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지하철을 타면 검은 정장을 입은 직장인을 많이 볼 수 있다. 검은 정장을 입는 것은 일본 사람들이 어려서부터 빨강이나 노랑 같은 원색보다는 검정이나 감색 같은 차분한 색깔의 옷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특히 구직자들이 많이 입어 '리쿠르트 수트(취업 복장)'라고도 부른다. 일본에서 1년이 시작되는 4월에는 이런 옷을 입은 무리를 많이 볼 수 있다.
이렇게 번듯이 취직해 검은 정장을 입고 회사로 향하는 이들은 고민이 없을 거 같은데, 그런 것도 아니다. 직장인들은 점심을 뭘 먹을까 고민한다. 고독한 대식가는 오늘 점심메뉴로 돼지고기를 선택했다.
묵직한 기름 맛에서 세월의 무게가돼지고기를 취급하는 '미야코야(みやこや)'에 갔다. 도쿄 나카노구 사기노미야역에서 3분 거리에 있어 찾기 어렵지 않은 곳이다. 오후 2시 15분께 식당에 들어섰다. 4인용 테이블 하나만 있었고, 나머지 자리는 모두 카운터석이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이 식당의 오스스메(추천 메뉴)인 로스닌니꾸야끼(돼지 등심 마늘구이) 정식을 주문했다. 식당 TV에서는 일본 고교야구 전국대회인 고시엔이 중계되고 있었다. 카운터석에 앉은 중년 남성이 고등학생들의 게임을 진지하게 보고 있었다.
로스닌니꾸야끼는 이름 그대로 마늘의 맛과 향이 강했다. 두툼한 등심 두 덩이에는 다진 마늘과 고추기름이 발라져 있었다. 밥 반찬으로도 나쁘지 않았지만, 맥주와 함께 먹으면 더 좋을 것 같았다. 채썬 양배추도 듬뿍 올라왔다. 같이 나온 마카로니 샐러드는 직접 만든 듯 길쭉했다. 마요네즈의 부드러움이 마늘의 강한 맛을 중화시켰다.
로스카츠의 맛도 궁금해 하나 시켰다. 주문은 받은 사장은 생고기를 꺼내 그 자리에서 칼로 다진 뒤 튀김옷을 입혀 튀겼다. 로스카츠는 묵직한 기름맛이었다. 고기는 질긴 듯 쫄깃했다. 튀김은 고기와 분리됐다. 옆에 놓인 레몬을 뿌려 먹으니 돈카츠를 상큼하게 맛볼 수 있었다.
36년 영업한 미야코야는 나이 지긋한 사장이 노익장을 과시하는 가게다. 그는 점심 장사를 마칠 즈음 전화로 고기를 주문했다. 까맣게 기름때가 눌은 튀김 솥에서 세월의 무게가 느껴졌다. 할아버지가 직접 만드는 돼지 등심 요리의 맛이 궁금하다면 사기노미야를 찾을만 하다. 밥을 먹고 나서 조용한 사기노미야를 가볍게 산책해도 좋다.
고독한 여행가가 된 선생님본고장의 초밥을 맛보고 싶었다. 1시간여를 달려 쓰키지 시장에 도착했다. 일본의 노량진 수산시장 같은 곳으로 현지에서는 '도쿄의 부엌'이라고 부른다. 역에서 나와 시장으로 가는데 침낭을 멘 채 히치하이킹을 하는 한 남성이 보였다. 조심스레 말을 걸어보니 히치하이킹 여행을 한다고 했다. 휴가 중이라는 고등학교 교사 렌(24·이바라키)씨는 "오늘 아침부터 일주일 여정으로 여행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는 히치하이킹 여행을 하는 이유로 '커뮤니케이션'을 꼽았다. 자전거는 혼자 달리지만, 히치하이킹은 같이 차를 타 얘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여행의 무운을 바라며 시장으로 걸어갔다. 시야에서 사라질 때쯤 그는 자리를 옮겨 차를 얻어타려는 듯 발길을 돌렸다.
오후 4시 반께 쓰키지 시장에는 비둘기만이 길바닥에 떨어진 음식물을 쪼아 먹고 있었다. 드문드문 사람들이 문 열린 가게를 찾아다녔다. 쓰키지 시장은 수산물이 들어오는 새벽이 가장 붐빌 시간대다. 대부분의 가게들이 오후가 되면 문을 닫는다.
니혼TV의 한 프로그램에 소개된 적 있는 '츠나오(鮮男)'는 새벽 6시 반부터 손님을 받고 오후 3시가 되면 장사를 마친다. 저녁 손님을 받을 준비를 하는 몇몇 가게 앞에서는 밥 짓는 냄새가 풍겼다. '스시 잔마이(すしざんまい)' 같은 24시간 영업하는 초밥집은 입구에서 호객 행위를 했다.
쓰키지 시장에서는 스시 잔마이처럼 한 점에 90엔짜리를 파는 대형 초밥집부터 10점에 6,500엔을 받는 고급식당까지 다양한 가격대의 초밥을 즐길 수 있다. 고급 초밥을 맛보고 싶다면 시장 한쪽 작은 골목인 '이치바 도리(市場通り)'의 '쓰키지 이타도리 별관(築地 虎杖)' 같은 곳을 찾으면 된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스시 잔마이의 본점 솜씨가 궁금했다. 2001년부터 영업한 스시 잔마이는 일본 전역에 지점을 둔 초밥 체인점이다. 쓰키지 시장에만 지점을 두 군데 뒀다. 이곳의 참치 초밥은 기름지고 부드러웠다. 같이 시킨 나마비루(생맥주)와도 잘 어울렸다. 과연 사람들이 많이 찾을만 했다.
시장을 나와 지하철역으로 가는데 시장 입구에서 작은 초밥집이 눈에 띄었다. 서서먹는 초밥집인 '오카메'였다. 서너 사람이 서면 꽉 찰 정도였다. 곧장 들어가 오마카세(요리사 추천)를 주문했다. 간장 발린 초밥이 대나무 잎에 올라왔다. 참치 초밥을 한 점 먹으니 입에서 녹아내렸다. 많이 기름지지도 않고 적당했다. 행복했다. 초밥으로 유명한 시모노세키 가라토 시장을 능가했다. 옆에서 먹던 50대 중년의 손님도 맛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카메의 초밥으로 기억될 쓰키지 시장이었다.
스모 선수 가족이 만드는 창코나베의 맛도쿄 여행의 마지막 밤은 창코나베로 장식하기로 했다. 창코나베는 스모선수들이 즐겨 먹는 전골요리다. 원래는 선수들이 직접 해 먹는다. 스모 경기장인 국기관이 있는 료고쿠에는 창코나베 전문점 '갓포 창코 오우치(割烹 ちゃんこ 大内)'가 있다.
여덟시에 들어간 식당에는 혼자 온 손님과 커플뿐이었다. 옆자리 커플은 먹으면서 '우마이(맛있어)'를 연발했다. 기대가 더 높아졌다. 닭고기 창코나베인 토리솟푸가 인기가 많지만 부타미소야끼(일본식 된장인 미소 육수에 돼지고기를 넣은 창코나베)가 맛있어 보였다. 창코나베는 본래 닭고기를 쓴다. 돼지나 소는 네발로 걸어서 패배한다는 걸 뜻하기 때문이다.
종업원은 재료를 산처럼 쌓은 접시를 가져왔다. 미소 육수가 끓는 냄비에 재료를 넣기 시작했다. 창코나베는 풍부한 재료를 넣는 게 특징인데 얇게 저민 돼지 등심, 곤약, 유부, 양배추 등 가짓수만도 열손가락을 넘었다. 충분히 익은 듯해 닫았던 뚜껑을 열었다.
국물은 가벼운 미소의 맛이었다. 깔끔하면서도 깊은 맛이 입안에 계속 남았다. 두부는 부드러워 푸딩 같았다. 얇게 저민 등심은 아주 쫄깃했다. 양배추의 맛도 좋았다. 땀이 나기 시작해 입고 있던 셔츠를 벗었다. 먹을수록 기운이 샘솟았다. 마치 요코즈나(스모 선수 서열에서 최고등급의 지위)가 된 것 같았다.
갓포 창코 오우치는 1940년대부터 1950년대에 활약했던 스모 선수 오우치야마 헤이키치(大內山 平吉)의 가족이 운영한다. 실내가 안쪽으로 긴 식당은 카운터석과 다다미 바닥이 있었다. 벽에는 오우치야마의 현역 시절로 보이는 사진들이 붙어 있었다. 창코나베 전문점의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스모의 고장에서 맛본 스모 선수들의 보양식은 대단했다.
계산을 하고 나오며 "혼또니 고치소사마데시따(아주 잘 먹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종업원들은 "아리가또 고자이마시따(고맙습니다)"라고 답했다. 저야말로 고맙습니다. 잘 먹었습니다, 도쿄. <시리즈 끝>
덧붙이는 글 | '아, 배고프다.' 식욕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맛있는 음식을 즐기는 것이야 말로 최고의 행복입니다. 임형준 기자는 8월 11일부터 17일까지 6박 7일 동안 도쿄를 여행하며 보고 먹고 느낀 점을 씁니다. 일본 드라마 <고독한 미식가>의 고로상처럼 맛집을 찾아다닙니다. '고독한 대식가'가 되어 먹고 싶은 음식을 즐기며 도쿄를 맛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