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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 앤 마리 슬로터는 정치외교학과 교수 출신으로, 2009년 미국의 힐러리 클린턴이 국무장관으로 재임했을 때 여성 최초의 국무부 정책기획국장으로 2년간 일했던 인물입니다. 계속 정부에 남아 있었으면 더 높은 지위까지 올라갈 수 있었지만, 십대 아들들과 시간을 더 보내기 위해 과감하게 정부 일을 포기하고 학계로 돌아가는 선택을 합니다.

이후, 그녀는 잡지 <아틀란틱>에 여성의 사회적 성공과 양육의 문제를 다룬 '왜 여성은 여전히 다 가질 수 없는가(Why Women Still Can't Have It All)'라는 글을 기고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이 기고문은 270만 뷰 이상을 기록하면서 이 잡지의 150년 역사에서 가장 많이 읽힌 글이 되었다고 합니다.

<슈퍼우먼은 없다>의 표지.
 <슈퍼우먼은 없다>의 표지.
ⓒ 새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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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우먼은 없다>는 바로 그 글의 요지를 좀 더 다듬고 확장한 책입니다. '이렇게 하면 여성이 사회적으로 성공하면서도 가정도 잘 꾸려 나갈 수 있다'는 식의 조언은 그동안 많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지금처럼 미국 사회가 돌봄 노동과 가정의 가치를 낮게 평가하는 상황에서는 그런 조언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저자 자신도 스스로 스케줄을 조절할 수 있는 교수 신분일 때는 일과 가정을 양립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정부 관료로 일하면서 대부분의 일하는 여성처럼 조직에 매여서 일하는 경험을 하고, 사춘기에 접어든 아들들의 문제까지 겪다 보니 점차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책의 1장에서는 그간 여성에게 주어진 조언이나, 돌봄과 관련한 사회적 통념이 진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반례를 들어 자세히 설명합니다. 많은 자기계발서에서는 여성이 성공하려면 다음과 같이 하라고 조언합니다. 일에 더욱 헌신해서 기회를 잡아라, 가정을 함께 꾸려 나갈 의지와 여력이 있는 배우자를 만나라, 가족계획을 잘 세워 아이 낳는 시기를 조절하라고요.

하지만, 일에 몰두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직장과 가정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배우자가 함께 양육에 참여한다 해도 여성의 몫은 여전히 줄어들지 않습니다. 아이를 가지는 일 또한 우리 뜻대로 이뤄지는 것이 아닙니다.

2장에서는 일반적으로 가족을 부양하기 위한 밥벌이 노동이 돌봄 노동보다 훨씬 더 가치 있게 여겨진다는 현실을 지적하며, 적어도 둘 사이에 차별을 두지 않아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50년 전 중산층 여성들은 집에만 있었고 가족을 돌보았으며, 밥벌이하는 남편과는 확실히 동등하지 않았다. 그 여성을 동등하게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여성을 해방시켜 똑같이 밥벌이하는 부양자가 되게 했고, 그렇게 하고 난 후에는 직장에서의 남녀 간 평등한 처우를 위해 싸웠다. 그러는 중에 다른 사람을 돌보는 일을 우선순위에서 미루고, 의미 있고 중요한 인간 행위인 돌봄에 대해 가치를 점점 덜 주기 시작했다. 그 결과 엄마 전쟁(mommy wars), 왜곡된 노동시장, 부끄러울 정도에 이른 아동 빈곤율, 남자들의 여성 혐오, 그리고 전업주부 배우자가 있는 남자 고위층의 기득권 유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회적 병리 현상이 뒤따라왔다.'(p.124~125에서 인용)

저자는 자신의 직업적 성공을 위해 경력을 관리하는 것에 비해, 다른 사람을 위해 시간을 사용하는 일의 가치가 절대 떨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다양한 예를 들어 보여 줍니다. 경쟁보다는 협력을 택했을 때 창출할 수 있는 가치는 여러 분야에서 긍정적으로 작용합니다. 자신의 정적에게 상원의원 출마를 양보하는 것을 개의치 않았으나 결국 대통령까지 된 링컨의 일화는 그 좋은 예입니다.

또한, 돌봄은 여성이 주로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남성도 충분히 잘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남성이 가사나 육아에 주인 의식을 갖고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하며, 여성이 원하는 방식대로 되지 않더라도 내버려 두라고 조언합니다. 모든 일을 자신이 다 하겠다는 '슈퍼우먼'으로서의 책임감을 나눠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3장에서는 2장에서 역설한 돌봄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실생활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논의합니다.

돌봄의 가치를 낮춰 잡는 말이나 단어를 쓰지 않도록 일상 언어 습관을 고치고, 모두가 기업 고위 임원이 되는 것은 아니니 각자 상황과 목표에 맞는 인생 계획을 짜 볼 것을 제안하지요. 또한, 배우자 및 직장에 적극적으로 도움을 요청하고, 사회적으로도 돌봄을 지원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드는 데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개인적으로 2장에서 제시한 발상의 전환이 제일 신선했습니다. 저도 결혼 이후 아내와 가사 및 육아를 함께 해 왔지만, 제 일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부담스럽지만 해내야 하는 일로 여겼을 뿐, 돌봄의 가치나 의의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는 못했던 거죠.

돌봄 노동을 저평가하는 풍조는 한국 사회에 널리 퍼져 있습니다. 청소 노동자, 급식 노동자, 보육 교사 등 대표적인 돌봄 노동 종사자들의 처우가 여전히 열악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자명한 사실입니다. 게다가 이런 노동은 여성의 몫이라는 편견까지 매우 강합니다.

많은 남성이 생계를 책임지는 건 자기 몫이고 가사나 양육은 아내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면, 여성은 아이를 가지게 되면 사회 경력이 단절되는 것부터 걱정해야 합니다. 심지어 아이가 있는 여성은 '맘충'이라는 모욕적인 말까지 들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사회 분위기를 고려하면 그동안 정부의 보육 지원책이 출산율 상승에 별 영향을 끼치지 못했던 것이 당연해 보입니다. 어쩌면 그런 정책들이 오히려 양육을 '지원을 받아야 할 열등한 분야'라고 낙인찍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우리에게 진정으로 시급한 것은 제도나 돈이 아니라, 돌봄의 가치를 재평가하고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덧붙이는 글 | 권오윤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 http://cinekwon.wordpress.com/에도 게재된 글입니다.



슈퍼우먼은 없다 - 일, 가정, 여성, 그리고 남성

앤 마리 슬로터 지음, 김진경 옮김, 새잎(2017)


태그:#슈퍼우먼은 없다, #앤 마리 슬로터, #김진경, #새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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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책에 관심 많은 영화인. 두 아이의 아빠. 주말 핫케익 담당.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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