.  

국내에서는 전시회가 끝난 후인 7월 4일 국민일보에 기사가 나왔다. 최화국 시인이 '여류화가 문은희씨 수묵화전을 보고'라는 부제의 글을 실었다. 제목은 "절묘한 나부의 선 품위 있는 에로스"다. 일본 도쿄의 스트라이프 하우스 미술관에서 열린 문은희 누드 크로키 수묵화전이 큰 반향을 일으켰다는 소개와 함께, 최화국 시인이 전시회를 본 소감을 보내왔다고 적고 있다.

1989년 문은희 수묵화전(일본 전시회)에 대한 국민일보 기사
 1989년 문은희 수묵화전(일본 전시회)에 대한 국민일보 기사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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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시회에서 선보인 문화백의 시도는 동양화, 더욱이 수묵만으로 구사된 나부의 선의 묘사를 통해, 서양화적 조형의식을 바탕에 깐 다이내믹하고도 우아하며 절묘한 경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은 우리의 미학 전반, 특히 시문학에 있어서도 결핍되어 있다는 지적이 곧잘 나오는 니힐과 에로스를 나부화에 도입하여, 은근히 풍기는 품위 있는 에로스를 절품(絶品)으로 빚어 올린 것이었다.

[…] 미술평론가들은 '문씨의 독특하고 절묘한 선의 묘사는 과거에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나부화에까지 이르렀다'고 평하면서 문화백을 '새로운 장르의 개척자'라 극찬했다. […] 이번 전시회를 계기로 도쿄의 전통 있는 이와사키(岩崎)미술출판사에서는 문씨의 화집을 내기로 했다고 한다." (국민일보, 국민평단 미술)


태그:#도쿄전, #도쿄도미술관, #문은희 수묵화전 <나부백태>, #스트라이프하우스 미술관, #와시오 도시히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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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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