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을 잘 못 하는 내가 밤마다 거짓말을 하던 때가 있다. 파출소에서 근무할 때였다. 3교대로 돌아가는 주-주-주-야-비-야-비-야-비 근무였는데, 야간 때마다 밥 먹듯이 듣던 욕설보다 더 화가 나는 건 "야 이X아, 넌 몇 살이야?"라는 말이었다.
내가 몇 살 먹었는지 뭔 상관? "너보다 나이 많다, 왜?"라는 답변이 머리를 거치지 않고 나왔다. 상대방이 40대든 50대든 상관하지 않았다. 물론 나는 당시 경찰서 전체에서 가장 나이가 어렸다. 하지만 내가 동안도 아닌데 파출소 손님(?)인 피의자들은 무조건 내 얼굴을 보고 나이 어린 여자로 무시하려 들었다. 어쨌거나 나는 나이 많은 척을 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최소한의 존중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내 말이 먹히지 않을 것을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이다.
1년 내내 거짓말은 계속되었다. 애가 둘이라고 뻥을 친 적도 있었는데, 나에게 한국어에 존재하는 욕이란 욕은 다 하던 피의자가 그 얘기를 듣고 미안하다고 사과한 적도 있었다. 파출소 손님들은 파출소에 와서도 나이와 반말 때문에 싸웠다. 말싸움의 끝을 장식하는 것은 언제나 "야 이 XX야, 너 몇 살이야?"였다. 밤마다 단순 폭행이나 행패는 다반사인데다 칼부림과 '떼폭'도 종종 발생하던 초임지에서 나이와 반말은 항상 싸움의 도화선이자 증폭제였다.
이 싸움은 조직 내에서도 종종 벌어졌다. 계급사회인 경찰 내에서 나이는 어리고 계급은 높으니 사람들이 간을 봤다. 경찰관들은 '나이도 계급이고, 계급도 나이'라는 말을 자주 썼다. '네가 계급은 높아도 나이는 어리니까 나이 많은 사람을 존중하라'는 것을 돌려 말한 것 같다. 물론 나는 그렇게 했다. 나는 모든 사람의 '나이'를 '계급'으로 존중했고, 모두에게 존댓말을 썼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나의 '계급'을 '나이'로 인정해주지 않았다.
한번은 나보다 네 살 많은, 이제 갓 시보를 뗀 순경이 순찰차 안에서 나에게 말을 높였다 낮췄다 했다. 나는 곧바로 지적했다. "박 순경님, 말을 높이실 거면 높이시고, 낮추실 거면 낮추세요." 박 순경은 볼멘소리 가득한 비꼬는 투로 "알겠습니다"라고만 했고, 그 이후 되도록 나와 말을 섞지 않으려고 했다. 그는 나보다 계급이 낮은 모든 사람들에게 존댓말을 썼지만, 유독 (팀장과 계급이 같으나 나이가 어린) 나에게는 존댓말을 쓰는 것을 자존심 상해했다.
또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나보다 세 살 많은, 파출소 관리반 순경이 임신했다며 갑자기 병가를 두 달이나 냈다. 그녀는 나에게 한 마디 부탁조차 하지 않은 채 경찰서 생안계에다 '관리반 일에 대해서는 주임(나)한테 물어보라'고 전했던 것이다. 황당해서 그녀에게 전화를 했다.
"순경님, 저에게 부탁이라도 하고 가셨으면 제가 당연히 도와드리죠. 그런데 이렇게 당사자한테 말씀도 안 하시고 경찰서에다 저 찾으라고 하는 건 좀 아니지 않나요? 전 이런 식으로 일 못 하니까 오셔서 직접 처리하든지 알아서 하세요." 그러자 그녀는 갑자기 전화로 내 귀에다 대고 소리를 질렀다. "야~! 아픈 사람한테 이런 식으로 일 시키는 게 어딨냐!" 그 사람이 원래 다른 곳에서 근무할 때도 이상한 사람으로 소문난 것은 나중에 알았지만, 당시에는 내가 그녀보다 나이가 더 많았더라면 나에게 그런 망발을 하지는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 많다고 '반말 프리패스'가 생기는 건 아니다
경찰청에 가서도 수난은 계속됐다. '회의'라 쓰고 '일방통행식 훈화 말씀'이라 읽었던 팀 회의는 청장이 국장들에게, 국장들이 과장들에게, 과장들이 팀장들에게 불러준 훈시사항을 받아적는 시간이었다. 이 '받아쓰기' 시간은 짧게는 10분에서 길게는 30분까지 이어졌고, 그 후에는 팀장의 훈시사항을 묵묵히 듣고 있어야 했다.
할 일 많아 죽겠는데 팀장이 자기가 여행을 갔는데 뭐가 좋았고 어쨌다는 쓸데없는 말을 한 시간 정도 듣다 못해 한 마디했다. "팀장님, 지금 저희 회의시간이고 할 일도 많은데 여행 이야기는 그만하시고 업무 나누고 일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팀장은 즉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며 화를 냈다. 뭐라고 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네가 뭘 알아' 하는 뉘앙스의 반말, 막말을 했던 건 분명히 기억난다.
솔직히 매번 속상하고 억울했다. 백 번 양보해서 내가 '싸가지가 없어서' 저런 경험들을 했다고 쳐도, 내가 저 상황에서 나이가 많았다고 가정해보면 못할 말을 한 것도 아니었다. 상대방보다 나이가 많았다면 아마도 저런 막말이나 무례함을 당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같은 상황에서 나온 같은 말이라도 나이가 많은 사람이 하는 것과 나이가 어린 사람이 하는 것은 용인되는 범위도 다르고, 같은 뜻도 다르게 받아들이는 한국은 결코 평등한 민주사회가 아니다. 존비어를 나이에 따라 차별적으로 쓰는 한국어는 차별과 억압의 언어다.
한국 사회는 나이에 민감하다. 만나자마자 상대방이 몇 살인지 물어보고, (혹은 물어보지도 않고) 존댓말을 하거나 반말을 한다. 그러나 이 민감한 나이 감수성은 일방통행식이다. 나이 어린 사람이 초면에 반말을 쓰면 '싹퉁바가지'가 없는 것이지만, 나이 많은 사람이 초면에 자신보다 어린 사람에게 반말을 쓰면 괜찮은 거다.
겨우 스무 살, 스물한 살인 대학생들끼리 선배에게는 깍듯이 존댓말을 해야 하고, 한두 달 먼저 태어나고 한두 해 먼저 입학한 것을 무슨 벼슬처럼 여긴다. 나이에 따른 권위와 차별을 체화한다. 자신도 나이가 어리다고 차별받고 억압받았으니, 신입생이 들어오면 자신이 당했던 것처럼 똑같이 차별하고 억압하려 든다.
한국인들은 모국어를 배우면서부터 항상 상대방과 자신의 위치의 상대적 높이를 의식해야 한다. 굉장히 피곤하고 소모적인 일이다. 한국인뿐만 아니라 한국어를 배우거나 한국에 사는 외국인들은 이 소모적인 룰을 따라야 한다. (겉으로나마) 평등한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나라에서 국제화 시대에 이 존비어 체계는 외국인들에게 있어 한국어 학습의 걸림돌이자 매력을 떨어뜨리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음에도, 한국인들은 존비어 체계를 '전통'이라며 옹호한다.
반말이 '친근감'을, 존댓말이 '거리감'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반말은 '무례함'을, 존댓말은 '공손함'을 나타내기도 한다.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초면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는 '거리감'을 무시해도 되는 게 아닌데, 일부 나이 많은 한국인들은 으레 그 거리를 침범하는 '무례'를 저지른다. 나는 그 무례함이 싫다. (그 무례함이 싫다고 한국어 배우기를 포기한 외국인 친구도 있다.)
한국이 중세 신분제 사회가 아니라 진정 평등함을 추구하는 민주주의 사회라면, 나보다 50년을 더 살았든 500년을 더 살았든, '나'라는 사람을 처음 만나서 반말을 하게 허용하는 한국어가 무례해서 싫다. 당신의 인생 경험과 연륜은 존중하지만, 그것이 나에게 반말을 해도 되는 '프리패스'는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필자의 브런치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본인이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