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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나치정권 통치 아래 의사들이 전쟁범죄와 반인도적 범죄에 연루되었음이 전 세계에 드러났습니다. 1946년과 1947년 23명의 나치 의사들이 기소되어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 회부되었습니다. 대량학살과 가학적 생체실험에 적극 가담한 이유로 대부분 유죄판결을 받았으며 그 중 의사 7명은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18쪽)

<의료, 인권을 만나다>에서 이화영 교수가 밝힌 내용입니다. 이런 판결은 독일이란 나라가 인권에 얼마나 예민한가를 보여 주는 예입니다. 독재를 도운 의사들이 나치 독일에만 있겠습니까. 같은 시기 일본에도 있었습니다. 일본 역시 생체실험을 했고요. 마루타 생체실험의 731부대는 이미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까.

2004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했을 때, 미군이 수용소의 이라크 군인들을 학대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이때 미군 소속 정신과 의사들과 심리학자들이 "가학적인 심문방법을 고안해 실행했다"고 책은 말합니다. 이는 "위해를 가하지 말라"는 히포크라테스의 선언을 정면으로 위반한 것입니다.

우리나라 독재정권 시대에는 어땠을까요. 무수한 고문이 이뤄졌습니다. 쥐도 새도 모르는 죽음도 있었고요. 이때 의료진이 함께 하는 경우가 없었을까요. 인권과 의료진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의 곁에 의사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책은 고문을 당한 사람들의 25%가 고문 현장에 의사가 있었다고 증언했음을 밝힙니다.

의료인과 인권, 피할 수 없는 관계

 <의료, 인권을 만나다> (인권의학연구소 엮음 / 건강미디어협동조합 펴냄 / 2017. 8 / 279쪽 / 1만5000 원)
 <의료, 인권을 만나다> (인권의학연구소 엮음 / 건강미디어협동조합 펴냄 / 2017. 8 / 279쪽 / 1만5000 원)
ⓒ 건강미디어협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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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설립된 사단법인 인권의학연구소는 의료계의 인권문제에 관심을 갖고 출발했습니다. 이 책은 그들의 노력의 결과입니다. 환자에게 의사는 '절대 갑'입니다. 그런데 의사나 의료진이 인권을 무시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책은 의료인에게 인권을 가르치는 게 필요하다는 전제로 의료인들을 교육할 목적으로 쓰였습니다.

2016년 시위 중 경찰의 물대포를 맞아 사망한 고 백남기 농민의 외인사·질병사 논란은 바로 의료인이 관계된 인권문제입니다. 외인사냐, 병사냐는 중차대한 문제입니다. 의사의 사망원인 진단이 가져오는 결과는 사회를 뒤흔들고도 남는 것이니까요. 모두가 외인사라는데 한 사람의 의사가 병사라고 하면 그리 되는 걸까요. 책은 의료진의 생각이 인권에 기반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인권침해의 현장에 의사가 함께 할 때가 많습니다. 인권침해가 정신적·육신적 피해와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책은 "오늘날에도 현대판 인권침해의 사례에 의료인들이 지속적으로 가담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고문을 받다 혈압이 높아지면 약을 투입하여 혈압을 떨어뜨리고 이후 계속 고문을 받게 돕습니다. 책은 이런 의사의 행위가 히포크라테스의 선언과 부합되는지 묻습니다.

"전 세계에 걸쳐 고문이 자행되는 곳에서 의사들은 정부당국을 도와 고문 피해자가 고문 중 사망하지 않도록 감독하고, 의무기록을 조작하고, 사망진단서를 허위로 작성하여 고문사실을 은폐하기도 한다." (63쪽)

이는 분명히 범죄행위입니다. 또한 책은 의료의 상품화가 환자와 의료인 사이에 분쟁으로까지 치닫고 있는 현실 속에서, 의료계의 인권 존중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합니다. 어쩔 수 없이 환자 보다는 '갑'의 위치에 있는 의료인은 높은 수준의 윤리와 인권적 접근이 요구됩니다. 유엔도 이를 주목하고 의료계와 정부의 책임을 강조합니다.

"유엔은 건강권에 대한 해석을 제공하면서 건강 확보를 위한 차별, 빈곤과 같은 건강에 해로운 조건들의 해결이 중요하고, 의료 서비스와 건강을 유지할 조건에 대한 권리는 차별 없이 누구나 누려야 할 기본 권리로 규정합니다. 그리고 그 권리를 충족시켜야 할 책임은 국가, 즉 정부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21쪽)

의료계의 사회적 냉대 환자에 대한 인권 재고해야

 드라마 <낭만 닥터 김사부> 한 장면. 에이즈 환자의 수술을 부탁하는 장면이 등장했다. SBS 화면 캡처.
 드라마 <낭만 닥터 김사부> 한 장면. 에이즈 환자의 수술을 부탁하는 장면이 등장했다. SBS 화면 캡처.
ⓒ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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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의사가 사형집행 현장에도 입회하고 수감시설에도 인권이 방치된 수감자들을 목격할 수 있는 위치에 있기에 인권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어 의료진은 사형집행을 앞둔 사형수, 폭력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환자, 비밀이 보장되어야 하는 정신질환자나 에이즈 환자 등 그게 어떤 환자든지 인권이란 면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합니다.

책이 말하는 인권에 근거한 의료윤리의 공통원칙은 의료의 핵심 목적인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고 위해를 방지'하는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배려 깊은 진료를 제공할 의무 ▲사전 동의 ▲비밀 준수를 말합니다. 환자의 인권이란 면에서 아직 우리 의료계는 초보적인 단계에 있습니다. 그렇기에 교육이 필요하다고 책은 강조합니다.

교통사고나 화재 등 재난 사고가 일어났을 때 가장 먼저 현장으로 달려가는 이들이 바로 의료인입니다. 책은 재난을 예방하는 것은 어렵지만 "의료인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를 사전에 이해하여 직무 효능감을 높이는 것은 피해자의 회복시간을 단축"하는데 도움이 된다며 효과적인 교육시스템의 필요성을 말합니다.

책은 정신 장애인의 인권에 대해서도 주목합니다. 정신 장애인은 다른 환자보다 그 특성으로 인해 인권침해의 소지가 높습니다. 정신 장애인 인권을 위한 국제(국내)선언을 의사는 준수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치료 과정에서도 지지, 구조, 참여의 원칙을 버리면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에이즈 감염자에 대해서는 "동성애자에 대한 한국 사회의 편견과 차별 때문에 일부 남성 동성애자 감염인이 자신의 성적 지향과 동성간 성접촉 사실을 숨겼을 개연성"을 탐지하고 '안전하지 않은 성관계'와 '성적 지향'의 무관계성에 주목하도록 말합니다. 즉 성적 지향 때문에 환자의 인권을 무시하는 현실에 의사는 주목해야 한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의료인은 사회적 냉대에 지친 에이즈 감염인이 의존하는 최후의 피난처다. 의료현장에서의 에이즈 감염인 차별이 뼈저린 이유다. 75%가 넘는 에이즈 감염인이 자신의 감염 사실을 의료인에게 밝히는 것을 꺼리고 있다. 25% 내외의 감염인이 에이즈를 이유로 수술 등 진료 순서가 뒤로 밀리거나 차트 등에 별도의 표식이 부착되는 등 차별을 경험하였다고 한다." (161쪽)

이 책은 의료계 전반에 대한 인권 교과서입니다. 앞으로 우리나라도 환자와 인권이란 면에서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합니다. 이 책이 시발점이 되면 좋겠습니다. 더 나아가 독재를 도운 의료진이나 인권을 무시한 의사에 대한 구체적인 처벌 규정들도 만들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의료, 인권을 만나다> (인권의학연구소 엮음 / 건강미디어협동조합 펴냄 / 2017. 8 / 279쪽 / 1만5000 원)
※뒤안길은 뒤쪽으로 나 있는 오롯한 오솔길입니다. 책을 읽으며 떠오르는 생각의 오솔길을 걷고 싶습니다. 함께 걸어 보지 않으시겠어요.



의료, 인권을 만나다 - 보건 의료인을 위한 인권 교육서

이화영 외 지음, 인권의학연구소 엮음, 건강미디어협동조합(2017)


#의료, 인권을 만나다#인권의학연구소#건강미디어협동조합#이화영#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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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행복이라 믿는 하루가 또 찾아왔습니다. 하루하루를 행복으로 엮으며 짓는 삶을 그분과 함께 꿈꿉니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이런 제목 어때요?>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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