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IMF를 극복하는 과정으로 출범한 노사정위원회에서 사측과 정부는 노동계에 정리해고 및 비정규직 채용요건 완화 등 고용 안정성의 포기를 강요하였다. 그 반대 급부로 노동계에 제시한 것은 법정 노동시간의 단축이었다. 기존의 법정 기본 노동시간을 주 44시간에서 주 40시간으로 단축하겠다는 것인데 연평균 2880시간을 근무하던 한국 사회 노동 현실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논의였다.
1998년 OECD 연평균 노동시간은 이미 1900시간으로 (주 40시간 * 50주) 2000시간보다도 적었다. 다시 말해 이미 기존의 OECD 국가들에서는 모든 노동자가 주5일제 근무를 하고 있었고, 한국만 OECD 국가 중 최장시간 노동을 하고 있었다. 이러니 노동시간 단축의 중요성이야 두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주 5일근무제에 대한 합의는 잘 이행되었을까? 각종 노동시간 통계 자료¹⁾에 따르면 한국은 2004년까지도 연간 노동시간에 큰 변화가 없었다. 노동시간 단축 논의는 1998년 시작되었는데, 차일피일 제대로 된 법제화를 미루기만 했을 뿐 진행된 것은 없었다. 노동계가 매년 대규모의 총파업 투쟁을 벌이고 지속해서 요구하자 2004년이 돼서야 주 40시간 법제화가 이루어졌다.
그러는 사이 1998년부터 2004년까지 200만이 넘는 비정규직이 급격하게 양산되었고, 이후 2015년까지도 이러한 비정규직의 규모는 전혀 개선되지 않고 있다. 즉 개선해주겠다던 노동시간 단축은 2004년까지 미뤄두기만 하면서,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양산은 본격적으로 진행한 것이다.
그럼 2004년 주 40시간이 법제화된 이후라도 노동시간 단축은 잘 이루어졌을까? 노동시간은 2011년까지 꾸준히 감소하는 추세를 보이긴 했지만, 속도는 더디기만 하였다. 왜냐하면, 2004년부터 시행된 근로기준법 개정이 무려 7년에 걸친 단계별 시행을 부칙 상에 정해 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2011년 이후 다시 노동시간이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고, 최근 통계에 따르면 2015년 연간 평균 노동시간은 2113시간에 달한다. 이는 2015년 OECD 평균인 1766시간을 훨씬 웃도는 수준으로 법정 노동시간이 주 40시간인 국가의 연간 평균 노동 시간으로 보기엔 매우 비정상적인 수치이다. 심지어 2011년까지 주 40시간 근로가 완료된 상태인데도 말이다.
<표1, 2²>는 2015년 OECD 회원국 연간 노동시간과 근로기준법상의 법정 노동시간을 비교해 놓은 것이다. 사실 각국의 근로기준법상 법정 노동시간은 프랑스의 35시간을 빼면 한국의 주 40시간과 큰 차이가 없다.
오히려 영국은 주 48시간이 법정 기준이며 연장근로는 1주 60시간까지 가능한 것으로 되어 있고, 일본은 연장근무 15시간을 포함하면 주 55시간까지 근무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런데도 영국과 일본은 각각 연간 노동시간이 1674시간, 1719시간으로 한국의 2113시간에 비하면 연간 400시간(근무일 50일, 2개월 이상) 정도 적게 일하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나타나게 된 것일까2004년 주 40시간이 법제화되고 2011년까지 실제 적용이 완료되도록 했지만, 노동부는 2004년 바로 주 40시간 법정 근로시간에 12시간 연장 근로 외에 토, 일 휴일근로로 16시간이 추가될 수 있다는 어처구니없는 행정해석을 내리게 된다. 결국, 주5일 근무를 위해 고용 불안정을 감수하면서 쟁취한 노동시간 단축이 어처구니없는 행정해석 하나로 다시 주 68시간에 달하는 장시간 노동으로 돌아간 것이다.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다. 한국의 근로기준법에는 법정 근로시간 기준을 아예 무시할 정도의 예외 업종들이 수도 없이 많다. 독일, 영국, 일본 등은 법정 근로시간을 넘겨 근무할 수 있는 업종에 대한 규정과 제약사항이 매우 자세하게 되어 있다.
즉, 이러한 예외 업종은 매우 특수한 상황이 아닌 이상 예외로 인정되지 않고 대부분 노동자는 법정 근로시간을 지켜야 한다는 의미이다. 심지어 업무 강도가 낮다는 이유로 한국에서는 24시간 맞교대(주 84시간 근무)가 자행되는 경비직도 독일 등에서는 법정 근로시간을 준수하게 되어 있다.
그에 비하면 한국의 법정 근로시간 예외 업종은 너무 광범위하다. 먼저 최근에 가장 논쟁이 되는 근로기준법 59조의 특례사업을 보자. 법에 정해진 특례업종이 1. 운수업, 물품판매 및 보관업, 금융보험업, 2. 영화제작 및 흥행업, 통신업, 교육연구 및 조사사업, 광고업, 3. 의료 및 위생사업, 접객업, 소각 및 청소업, 이용업, 4. 그밖에 공중의 편의 또는 업무의 특성상 필요한 경우로서 대통령령이 정하는 사업(현재 사회복지사업)이다.
이러한 업무는 1일 24시간 내내 근무도 가능하고 무제한 연장근무가 가능하다. 법정 근로시간 주 40시간은 딴 세상 이야기이다. 쉬지 않고 일만 하도록 강제할 수 있는 상황치고는 너무 광범위한 것 아닌가? 이러한 특례업종의 선정 이유는 다수의 국민이 자주 이용하는 사업에서 공중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저렇게 광범위한 업종에 종사하는 수많은 노동자는 다수의 국민이 아닌가? 그들의 편의와 건강은 안중에 없는가? 또한, 공중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상시적인 일손이 필요한 업종이라고 꼭 근무시간을 늘려야 하는가? 인력을 충원하면 되는 것 아닌가?
문제가 되는 업종은 이뿐만이 아니다. 근로기준법 58조의 주간근로시간제에 해당하는 업종(대표적으로 택시 기사), 근로기준법상 근로시간 제한도 휴일, 휴게에 관한 규정도 적용하지 않는 63조의 적용제외 업종(농림, 축산, 어업 등의 일차 산업, 감시 또는 단속적 업무 - 대표적으로 경비 및 시설관리) 등 매우 많은 업종이 주 40시간의 법정 근로시간 기준이 있음에도 전혀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최근에는 근로기준법에 명시되지도 않은 형태의 포괄임금제를 통해 계약 당사자 간의 합의라는 핑계로 법정 근로시간을 넘겨 근무하게 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이미 쟁취한 줄 알았던 노동시간 단축, 주5일근무제는 여전히 멀고 먼 이야기이다. 98년부터 이어져 온 꼼수가 여전히 지속하고 있고 효과를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의 국회와 고용노동부는 실질적으로 주 68시간이 되어 버리는 행정해석의 문제, 너무 광범위한 특례업종의 문제 등을 해결하고자 논의 중이라고 한다.
하지만 결정된 후에도 주 68시간 문제는 총 5년의 유예기간을, 특례업종은 전면폐지가 아닌 일부 폐지를 하겠다고 하니 이미 당연히 주어졌어야 할 권리임에도 또 다시 노동자의 희생만 요구하는 꼴이다.
이러한 논의 중 가장 어처구니없는 내용은 당장 시행하면 막대한 재정 부담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하면 시행이 미뤄지는 동안 노동자의 희생을 통해 막대한 이득을 취해 왔다는 것이고, 노동자는 이미 너무 많은 고통을 당해 왔다는 것이다. 이제라도 지금 당장 시행해도 이미 늦었다는 점, 고통받는 노동자가 너무나도 많다는 점이 가장 먼저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1) the 300, "통계는 평균 주 41시간 근무…" 진짜 직장인의 삶은?
http://m.the300.mt.co.kr/view.html?no=20141007133276651402) 표 2 박지순, 근로시간과 휴일에 관한 각국의 법규정
http://enx.enx.co.kr/office/enx/IDArchive/Policy/2012/노사정3차실근로시간단축위-발제-각국근로시간과휴일(박지순)120405.pdf 덧붙이는 글 | 권종호 시민기자는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회원입니다. 또한 이 글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에서 발행하는 잡지 <일터>에도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