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스페인이다. 스페인을 결정한 이유는 단 하나다. 가우디를 찾아가는 것도 아니고 성지순례라는 명목도 아니다. 대학원 시절 무던히도 도저히 그런 제목으로 불려서는 안 된다고 열띤 토론의 장을 이끌던 <해는 또 다시 떠오른다>(The Sun Also Rises)의 헤밍웨이를 느끼고, 그 배경을 찾아 떠나고 싶어서였다.
긴 시간을 비행하게 될 것이다. 어림잡아 가늠해도 무려 18시간 이상이 소요될 것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거기에다 환승까지 해야 한다. 좌석도 이코노미석이다. 또 기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불편함과 부자유를 견뎌야 한다. 그렇다면 이 한정된 공간과 시간을 지배할, 오로지 나만의 시간으로 가져다 줄 것은 무엇인가? 책이다. 책을 선정해야 한다. 후회가 남기지 않게.
이 방 저 방 서재를 서성거렸다. 원서가 꽂힌 방에서 원서 한 권을 찾아내고, 다른 방에서 한국소설 한 권을 찾아 들었다. 원서는 올해 초 김교수님이 "자신을 되돌아볼 좋은 기회로 여기라"며 사 주신 책이고, 다른 한 권은 '엄마'라는 단어의 목이 메어서 샀던 김주영의 <잘 가요 엄마>이다. 두 권을 모두 캐리어가 아닌 백팩에 넣었다.
공항에 도착해 30여 분을 기다리자 티켓 박스가 열렸다. 캐리어를 부치고 좌석을 고르고 티켓을 확인해 받고 홀가분하게 이제 오로지 백팩만 등에 남았다. 출국 수속을 마치고 출국 게이트 앞에 또 다시 30여 분을 기다리고 드디어, 드디어 비행기에 탑승했다.
언제나 bulky seat 자리를 원했다. 이미 그 자리는 타인의 몫이 되었고 할 수 없이 비행기 뒤에 두 자리만이 있는 자리를 선택했다. 화장실에 오고 가는 불편이라도 좀 덜고 싶어서였다. 통로를 걸어 지정된 자리를 찾아 앉았다. 기장의 안내방송이 나오고 예열을 마친 비행기가 서서히 이륙을 한다. 그리고 한참 후 안전벨트를 풀어도 된다는 표시가 화면에 뜬다.
요이 땅! 지금부터 이제부터 북스테이다. 북스테이, 책과 함께 머무는 것이다. 이런 의미로 '북스테이'에는 당연히 시간과 공간이 전제되어야 한다. 대개는 책을 매개로 한 정해진 공간에서 1박2일 머물면서 책을 읽는 것을 말한다.
물론 정해진 공간은 아니나 시간과 공간이란 전제에 따라 북스테이 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는 '기내'라고 생각한다. 지금 나는 인천에서 터키 이스탄불로 가는 중이다. 터키항공을 타고 있다. 승무원에게 물을 요청했고 승무원이 건네준 물 한 잔으로 목을 축였다. 조용히 백팩에서 먼저 손에 잡히는 책을 꺼냈다. 운명인지 김주영의 <잘 가요 엄마>가 손에 들려 나온다.
책 표지를 보는 순간 가슴이 아파온다. 수업을 시작하며 제자들에게 언제나 강조하는 것이 있다. "책의 커버는 이미 책의 내용을 다 알려주는 것이고, 책의 커버를 신중히 보고, 또 책의 제목을 보며 스스로 어디에 방점을 찍고 싶은지를 염두에 두어라", 그 전제된 말을 지금 스스로에게 세뇌한다.
<잘 가요 엄마>는 말하고 있다. 책 표지의 두 마리 백마는 서로 볼을 맞대고 무언의 말을 하고 있다. 볼을 마주 댄 두 마리 백마 뒤로 산이 둘러싸여 있고, 그 산 위를 온통 파란하늘이 덮고 있다.
흰색의 백마 두 마리와 파란하늘은 이미 하늘이 무엇인지, 백마는 무엇의 상징인지, 어떤 것인지, 무슨 의미인지를 보여준다. 그렇게 파란하늘과 어우러진 흰색의 백마 두 마리가 책의 내용을 다 제시해 보이고 있었다. 첫 장을 펼쳤다. 1자가 보인다. 단박에 책은 소제목이 없이 일련번호로 구성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내려오셔야 하겠습니다." 대화체로 시작하는 소설의 첫 문장은 긴박감과 궁금증을 자아냈다. 그 뒤로 이어지는 '새벽 세시에 걸려오는 전화가 예사로울 리는 없었다. 예감이 없지 않았기에 얼른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예감, 엄마가 떠나리라는 예감이, 엄마가 세상을 떠나리라는 것을 아는 알았던 마음이 현실이 된다. 소설은 엄마의 상을 치르며, 엄마의 지난 세월을 회상하는 부분으로 시작해서 마지막에 엄마를 떠나보내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남겨진 사람에 기억 속으로 들어와 다시 소생했다 하늘로 떠나는 엄마! 기억이 불러내는 엄마는 인내와 인고로 점철된 외로운 한 생을 살다가 가셨다. 기억 속에 엄마는 말이 없다. 어쩜 그렇기에 더운 짚은 아픔으로 가슴을 저미는지 모른다. 김주영은 그 짙은 하늘을 보고 말한다.
'엄마의 뼛가루를 한줌 집어 올렸다. 모래를 움켜진 것처럼 담담했다. 팔을 허공으로 높게 뻗어 갈지자로 흩뿌렸다. 어머니는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민들레 꽃씨처럼 산기슭 위로 흩어졌다. 하늘로 엄마의 뼛가루를 뿌리며 "잘 가요 엄마" 안개처럼 씨앗처럼...'책을 덮으며 흐른 눈물을 오래 닦았다. 그리고 맨 뒷장에 몇 줄의 느낌을 적었다.
'작가의 섬세한 묘사는 진정성을 준다. 우리 모두의 어머니도 분명 자신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고 사셨을 것이다. 첫 장을 넘기며 빙의된 나의 엄마의 모습을 기리며 오래 울었다. 울림, 마음의 울림... 엄마가 너무...'
그가 보았던 그의 하늘은 어떤 하늘이었을까 생각했다. 먹먹했다. 세상을 떠나는, 떠난 사람에게 하늘에 가셨다고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하늘은,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떠나는 그때의 하늘은 어떤 넓이나 깊이로도 가늠하기 어렵다. 광활함과 황량함이 너무나 커서.
김주영, 그가 나와 같은 마음으로 하늘을 느꼈는지 의문이 든다. 그럼에도 분명히 보고 알게 된다. 하늘 그리고 엄마를. 스페인으로 가는 기내에서 <잘 가요 엄마>를 보게 된 건 행운이었다. 마음 가득 절절한 그리운 엄마를 만났기에. 하늘은 엄마는 언제나 그렇게 하늘에 계심을 확인했기에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책과 머문 하루 북스테이 체험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