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애자인 저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글이라 경험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을 거 같아요. 그 부분에 대한 양해를 구합니다.
"니가 참 좋아 햇살 같아서 난 좋아바다의 반짝임 보다 더 날 눈부시게 하는난 너의 향기가 좋아 깨끗한 비누향기가그 어떤 속삭임 보다 더 날 설레이게 하는"가수 프롬의 <좋아해>라는 노래의 가사를 흥얼흥얼 따라부르다 어젯밤 가게를 찾아왔던 한 커플의 모습을 떠올린다. 밤 10시 반쯤 커플로 추정되는 여, 남 등장. 주문한 소시지 메뉴의 소스를 준비 중인데 "저기요" 하는 소리가 들려 봤더니 남성 분이 조심스레 "혹시 모기향이나 모기약 없을까요?" 하신다.
아차, 문을 자주 열고 닫는 탓에 가끔 모기가 출몰하곤 하는데다 두 분이 앉은 자리가 또 바로 문 옆. "아, 문을 열고 닫는 사이에 모기가 들어왔나봐요. 잠시만요" 하고 모기약을 챙겨 드렸다. 두 분 테이블을 지켜보고 있노라니 서로의 다리를 향해 모기약을 장난치듯 뿌려대곤 혹시 서로에게 냄새가 날까봐 손으로 휘휘 젓고 있다.
'앗, 저분들... 사랑에 빠지셨구나.' 혼자 배시시, 그 풍경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일을 하다 보면 커플로 추정되는 분들을 보곤 한다. 맥주 6병을 안주 없이 조용히 노나드시고 가시는 분들부터 늦은 저녁 약간 취한 듯한 모습으로 찾아와 수입맥주를 드시는 분들까지. 자주 찾아오시는 분들은 이제 제법 얼굴도 익숙해졌다. 깔깔깔 웃음이 번지고, 서로가 주고받는 시선이 달달하다!
카운터에 앉아 그런 모습들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종종 나의 옛사랑의 기억도 살포시 고개를 든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이 나에게도 있었지(흠 흠, 추억을 소환할 참인데 당사자 분들이 혹 이 글을 볼까 매우 조심스럽고, 부끄부끄한 마음).
대학시절 학교 농활 담당자였던 나와 농민회 담당자였던 그! 농활 마지막날 마을 점검차 쭈욱 도는데 마을에 도착할 때마다 한 잔, 한 잔 술을 마시다 보니 나는 조금씩 취해가고 그는 운전을 담당했으니 말짱하던 상태였다.
낮 동안 내내 일했던 그는 졸립다며 잠을 깰 참으로 김광석님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나는 비몽사몽 씩씩하게 부르던 그의 노래를 들어더랬지. 그 순간이었으려나. 사랑에 풍덩 빠지고 말았던 것이.
백화점에서 잠깐 일을 하던 시절, 직원 식당에 가기 전 떨어진 식권을 사러 갔다 나오는 길. 우리 매장과 대각선에 있어 종종 눈인사를 건넸던 그와 그의 동료가 걸어왔다. 그 순간이었을까. 사랑에 풍덩 빠지고야 말았던 것이(그는 그 순간, 내가 걸어오는 게 슬로우 모션으로 보였다고 했다. 그리곤 내가 자신을 빤히 쳐다봤다고, 눈빛 한 번 안 피하고. 솔직히 고백하자면, 난 누구든 빤히 잘 쳐다본다는 거).
때론 그렇게 강해보이던 이의 약한 모습에, 때론 내가 좋아하는 인디 가수의 노래를 먼저 선곡해 듣는 그 사람의 취향에 빠졌다. 하지만 페미니스트로 나를 정체화하고 나서의 나의 연애는 늘 고민과 갈등의 연속이었다.
"콘돔 없으면 할 수 없어. 지금이라도 사 와"라고 상대에게 말하는 데까지도 꽤 오랜 기간이 걸렸으니 나의 성적 욕구를 오롯하게 표현한다는 건 여전히 큰 숙제로 남아있다. 집착과 소유에서 벗어나 서로의 세계를 확장시키는 뭔가 멋진 연애를 해보자고 마음은 굳게 먹었으나, 집착하고 소유하고픈 마음은 언제나 내 발목을 굳게 잡았다. 그럴 때면 나도 결국엔 이런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는 건가 내내 괴로웠다.
소소한 '말'들은 항상 싸움의 이유가 되기도 했다. 다른 지역에서 살고 있던 당시 애인의 지인들은 "언제 OO로 올라올 거예요?"라고 생각 없이 물을 때가 있었다. 그럼 난 "제가 OO로 데리고 내려갈 건데요"라고 대답했다. 그리곤 둘만 남은 자리에서 '왜 당신의 지인들은 내가 올라가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나도 나름 내가 있는 곳에서 내 자리를 만들어가고 있는데. 종종 감정이 상해 싸웠다.
함께 영화를 보고 나선 "여자 주인공은 남자 주인공의 성공을 위해 조력했는데 남자 주인공은 왜 끝까지 여자 주인공을 조력하지 않았을까?"하고 물었고, "너는 왜 모든 영화를 그렇게 보냐? 영화의 내용은 따로 있는데"란 답을 들어 한참 싸운 적도 있다.
애인의 지인을 만나는 날이면 그들은 당연하듯 나를 '형수' 혹은 '재수씨'라고 불렀고, 그들에게 나를 소개하며 내가 어디에서 무얼 하는 사람인지 소개하기 보다 'OO의 애인이야'라고 할 때도 있었다. "전 누구 누구의 무엇이 아니에요. 그냥 미리내씨라고 불러주세요" 대답했을 때 이어지던 싸-한 분위기(뭐, 물론 나의 연애가 페미니즘으로 전부 어그러진 것은 아닐거다. 나의 미성숙한 관계 맺기 방식도 크게 한몫 했을 터). 그렇게 몇 번의 연애 실패(?)를 경험하며 나에겐 세상 가장 어려운 지상 과제가 연애가 되어버렸다.
가부장제 안에서 '온전한 사랑'은 불가능하다우리 사회에서 여성과 남성의 사랑은 정말 가능하긴 한 걸까? 한국에서 여성은 돌봄 능력을 몸에 탑재하고 태어났으며, 사랑에 더 관심이 많거나 사랑의 능력이 뛰어난 존재라고 여겨진다. 여자 아이는 어렸을 적 인형 놀이를 하며 '엄마'를 따라 한다. 어떻게 '엄마'가 되는지 자연스레 배운다. '돌봄'은 그렇게 체화된다.
그뿐이랴. TV 드라마 속 여주인공 옆에 있는 너무나 매력있고, 능력까지 갖춘 멋진 여성은 늘 여주인공을 좋아하는 남성 주인공을 빼앗기 위해 온갖 악행을 저지른다. 그 드라마의 막장을 담당하는 거다. 이런 식의 극 전개는 '도돌이표'로 끊임없이 반복돼서 이젠 지겹다는 말이 더 지겨울 지경이다. 그렇게 여성은 끊임없이 '사랑'을 찾고, 갈구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반면 남성은 어렸을 때부터 '돌봄'을 지속적으로 배우지 않을 뿐더러, 돌봄 능력이 없더라도 사는 것에 하등 무리없이 키워진다. 그들은 생명을 살리고 기르는 것보다 전쟁놀이와 같은 폭력적 게임을 통해 생명을 죽이는 것이 더 남자다운 것이라고 배운다. TV 드라마 속에서 까칠하고 무심한 남주인공 옆에 있는 다정하고 친절하고, 배려깊은 남성은 매번 사랑에 실패한다(아, 드라마 <질투의 화신> 여주인공 표나리에게 다정다감하며, 감정 표현도 솔직하게 잘하던 고정원을 내가 얼마나 응원했는데...). 결국 까칠하고 무심함은 친절과 배려를 이긴다.
'돌봄'을 강요받고, '사랑'을 갈구하는 여성과 '무심(無心)'함이 지상 최대의 매력이 되는 남성의 사랑은 과연 가능한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여성주의 사상가 벨 훅스는 그녀의 책 <올 어바웃 러브>와 <사랑은 사치일까>에서 사랑을 찾아 떠나는 여정은 곧 진정한 자아의 해방을 위한 길이라며 용기있게 그 여정을 떠나라고 조언한다. 대신, 사랑에 풍덩 빠질 것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그 사랑을 선택하라고.
하지만, 그녀는 그 '사랑'이라는 것 또한 현재의 불평등 속에서 깊게 또아리 틀고 있는 가부장제 안에서는 불가능함을 역설한다.
"사랑할 줄 아는 남자를 찾는 데는 아주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남자는 사랑하지 않는 대신 가부장제가 가져다 준 보상과 권력의 형태에 여전히 연연한다. 가부장제는 남성들이 스스로를 사랑하게 하지 못하게 하고, 온전한 자신을 부인하게 함으로써 그들을 상처 입힌다. 그러므로 사랑을 알고자 하는 남성들 역시 가부장제에 저항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저항을 시도하는 남자들이 분명히 있으며, 여성들은 그런 남성을 찾고 있다." - 벨 훅스 저서 <사랑은 사치일까> p.220"
나는 '평화'를 사랑하며, 기꺼이 '돌봄'의 능력을 키우기 위해 노력하고, 타인의 아픔과 기쁨에 깊이 '공감'할 줄 알며, 자신의 아픔과 기쁨도 드러내길 부끄러워하지 않는 그런 남성들이 내 곁에 있을 거라 기대한다. 특히 요즘 페미니스트로서 자신을 정체화하고 성찰하는 남성들의 존재가 드러나고 있지 아니한가.
그들과 손 맞잡고 가부장제에 저항하며, 사랑을 제대로 공부하고 알아간다면 어떨지... 몽글몽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