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베니스비엔날레'와 '뮌스터조각프로젝트'와 '카셀 도큐멘타'가 겹치는 해이다. 이런 기회는 10년에 한 번만 오는 것이라 기자는 지난봄과 여름 사이 40일간 유럽미술투어를 했다. 그곳에서 본 현대미술의 현황을 1편 '카셀 도큐멘타'에 이어 2편 '뮌스터조각프로젝트'을 소개한다 – 기자 말
'뮌스터조각프로젝트(Skulptur Projekte Münster)'는 1977년에 시작해 10년마다 열린다. 올해로 5회째다. 9개국 작가 35명이 참가했다. 오늘 10월 1일에 끝난다. 공공미술이라 대부분 야외에서 전시된다. 당연히 입장료는 없다. 12유로만 내면 하루 종일 투어를 할 수 있다. 시에서 구입한 '퍼블릭 컬렉션(public collection)' 38점도 볼 수 있다.
이번 슬로건은 "매혹적으로 늙은, 짜릿하게 젊은"이다. 온고지신의 정신이 담겨있다. 이와 함께 3가지 이슈 즉 '몸을 넘어(Out of Body)', '시간을 넘어(Out of Time)' '장소를 넘어(Out of Place)'라는 제목으로 간행물도 냈다. 10년 전엔 없었던 스마트폰, 이제 다 바뀐 디지털시대에는 위 이슈의 개념도 변했다. 그걸 현대미술에 어떻게 적용할까를 묻는다.
2004년 '터너상(Turner Prize)'을 받고 2013년 베니스비엔날레에도 참가한 영국작가 '제레미 델러(J. Deller)'는 이번에도 초대받았다. 그는 이 행사에 참가하면서 언론에 "뮌스터는 미술의 상업주의·엘리트주의에 대한 해독제가 될 것이다"라는 멋진 덕담을 남겼다.
이 프로젝트의 창립멤버는 두 사람이다. 전 뮌스터미술관 관장인 '클라우스 부스만(K. Bußman)'과 전 쾰른 카스퍼 루드비히미술관 관장인 '쾨니히(K. König)'이다. 쾨니히는 첫 회부터 40년 간 예술 감독을 맡았다. 올해에는 여기에 실력파 큐레이터 '브리타 페터스(B. Peters)'와 '마리안네 바그너(M. Wagner)'가 함께 해 양 날개를 달았다.
'뮌스터조각프로젝트' 유래
그러면 우여곡절 많았던 이 프로젝트가 어떻게 시작됐는지 한번 알아보자. 여기서 7권의 미술책을 낸 독일미술 전문가 이은화 저자의 <그랜드아트투어>를 참고했음을 밝힌다.
'뮌스터조각프로젝트' 유래는 격변기 1960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의 현대조각가 헨리 무어(H. Moore)는 뮌스터 시에 그의 작품을 기증하려 했다. 지금 시점에서 보면 이해하기 힘들지만 당시 로댕작품만을 조각이라고 생각했던 뮌스터시민에게 그의 작품이 달갑게 보이지 않았다. 뚜렷한 특징이 없는 괴상한 형체의 조각으로 보였을 뿐이다.
이때부터 뮌스터에서는 시민사회와 예술계 사이에서 이를 두고 의견이 분분했고 논쟁이 일어났다. 그런 와중에 뮌스터 시는 도시환경을 새롭게 꾸미기 위해 1974년 당시 뮌스터시립미술관 큐레이터인 부스만에게 의뢰해 현대조각 구입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부스만은 헨리 무어의 작품보다 더 모던한 미국작가 '조지 리키(G. Rickey)'의 움직이는 조각을 추천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뮌스터시민은 시 당국에 항의편지를 보내는 등 극심하게 반대했다. 게다가 운송비까지 포함해 13만 마르크가 든다는 보도가 나오자 너무 비싸다며 아우성을 쳤다. 시 당국은 결국 이를 포기하고 만다.
공공미술, '문화민주화'에 기여
이렇게 사회적 맥락을 중시하는 공공미술은 그 과정이 까다로워 성공하기도 힘들다. 그럼에도 뮌스터 시는 어떻게 이 난관을 뚫고 이 프로젝트를 성공시켰는지 알아보자.
부스만은 이런 홍역을 치른 후 현대미술에 대한 시민들의 몰이해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부스만은 3개월 동안 방송에 출연해 그들을 설득했다. 그는 그렇게 간신히 시민여론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돌려놓았다. 그 결과 시민단체와 예술계와 뮌스터 시가 합의로 1977년에 '20세기 조각역사'전이 열렸다. 이것이 오늘날 뮌스터조각프로젝트의 시발점이 된다.
이렇게 1977년 이 프로젝트의 첫 발을 내디뎠다. '칼 안드레, 요셉 보이스, 리처드 롱, 도널드 저드, 클래스 올덴버그, 브루스 나우만, 리처드 세라' 등 당대 쟁쟁한 작가들이 다 초대됐다. 이렇게 해서 뮌스터 시민들은 현대미술의 사조를 대변하는 작품을 골고루 감상하게 되었다. 이러면서 미술을 보는 이들의 눈이 높아졌다.
부스만은 한 인터뷰에서 "전시가 싫으면 안 가면 되지만 길거리조각을 안 볼 수도 없잖은가"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공공미술의 특징을 잘 요약한 말이다. 또 부스만은 "공공미술은 무엇보다 미술에서의 민주주의 실현이다"라고 말했다. 그것은 아마도 시민들이 이런 미술과의 접촉을 통해 삶의 질을 높일 수 있고 더 행복하게 사는 법을 터득했기 때문이리라.
사실 공공미술은 프랑스대혁명 후 루브르궁이 미술관으로 개조되고 '궁정사회'에서 '시민사회'로 패러다임이 바뀌면서 시작되었다. 이런 사회적 변혁으로 사람들은 정치적 소통이상으로 예술을 향유하는 문화적 소통의 중요함도 깨달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그건 그렇고 공공미술이 우리가 아는 일반적으로 아는 조각과는 어떤 점이 다른지를 보여주는 작품을 소개한다. 두 작가가 만든 이 설치미술은 이번 미술투어의 출발점이 되는 LWL뮌스터미술관 입구에 있다. 그런데 그게 이사용 대형트레일러 위에 놓여있다. 게다가 아이러니하게도 40년 전 뮌스터시민들이 그렇게 싫어했던 헨리 무어의 조각이었다.
도대체 이 작품이 왜 여기에 있을까? 이에 대한 작가의 입장은 분명하다. 그건 바로 조각은 반듯이 좌대에만 놓일 수 있는 게 아니고 트레일러 위에도 놓일 수도 있다는 점을 일러준다. 제목도 '이사'다. 우리가 사는 21세기 디지털 유목시대를 반영한 것이다. 지금까지의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 다르게 보기를 요청한다. 일종의 고정관념 깨기다.
그러면 '뮌스터'는 어떤 도시인가?
뮌스터는 인구가 30만 작은 도시다. 뮌스터 대학생 등 학생인구 20%를 차지한다. 28년 전 나는 동생이 여기 뮌스터대학에서 유학했기에 와 본 적이 있다. 당시 나는 고풍스런 대학건물과 호젓한 숲과 공원 등 매료돼 이 도시에 푹 빠졌다. 대학교수가 자전거를 타고 가는 모습이 신기했다. 이 도시전체가 내게는 멋진 야외미술관처럼 보였다.
오랜만에 뮌스터를 다시 보니 감격스러웠다. 여전히 자전거 천국이다. 17만 자동차 보유대수보다 30만대 자전거 보유대수가 더 많다. 35%가 자전거로 교통문제를 해결한다. 이 도시는 2004년 유럽환경도시로 뽑힐 정도로 산책로와 녹지공간이 많다.
그러나 이 도시도 2차 대전 당시에 아픈 역사가 있다. 도시전체의 60%이상 그리고 올드 타운중심가는 90%이상이 파괴되었다. 아주 오래된 도시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만 실제로는 옛 설계도를 보고 다시 복구시킨 것이다. 독일의 옛 건물 복원실력은 대단하다.
그리고 '뮌스터'란 사원이라는 뜻이다. 여기는 가톨릭전통이 강한 종교의 도시다. 그리고 여기 옛 시청은 1648년 30년 유럽의 종교전쟁을 끝내면서 당사자들은 '베스트팔렌 평화협정'을 맺은 곳이다. 이곳이 화해와 평화의 이미지가 강하게 흐르는 이유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16세기 당시 개혁파인 '재세례파'는 이곳에 신정정치를 이루고자 가톨릭교회에 반기를 들었다. 그래서 신구종교 갈등이 첨예화되었다. 이 전쟁이 얼마나 처참했는지 람베르트성당에 대롱대롱 매달린 작은 직사각형 쇠창살(슬라이드사진)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런 창살에 반가톨릭 재세례파 신도를 가두고 굶어죽게 했던 것이다.
바로 이 구 시청 자리에서 펼쳐진 작품이 있어 소개한다. 이를 연출한 작가는 이번 프로젝트에 초대받은 작가 중 가장 어린 '알렉산드라 피리치'다. 인류의 평화를 강렬히 염원하는 퍼포먼스다. 제목이 '새는 영토'다. 그렇다면 국경이 없는 사회에 대한 꿈이 아닌가.
6명 퍼포먼스단원은 여기에 방문하는 이들에게 관심이 뭐냐며 말을 건다. 그리고 마음의 국경이 없어질 때까지 상대방의 나이, 국경, 인종, 종교를 개의치 않고 피라미드 쌓기 등 몸으로 친해지길 시도한다. 그래서 너와 나의 구분을 없애고, 타인과 교감할 수 있도록 한다. 그래서 모슨 사람이 선입견 없이 평등하게 하나가 될 수 있음을 경험하게 한다.
뮌스터의 명성은 어디서 오는가?그러면 이번에는 뭔스터 프로젝트가 명성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아보자. 우선 그 '일관성'에 있다. '쾨니히'는 40년간 예술 감독을 해왔다. 그의 장수비결은 전혀 권위적이지 않고 명석한 개념과 열린 사고로 이곳 시민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런 절대적 신뢰가 바탕이 되어 그는 이 행사를 일관성 있게 흔들림 없이 꾸준히 추진할 수 있었다.
또한 이 행사가 그 이름을 높일 수 있었던 건 시대정신에 민감했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디지털시대에 맞춰 '몸과 시간과 공간'의 근원을 연구하고 탐색했다. 여기에 '백남준'의 융합미학, '맥루한'의 미디어확장이론, '보이스'의 사회적 조각개념도 적극 도입한다. 그러다보 니 공공미술에 대한 보다 넓은 안목과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된 것이다.
유럽 미술기행 40일을 해보니 유럽인이 꿈꾸는 도시의 모델이 뮌스터인 것 같다. 이제 뮌스터는 작은 도시지만 과거의 명성이 높았던 파리나 런던 못지 않은 높은 문화수준을 누리고 있었다. 다시 요약해 말하면 지금 유럽의 도시는 과거처럼 관광명소로써 위상에 치중하는 게 아니라 품격 있는 문화도시를 지향한다는 점이다.
쾨니히와 함께 뮌스터 성공의 일등공신은 부스만이다. 그가 서울대를 방문했을 때 언론과 인터뷰에서 이 도시의 성공비결은 "시민들의 자신감에서 왔다"고 말했다. 그들이 문화경험이 주는 자부심을 체험하지 않았다면 그 같은 열성적 참여와 후원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10년마다 열리는가?왜 뮌스터 프로젝트는 왜 10년 만에 열리는 것인가? 이런 질문에 대해 언론에 밝힌 실무진의 답은 확고하다. 새로운 걸 시도하려면 적어도 10년이 필요하단다. 그런 원칙이 바로 뮌스터의 정체성이자 자존감이란다. 철저하게 준비하는 방식은 역시 독일식이다.
앞에서 언급한 '제레미 델러' 작가의 이번 작품도 완성시키는 데 10년 걸렸다. 그는 2007년부터 50개가 넘는 주말농장클럽에 협조를 구해 10년간 기후일지를 요청했고 또 10년간 이 지역에서 중요한 클럽활동이나 정치행사의 연보를 부탁했다. 10년 간 작품임을 확인시키기 위해 그는 비둘기나무도 심었고 10년 만에 꽃도 키웠다.
뮌스터 '프로젝트'는 이렇게 느림보방식이다. 작가는 작품을 그냥 자국에서 만들어 제출하는 게 아니라 프로젝트가 시작하기 2년 전부터 이 도시에 머물면서 이곳 주민과 아티스트 토크를 통해 시민들 목소리도 경청하고 때로는 그들의 따끔한 질책도 받아야 했었다. 이런 긴 논의 끝에 작품을 설치할 위치를 정하고 제안서를 내게 된다.
이 점에 대해 쾨니히는 한국미술인과 인터뷰에서 우리가 시작할 때만 해도 정기적으로 전시할 계획은 없었고, 그런데 어느덧 전통이 돼 버렸단다. 그는 조각을 길에서 자라는 생명체로 봤다. 그러니 그게 충분히 자라려면 그만한 기간이 필요한 모양이다.
간소한 기자간담회 풍경
여기서 뮌스터조각프로젝트 기자간담회 참관기를 간단히 소개한다. 처음에 고지된 간담회 장소가 근처인 뮌스터시립극장으로 변경되어 잠시 당황했다. 내가 보건데 참가한 외국기자가 800정도 된다고 생각했는데 나중 공식통계를 보니 1000명이란다. 그날 비가 좀 왔지만 집행부 임원들 표정은 충분한 준비를 마친 후라 그런지 밝아보였다.
간담회의 첫 인상은 한마디로 간소했다. 나는 로고가 새겨진 검은 백과 영어번역기도 받았다. 가방 안에 보도 자료와 474쪽 짜리 전시도록도 있었다. 종이 질도 나빠 색이 누렇다. 하지만 가벼워서 좋다. 예산도 절약하고 환경도 생각한 것 같다. 도록 광고지면이 5페이지밖에 안 된다는 걸 보니 상업주의에 빠지지 않으려 노력한 것 같다.
기자간담회 순서도 인사말과 행사설명 후 질의응답 순이라 우리와 비슷했다. 분위기도 우애로 넘쳤다. 나는 "백남준이 말하길 앞으로 예술가 역할은 사람들이 잘 놀 수 있게 하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데 있다고 했는데 이에 비춰볼 때 이번 프로젝트에서 그런 개념이 반영된 작품으로 뭐가 있는지 알려 달라"라는 질문을 준비했지만 여의치 않아 못했다.
이 행사가 끝나고 1시 반쯤 런치가 나왔다. 메뉴가 궁금했는데 보니 간소한 서양수프 두 가지가 나왔다. '야채비프수프'와 '크림수프'다. 수프 세 그릇을 먹고 나니 내 몸이 확 풀렸다. 난 영·독 가이드 중 영어를 택해 행사요원과 함께 시내투어에 들어갔다.
백남준, 뮌스터행사 대반전
이 미술행사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 시작할 때부터 냉랭했다. 1977년 1회 행사는 어설펐고 1987년 2회는 밋밋했다. 그러나 1997년 3회 때 백남준의 '20세기를 위한 32대의 자동차: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조용히 연주하라'가 출품되자, 뮌스터시민들은 열광했고 분위기는 급반전되었다. 그해 관람객이 처음으로 50만 명을 넘어 대성공을 거두었다.
'듣는 음악'에서 '보는 음악'으로 현대미술뿐만 아니라 현대음악의 패러다임 바꾼 사람이 바로 백남준이다. 18세기 '듣는 음악'에서 모차르트가 최고봉이라면 자신은 20세기 '보는 음악'에서 최고봉이라는 자부심을 과시한 셈이다. 쾨니히도 당시 이 작품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그의 글에서 술회했다. 역대 뮌스터 출품작 중 최고였다.
백남준은 제안서에서 "20세기 특징은 조직폭력, 미디어, 자동차숭배이다. 이 세 가지의 공통점은 소비주의, 이 중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항목은 폭력이다"라고 해설하면서 미래사회는 소비보다 창조가 더 중요하다는 운을 띄웠다. 백남준은 결론으로 이렇게 산업화의 상징인 자동차시대는 가고, 정보화의 상징인 TV컴퓨터시대가 왔음을 알렸다.
뮌스터조각프로젝트 출품작 소개지금부터는 이번 뮌스터조각프로젝트에 출품된 작품 중 일부를 소개하고자 한다. 지면상 다 소개 못한다. 그밖에 다른 작품은 아래 슬라이드사진을 참고하면 된다.
위 베를린 거주 이란작가 '나이리 바그라미안'의 작품은 2차 대전 때 파손됐다 복원한 뮌스터미술관(별관) 앞에 세워졌다. 이 다이내믹한 조각은 구상보다는 추상에 가깝다. 작품명이 '특정한 관점'이다. 위 작품이 특별한 장소에 설치되길 바랬나보다. 사실 이곳은 30년 전 세계적 조각가 '리처드 세라'가 작품이 세운 역사적인 곳이기도 하다.
그녀는 뭣보다 현대조각의 범위를 확장시키려 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조각에는 서사구조가 있다고 말한다. 그래선 가 이 작품에 작가의 내면을 은유적으로 그려놓은 것 같다. 대포모양을 한 조형물은 공격적인 페미니즘도 엿보인다. 또한 관능적이고 초현실적이다.
그녀는 현대미술의 화두인 몸과 물질과 건축의 유기적 관계성을 중시한다. 거기에 조각이 움직이는 것 같은 무빙효과를 낸다. 조각이 서로 만나는 지점에서 흐르는 선은 놀랍도록 우아하고 유연하고 아름답다. 재료가 놋쇠와 청동임에도 그 경쾌함이 돋보인다.
시간 부족으로 못 가본 두 곳도 참고한 보도 자료를 통해 소개한다.
먼저 아래 프랑스출신 미국작가 '니콜 아이젠만'의 작품을 보면 이 조각은 공공장소에서 통상적으로 보는 조각과는 다르다. 영웅화된 형상이 아닌 좀비의 모습이다. 작가는 조각에 대한 일반인의 통념을 깨고 싶었나보다. 그런 점이 이 작품을 더 매력적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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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터키 작가 '아이세 에크만'의 작품 '물 위에서'도 흥미롭다. 자연과 접촉하는 작품이라 누구나 좋아한다. 20분 거리의 두 항구를 연결해 5분 안에 도착할 수 있게 했다. 뮌스터 북쪽 부자동네와 남쪽 공장지대를 연결시킨 것을 보면서 나는 서울의 강남과 강북을 연상했다. 어떤 사회적 갈등도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는 영감을 받는다.
이 작품은 '물 위'가 아니라 '물 속'으로 다리로 만든 점이 흥미롭다. 그래서 착시지만 사람들이 물위를 걷는 것 같다. 마치 도시 한복판에서 홍해를 건너는 것 같고, 예수가 물 위를 걷는 것 같다. 하여간 도시라는 미술관에서 이런 상상력의 또 다른 그림을 그릴 수 있다니 놀랍다. 시적이다. 우리는 여기서 공공미술의 역할이 뭔지 다시 묻게 된다.
끝으로 한마디 덧붙인다. '바스키아' 낙서화도 '이브생로랑'의 비트패션도 '김수자'의 보따리도 예술이 되는 시대, 또한 '요셉 보이스' 말대로 모든 이가 예술가가 되는 시대, 이제 예술은 일상과 거리와 하찮은 물건(오브제)에서 나온다. 이런 문화 민주주의시대에 공공미술로 세상과 소통하려는 뮌스터조각프로젝트가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것 당연해 보인다.
덧붙이는 글 | 뮌스터조각프로젝트 홈페이지 https://www.skulptur-projekte.de
주소와 전화: LWL Domplatz 10 D-48143 Munster +49-251-5907-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