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추억의 잇템이 있기 마련입니다. 리바이스 대신 '뱅뱅'이나 '잠뱅이'로 남다른 자태를 뽐내기도 했고, '루카스' 가방을 매고 으쓱 했었죠. '하두리캠'에 열광하고, '나이트클럽'에서 열라 놀던 그때, 우리의 20세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것은 장미입니다...) [편집자말] |
계절이 바뀐다. 독감 예방 접종보다 서둘러야 하는 것이 옷장 정리다. 철 지난 옷들을 세탁해서 접어 넣고, 다가올 계절의 옷들을 꺼낸다. 5년째 입고 있는 색 바랜 체크남방부터 신혼 때 사준 감색 양복까지 세월의 흔적을 품은 옷들이 얼굴을 내민다. 해지거나 구멍이 나지 않는 한 여간해서 버리지 않는다. 오랜 습성이다. 일종의 트라우마라고나 할까.
1970년대 태생들의 대부분이 그렇듯 먹거리도 부족했던 시절에 새 옷이란 사치였다. 부잣집 친척(그나마 그런 친척이 있었던 게 얼마나 행운인가)에게서 얻어온 옷가지로 한두 해를 났다. 명절이나 생일 같은 특별한 날에나 시장에서 사다 준 새 옷을 입을 수 있었다. 물론 오래 두고 입어야 하니 늘 소매나 바지 밑단은 두어 번 접어 낙낙했다. 새 옷에 대한 부자연스러운 느낌은 그때부터 잉태됐으리라.
'핀토스' 청바지 좀 입어 봤으면...
뭣 모르는 아이 때야 부모가 입혀주는대로 불만이 없다. 문제는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시작됐다. 전두환 정권의 아량(?)으로 이미 1983년 교복 자율화가 시행되고 있었다. 몇몇 부작용들이 문제가 되자 시행 3년 후인 1986년 2학기부터는 교복 선택권을 학교장의 재량에 맡겼다. 진학한 중학교 교장은 머리 벗겨진 장군을 닮았고, 대머리 장군의 자율화 대열에 적극 동참하고자 했다.
그때부터 사춘기의 소년은 이성에 대한 자각과 동시에 메이커, 소위 말하는 브랜드에 눈을 뜨기 시작한다. 당시에는 승마바지처럼 허벅지부분은 펑퍼짐하고 종아리 근방에서 좁아지는 '핀토스' 청바지가 유행이었다. 바지 끝단을 2cm가량 고이 접고 거기에 농구화까지 갖춰 신은 아이들은 나비처럼 사뿐거렸다. 당연히 나비를 꿈꾸는 애벌레에게는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핀토스 청바지는 차치하고라도 그저 메이커 있는 바지 하나 입어봤으면.
중학생이 됐다고 집안 형편이 하루아침에 나아질 리는 없다. 여전히 친척집에서 공수해 오던 사촌형들의 의상 콘셉트에 종속됐다. 슬픔의 발단은 영양공급이 원활했기에 발육이 남달랐던 사촌들과 그 반대편에 서 있던 나와의 육체적 간극이었다. 때마침 친척집에서 공수돼오던 옷가지 중에 메이커라 불리는 바지가 한 벌 있었다.
허리가 작아서 못 입는다는 바지가 내게로 오는 순간 포대 자루가 됐지만, 이미 메이커에 눈 먼 청소년에게는 화사한 날개로 보였다. 서둘러 세탁소로 향했다. 허리를 줄여달라는 나의 간곡한 눈빛을 차마 거절할 수 없었던 세탁소 아저씨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다 한 마디를 내뱉었다.
"줄이기야 하겄지만... 영 태가 안 날 거인디?" '빌리지' 청바지가 불러온 참사... 앓아 누웠다
장인의 입장에선 4인치 이상을 줄였을 때 나타날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물이 눈에 빤히 보였을 것이다. 허나 메이커 바지를 향해 불타오르는 어린 손님의 집착과 절실함을 쉽게 내치지는 못했다. 지금에서야 그 당시 세탁소 아저씨가 휩싸였을 고민과 번뇌가 일부 헤아려진다. 여하튼 '빌리지'라는 그리 비싸지도 않았던 브랜드의 면바지는 그날 강압적으로 환골탈태 당했다.
허리를 절반 가까이 줄인 바지를 입고 등교하던 날, 어깨는 절로 펴졌고 걸음은 어느 때보다 당당했다. 근처 여학교 학생들의 시선이 온통 내게로 집중되는 기분이 들어 간혹, 머리를 쓸어 넘기기도 했다. 그러한 환상은 눈썰미 좋은(?) 반의 친구 녀석을 만나 산산이 부서졌다. "야, 니 바지 앞주머니가 궁뎅이 쪽에 붙어 있는데?" 아! 메이커가 주는 자만에 젖어 주머니에 손을 넣었을 때 무언가 어색했던 점을 간과한 것이었다.
바지의 기장이나 통을 줄이는 것이 아닌 허리를 줄일 때는 바지의 뒤쪽을 당겨 줄여야 한다. 그러다 보면 뒷주머니는 가까워지고, 앞주머니가 골반을 타고 넘어 후방으로 재배치돼야 했던 것이다. 세탁소 아저씨는 이 모든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지만, 차마 어린 손님의 꿈을 무참히 짓밟을 수는 없었던 게다.
쉬는 시간에 화장실도 안 가고 꼼짝 않고 있다가 집에 왔다. 식음을 전폐하고 드러누웠다. 눈치 빠른 어머니는 벗어 던진 바지를 보고 단번에 사태를 파악했다. 수습도 빨랐다. 부리나케 어딘가로 가시더니 최신 유행하는 디자인의 청바지 한 벌을 사가지고 오셨다. 그것도 '죠다쉬'라는 메이커가 휘황찬란하게 붙은. 집안의 장손이자 장차 가문을 일으킬 큰 아들이 기죽지 않게 하시려고 어디서 빚을 내었는지 모른다.
"죠다쉬? 엄청 비싼 건데"... 또 다른 사태가 터졌다
다음날, 나는 어제보다 더욱 위풍당당하게 학교로 향했다. 세탁소에 맡겨 밑단을 줄일 시간조차 없었기에 좀 과하게 접어입긴 했으나, 나는 어엿한 죠다쉬 입은 나비였다. 물론 눈썰미가 미치도록 좋은 그 녀석의 거미줄에 걸려들어 나방으로 강등되기 전까지만 말이다(녀석은 지금쯤 병아리 감별사나 위조지폐 감별 같은 업에 종사하고 있을 것이다, 아니 꼭 그래야만 한다).
"야, 니 바지 새로 샀네. 보자, 죠다쉬? 우와, 이거 엄청 비싼건데... 근데 말이 왜 세 마리냐?"아들의 근심을 지나칠 수 없던 어머니는 집 근처의 보세 가게에 가서 최신 유행하는 디자인의 청바지를 하나 사오셨을 뿐이다. 다만, 그 청바지는 '죠다쉬'라는 상표를 달고 있던 짝퉁이었다. 그리고 평소 가정적(?)이면서 동물을 사랑하던(?) 청바지 제조업자는 외롭지 않게 말을 두 마리 더 박아 넣었을 뿐이었다. 아빠말, 엄마말 그리고 망아지.
우연은 그렇게 겹쳤을 뿐이다. 잘못은 그 누구에게도 없었다. 그날 이후로 한동안 나는 '쪼다씨'로 불렸다. 다행히도 고등학교 시절부터 거의 모든 학교에서 교복을 입었고 '고교평준화'가 내겐 '신분평준화' 혹은 '세계평등화'처럼 들렸다. 대학을 졸업하고 첫 월급을 받아 샀던 건 부모님 내복이 아닌 '리바이스' 청바지. 죠다쉬보다 더 비싼 메이커를 손수 사던 날, 기억은 흐릿하지만 눈물 한 점 가슴 속에 흘러내렸을 것이다.
그 시절의 아픈 기억 탓인지 나는 어떤 옷이든 쉽게 버리지 못한다. 선물로 누가 비싼 옷이라도 사주면 고이 모셔 놓는 편이다. 적어도 5년 정도는 입고 나야 그제서 내 옷 같은 기분이 든다. 가난했던 나의 20세기, 매너는 사람을 만들지만, 메이커가 사람을 바꾸지 못한다는 걸 조금 일찍 알았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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