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비상하는 <가재>가 보인다. 다가왔던, 마음에 담았던 모든 것이 멀어져 간다. 저녁 어스름이 거리를 지나고 있다. 바르셀로나 엘프라트 국제공항까지는 그리 멀지 않다. 공항으로 가는 길, 짙은 아쉬움과 허전이 마음을 흔든다. 언제나 그랬다. 짙은 허무가 온몸을 감쌌다. 묘한 고독이 마음을 가득 채웠다.
바르셀로나는 도시 전체가 장소적 배경이 돼 '사람의 위대함'을 거룩하고 웅장하게 표현했다. 그곳에서 AI나 사물인터넷으로는 불가능한 유일한 사람의 영역인 마음, 감정의 거대함을 느꼈다.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인간의 감정, 마음이기에 더욱 압도됐다. 그 거대함이 무엇이건, 그것은 분명 마음에서 나온 것이며, 인위적이지 않은 사람의 감정, 표현임이 틀림없었다. 경이로움이 온 마음을 파고들었다. 그 어마어마한 경이로움을 갖고 공항으로 향했다.
공항에는 각국에서 온 사람들로 붐볐다. 국제공항이라는 이름이 무색하지 않았다. 미리 좌석을 예약한 덕분에 수속은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바로 바르셀로나에서 이스탄불까지 가는 TK1856편에 탑승했다. 스페인 현지시각 오후 6시 55분이다. 이제 4시간 30분이 지나면 이스탄불 공항에 도착한다. 도착시각은 대략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 될 것이다. 좌석에 앉아 창밖을 보았다. 이륙하는 비행기 창문 너머로 땅에서 볼 때는 제멋대로인 것 같은 도로들이 잘 짜인 격자무늬가 되어 드러났다. 이어 비행거리를 알리는 화면이 들어왔다.
매뉴얼에서 영화를 찾았다. 4시간의 비행을 위해 선택한 영화는 <부다페스트 호텔>이다. 영어와 영어자막을 선택했다. '부다페스트 호텔'은 위트로서 사람들의 생각을 끌어내는 묘한 재미를 주는 영화였다.
순식간에 시간이 지나고 이스탄불에 도착했다. 잔잔히 비가 내렸다. 유리창에 빗물이 주르륵 줄을 지어 흘러내렸다. 환승로를 따라 걸었다. 환승 게시판에 인천으로 가는 TK0090편 안내가 뜬다. 환승게이트를 찾아가는데 계속 게이트 번호가 바뀌더니 급기야 'delay(지연)'가 표시된다. 어느새 가랑비가 폭우로 변했다.
비가 쏟아졌다. 건기라고 내내 강조하더니 보란 듯이 비가 내렸다. 그냥 내리는 비가 아니었다. 하늘에서 마치 한 곳으로 쏟아붓듯 퍼부었다. 흐린 잿빛의 하늘이 온 시야를 가렸다. 처음이다. 공항에서 비로 인해 발목이 잡히기는.
공항이 온통 회색빛이었다. 공항 통유리 창에 빗물이 부딪쳐 흘렀다. 활주로에 꼼짝도 하지 않고 비행기들이 서 있다. 창밖으로 낯익은 풍경들이 길게 보였다. 도로, 기름실린더… 늘 알고 있던 대로의 모습이 빗속에서 희미해진다.
비 때문에 이스탄불에서 무려 5시간 이상 탑승이 지연됐다. 처음에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래, 이 기회에 터키공항을 좀 더 구석구석 살펴보고 다 못 산 선물도 사자고 생각했다. 하지만 수없이 출발 게이트가 예고도 없이 바뀌고 바뀐 게이트로 자리 옮기기를 수차례 반복했다. 게이트넘버를 주시하느라 극도의 피로감이 몰려왔다.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점점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피로에 지친 사람들의 모습이 확연히 드러났다. 기다리는 사람에 비해 의자는 턱없이 부족했다. 바닥에 담요를 깔고 자는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났다. 공항에서만 할 수 있는 어쩜 유일한 풍경일지도 모른다. 간신히 차지한 자리에 새우처럼 옆으로 누워 눈을 감았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 시간만큼 수많은 생각들이 지나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터키항공이 지연된 비행에 대한 보상으로 두 조각의 피자와 음료수 한 잔을 준비했다는 멘트가 들렸다. 이미 거의 모든 푸드코트는 문을 닫았다. 다 식어버린 피자 두 조각을 억지로 씹어삼켰다.
여행을 마치며갑자기 대학원 시절 응구기와 티옹고의 <피의 꽃잎들>에 장소적 증거나 흔적을 증명하려고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시골과 도시>에서 찾았던 구절이 떠올랐다.
18세기 말부터는 공동체의 관행이 아니라 방랑자가 되는 것에서 동료의식이 생긴다. 그 결과 본질적인 고립과 침묵의 외로움이 일반적인 사회의 엄격함, 차가운 금욕, 이기적인 편안함에 맞서는 자연과 공동체의 운반자가 된다.
'방랑자', '자연과 공동체의 운반자' 단어에 잠시 숨을 몰아쉰다.
쉬지 않고 내리는 빗소리가 마치 천둥소리 같았다. 오랜 시간이 지났다. 무려 6시간이 지나 TK0090편에 탑승했다. 다시 12시간을 가야한다. 좌석번호 52K. 맨 뒤에서 두 번째 좌석이다. 앉자마자 날씨 탓인지 터뷸런스(난기류)가 심했다. 좌석 벨트를 맸다. 순간 자신의 미망이 민망스러워졌다. '그래, 아직은 생의 애착을 갖고 놓지 않고 있구나!' 열심히 노력했다. 매 순간. 돌아가신 부모의 기대도 늘 가슴에 담고 살았다. 두 아이의 엄마로서 최선이고자 했다. 반쪽에게도 늘 곁에, 그 자리에 있고자 했다.
백팩에서 책을 꺼냈다. 교수님이 2017년 초에 선물하신 책이다. 현존하는 삶의 중요성, 매 순간의 존재적인 삶으로 'Here n Now(지금 여기)'를 설파하는 다니엘 스틸(Danielle Steel)의 <데이팅 게임(Dating Game)>을 읽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 유일하게 밝힌 자석의 불 때문인지 승무원이 물 한 병을 놓고 간다. 순간 다른 언어를 하지만 공감하는 사람의 마음을 봤다.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자정이 가까워진 시간이다. 서둘러 마지막 리무진을 탔다.
짐정리를 했다. 모두 그저 키치(kitsch)라고 부르는, 그러나 본인, 자신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키홀더를 그간 80여 나라를 다니며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함지박에 넣는다. 라만차의 돈키호테를 비롯한 스페인의 얼굴들이 존 스타인벡 <분노의 포도>의 66도로가 그리워 떠났던 '미서부' 옆에 자리를 잡는다.
숱한 나라를 다녔으면서 처음 여행 이야기를 썼다. 미처 다 쓰지 못한 프라도 미술관, 세비야 대성당, 코르도바, 산토토메 교회, 몬사렛 수도원 등 정작 아주 잘 쓰고 싶었던 모든 기억은 마음에 깊이 담는다.
훗날 다시 가족과 함께할 시간을 기약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