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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지학순 주교, 고 이영희 교수, 고 이돈명 변호사, 고 송건호 선생 등 명사들과 교분이 두터웠던 인물. 오적을 쓴 생명사상가 김지하 시인의 정신적 스승 그리고 창간 <한겨레신문> 제자(題字)를 쓴 분이 바로 무위당 장일순 선생이다.

그 외에도 녹색평론 김종철, 전 국회의원 이부영과 손학규, 아침이슬 김민기, 미술사학자 유홍준 등과 교분이 두터웠다. 생명사상에 있어 훌륭한 선생이지만 일생에 책 한 번 내지 않고 성자 같은 온화한 삶을 영위했던 무위당(无爲堂) 장일순(1928~1994) 선생의 이야기 모음집 <나락 한 알 속의 우주>가 녹색평론 출판사에서 나왔다(지난 97년 5월 31일 첫 인쇄를, 지난 2009년 개정판에 이어 개정증보판이 지난 2016년 12월 30일 나왔다).

표지 표지이다.
표지표지이다. ⓒ 녹색평론사
장일순 선생이 누구이기에, 지금까지 존경 받은 이유가 궁금했다. 그래서 최근 서적에 들러 책을 사 관심 있게 읽어 봤다. 장일순 선생이 한 강연이나 텔레비전에 출연해 발언한 내용을 그를 잘 아는 지인들이 책 속에 담았다. 그래서 '장일순의 이야기 모음집'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문득 세계 4대 성인으로 꼽히는 공자, 석가, 소크라테스, 예수 등이 떠올랐다. 생전에 글 한 줄 남긴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들 성인들도 제자들이나 그를 아는 지인들에 의해 기록으로 남았다.

장일순 선생은 경성공업전문학교(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전신)을 다니다가 제적됐고, 그 후 서울대학교 미학과(제1회)에 입학해 수학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평양에 설립한 대성학원의 맥을 계승해 원주에서 대상학원을 설립해 학교 이사장을 지내기도 했고, 신용협동조합 운동, 한살림 운동 등에 정열을 쏟았던 분이기도 하다.

특히 천지현황서부터 논어와 맹자, 노자와 장자, 석가모니 부처와 예수까지 수작을 다 섭렵한 그였다. 그런데 생전에 글을 남기지 않았다. 왜일까. 살아생전 그와 절친하게 지낸 이현주 목사와의 대화 내용에서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이현주 목사는 "세상에 글 못 쓰는 사람이 이 문명 천지에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이렇게 답한다.

"나는 글을 못 써, 한창 세월이 수상할 적에 필적을 남기면 괜히 여러 사람 다치겠더구먼, 그래서 편지는 말할 것도 없고 일기도 쓰지 않게 됐지, 그 버릇이 여직 남아서..."

이 목사에 의하면 성경에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영은 사람을 살린다"는 말이 있다고 한다. 침묵이 백이면 그것이 말로 표현될 때 벌써 오십으로 떨어져 나가고, 그것을 다시 글로 나타내면 십이나 남았을 것이라는 지혜 때문에 글을 남기지 않았을 것이라는 게 그의 짐작이다.

하지만 그는 서예(붓글씨)에 남다른 관심이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작품이 늘 못마땅하고 장난처럼 여겨 버리는 것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누군가 해달라고 부탁을 하면 '안 해드리면 좀 교만한 것 같아 흉치 않는 정도'가 되면 주기도 했다.

고 김영희 선생 등 지인들의 회갑논문집에 실린 그의 서화가 그런 경우이다. 사실 그의 작품은 영서지방 정통의 묵맥을 이었고, 그의 청정한 삶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글씨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살림은 그 자체가 생명을 얘기하는 것이다. 나눌 수 없는 것이 생명이다. 하늘이 없이는 살 수 없고, 땅이 없이는 살 수가 없다. 이런 관계로 봤을 때 지상에 있는 돌, 풀, 벌레 등 모든 관계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인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일체의 존재는 분리될 수가 없다. 우주 일체의 중생, 풀, 벌레, 돌 등이 나와의 관계가 동격이고 동가이다. 이것이 화합의 논리이고 협동하는 삶이다." - 본문 중에서

장일순 선생은 60~70년대 반체제운동을 했고 80년 말부터 90년대까지 생명운동을 전개했다. 1992년 6월 11일 MBC TV <현장 인터뷰, 이사람>에 출연한 그를 대담한 황필호 전 동국대 철학과 교수는 원주의 토담집을 찾아 대화를 이어갔다. 원래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그의 첫 텔레비전 출연이었다.

"선생님은 1960년대, 1970년대 반독재체제 투쟁에 앞장서 그야말로 옥고도 치르시고 그 후에도 지학순 주교님을 위시해 여러 사람과 같이 원주 지방에서 재야운동가로 활동하고 계시고, 또 최근에는 '땅이 살아야 사람이 산다'는 기치 아래 무공해 식품을 생산·판매하고 권장하는 한살림 운동을 전개하시고, 또 듣기로는 서예에도 일가견이 있으시다고 그렇게 들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 대중매체에 얼굴이 나오는 것을 싫어해 겨우 모시게 되었습니다. 허락해 주셔 아주 고맙습니다." - 본문 중에서

출연 당시 그는 몇 달 전 위암으로 수술을 받았고 시대의 병, 암에 대해서도 말을 이었다.

"자연도, 지구도 암을 앓고 있고, 자연 전체가 암을 앓고 있는데 사람도 자연의 하나인데 왜 암에 안 걸리겠어요. 그러니까 큰 것을 나한테 가르쳐주느라고, 결국은 '지금 너 좀 앓아 봐라' 하고 그러시는 것 같아요." - 본문 중에서

장일순 선생은 동학의 생명사상에서 사회적·윤리적·생태적 기초를 발견했다. 동학은 물질과 사람이 다 같이 우주의 생명인 한울을 그 안에 모시고 있는 거룩한 생명임을 깨닫고 있기 때문이었다. 자연과 인간을 자기 안에 통일하면서 모든 생명과 공진화해 가는 한울을 이 세상에 재현시켜야할 책임이 바로 시천(侍天)과 양천(養天)의 주체인 인간에 있다는 점이었다.

동학의 교주 수운 최재우, 해월 최시형과 예수, 노자 등의 말을 인용해 생명사상의 참뜻을 되새기기도 했다.

"식물도 애정을 가지고 귀하게 어겼을 때는 즐거워한다고 하거든, 그런 걸 알면 선악 얘기는 할 필요 없지. 저놈 나쁜 놈이야 하면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고. 그러나 아 자네 얼마나 고달픈가 하고 받아들이면 스스로 화냈던 거, 욕심냈던 거, 다 풀리거든, 그래서 둘이 다 좋아진단 말이지, 차원이 달라지잖아요." - 본문 중에서

장 선생은 책 제목에도 나타나듯 '나락 한 알에 우주가 함께 한다'와 동학의 이천식천(以天食天)이라는 사자성어를 강조했다.

동학의 2대 교주 해월 최시형 선생이 밝힌 "천지만물이 모두 한울을 모시고 있다, 그러므로 이천식천은 우주의 상리(常理)"라고 그는 자주 인용했다. 사람들이 흔히 먹고 있는 음식도 한울의 일부라는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사람이 한울의 일부인 음식을 먹는 것은 바로 '한울로써 한울을 먹는 것'라는 의미이다. 장

선생이 강조한 생명 일체의 본질을 해월 선생의 말에서 의미를 두고 있다고나 할까. 나도 모르게 음식을 앞에 놓고 입맛이 없네 있네 하는 말을 가끔 할 때가 있었다. 식사를 할 때 거룩하고 영광된 기도를 해야겠다는 스스로의 성찰을 이 책을 읽고 나서 했다.

장 선생은 30대 때 푸른 한강을 보면 마음이 편해진다고 해 청강(靑江)이란 자호를 섰다. 이후 박정희 대통령이 죽은 후 무위당(无爲堂)으로 바꾸었다. 1987년부터는 일속자(一粟子)란 호를 썼다. 좁쌀 한 알이라는 뜻이다. 이를 선택한 것은 좁쌀 한 알이 우리라는 그의 생각에서 비롯됐다. 하지만 본질은 '건방 떨고 싶을 때' 화두처럼 떠올리면 가라앉기 때문이었다.


나락 한알 속의 우주

장일순 지음, 녹색평론사(2016)


#나락 한 알 속의 우주#장일순 선생#이천 식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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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미디어에 관심이 많다. 현재 한국인터넷기자협회 상임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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