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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란 색 꽃에 파묻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관광객. 중국 사람이 많다.
 보란 색 꽃에 파묻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관광객. 중국 사람이 많다.
ⓒ 이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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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는 늦가을 단풍을 즐기고 있겠지만 호주에서는 늦봄에 피는 꽃을 즐기고 있다. 동네 주위는 꽃들이 만발하다. 동네 산책을 하다가도 꽃의 아름다움과 향기에 끌려 자주 멈춘다. 시드니에 살 때는 튤립이 만발한 캔버라 꽃 축제(Floriade)를 종종 찾았으나 이곳에서는 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너무 멀기 때문이다.

시드니에 사는 지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래프톤(Grafton)이라는 동네에서 자카란다(jacaranda) 페스티벌이 열린다고 한다. 자카란다는 선명한 보라색을 자랑하는 꽃이다. TV에서 소개할 정도로 유명한 페스티벌이기에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가본 적은 없다. 전화를 받으니 문득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동네에서도 자카란다 꽃은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그래도 말로만 듣던 페스티벌을 찾아가기로 했다. 여유 있게 지낼 생각으로 숙소를 알아보니 그라프톤(Grafton)에는 빈방이 없다. 할 수 없이 40여 분 떨어진 바닷가(Mannie Beach) 작은 동네에 숙소를 정했다. 많은 사람이 찾는 축제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항상 다니는 퍼시픽 하이웨이(Pacific Highway)를 따라 북쪽으로 달린다. 그래프톤까지는 4시간 정도 운전해야 한다. 차창 밖으로 꽃이 막 피기 시작하는 자카란다 나무들도 가끔 보인다. 이곳보다 따뜻한 동네이기 때문에 목적지에는 꽃이 만발할 것이라는 기대를 해본다. 여행은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의 즐거움도 있지만, 목적지의 모습을 그리며 집을 떠날 때의 즐거움도 무시하기 어렵다. 

집을 떠난 지 얼마되지 않아 관광지로 유명한 포트 매쿼리(Port Macquarie) 근처에 왔는데 고속도로가 완전히 통제되고 있다. 사고가 났다고 한다. 따라서 포트 매쿼리 시내 근처까지 돌아가야 했다. 돌아가는 것을 시간 낭비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또 다른 여행의 이야깃거리가 추가되었다는 가벼운 생각으로 운전을 즐긴다.

목적지 그래프톤에 도착했다. 그러나 생각보다 썰렁하다. 페스티벌 분위기가 나지 않는다. 일단 강가에 있는 공원을 찾았다. 사람들이 제법 많다. 강에서는 보트 경기가 한창이다. 보트마다 이십 명 정도의 건장한 사람들이 노를 열심히 젓고 있다. 드래곤 보트 경기를 하는 중이다. 요즈음 드래곤 보트 경기가 호주에서 유행하는 모양이다. 우리 동네에서도 본 적이 있다. 이긴 팀은 홍콩까지 가서 경기한다고 한다.

공원 주위를 둘러본다. 커다란 자카란다 나무가 많다. 보라색 꽃이 활짝 피어 있다. 공원에는 베트남 참전비도 있다. '잊지 않겠다(Lest We Forget)'는 문구와 함께 수많은 희생자의 이름이 동판에 쓰여 있다. 석조물 한가운데는 1962년에서 1973년까지 참전했다는 숫자가 베트남이라는 글자 아래 크게 새겨져 있다.

규모가 제법 큰 참전비를 둘러보는 노부부가 있다. 베트남 사람처럼 보인다. 사진을 찍고 안내판의 글도 열심히 읽는다. 난민으로 호주에 정착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전쟁을 직접 겪은 사람으로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궁금하다.

문득 호주 SBS 방송이 생각난다. 흔히 이민자 방송이라고 불리는 호주 SBS 방송에서는 매일 각국의 뉴스를 위해 해주고 있다. 한국 YTN 뉴스도 매일 방영한다. 그러나 베트남 방송은 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날의 앙금을 씻어 내지 못한 호주에 사는 베트남 사람들이 공산당 정부의 방송을 반대하기 때문이다. 

여행 목적과 상관없는 보트 경기를 덤으로 보고 드디어 페스티벌이 열리는 공원을 찾아냈다. 공원 구석에 무대가 마련되어 있고 각종 놀이 기구와 가게가 있다. 보라색으로 장식된 가게에서는 보라색 티셔츠를 팔고 있다. 축제가 열리는 공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아직은 공연이 열릴 기미가 없다. 아마도 해가 떨어져야 본격적인 행사가 시작될 모양이다. 주위에 갈 곳을 알아보니 미술관이 있다. 천천히 걸어 미술관으로 향한다. 자그마한 건물이지만 20년 가까이 된 미술관이다. 호주 오지의 풍경을 담은 그림과 원주민 작품들이 깔끔하게 잘 전시되어 있다. 정원에 있는 몇 점의 조각품도 마음에 든다. 호주에는 작은 동네에도 미술관은 있다.

뜻하지 않은 곳에서 만난 보압(Boab) 나무

골목길 가로수로 심어져 있는 보기 어려운 보압(Boab)나무.
 골목길 가로수로 심어져 있는 보기 어려운 보압(Boab)나무.
ⓒ 이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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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을 나와 골목길을 걸으며 동네를 둘러본다. 집집마다 정원에는 꽃들이 활짝 피어 있다. 그러다 어느 한 골목을 만나면서 내 눈을 의심했다. 오래전 호주 북부의 황량한 황무지에 갔을 때 보았던 보압(Boab) 나무가 골목길을 메우고 있다. 황무지에서 보았던 나무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긴 하지만 모습은 꼭 닮았다. 물이 부족한 천박한 환경에서 물을 많이 저장하려고 배가 불뚝 나온 나무다. 사진기에 담을 수밖에 없다.

축제가 열리는 공원으로 돌아왔다. 조금 전보다 사람의 발걸음이 많아졌고 가게도 활기를 띠고 있다. 그러나 행사가 시작될 기미는 없다. 수많은 자카란다 나무에서 보라색 꽃이 흩날리는 것을 상상하고 왔는데 조금 실망이다.

조금 일찍 자리를 뜨면서 동네 주위를 자동차로 돌아보기로 했다. 도로를 따라 천천히 운전하는데 길가에 유난히 자동차가 많이 주차해 있다. 주차한 자동차가 많은 곳을 지나며 오른쪽을 보니 도로 전체가 보라색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도로 양쪽으로 자카란다 보라색 꽃이 뒤덮고 있다. 잔디밭에서는 각가지 포즈를 취하며 보라색을 배경으로 사진 찍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내가 상상하던 모습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보라색 꽃에 파묻혀 감탄사를 연발한다. 보라색 가로수 길도 걸어본다. 골목마다 보라색 꽃잎이 눈송이처럼 휘날린다. 온 동네와 주위가 동화 속에 나오는 세상 같다. 이곳을 지나치고 돌아갔으면 자카란다 페스티벌에 대해 크게 실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을 지나치지 않았기에 한 번 더 오고 싶은 곳으로 기억될 것이다. 

예약한 숙소를 향하며 잠시 생각에 잠긴다. 인생의 황혼기를 살고 있는 지금, 혹시 나의 삶에서 지나치고 있는 것은 없을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호주 동포 신문 '한호일보'에도 연재하고 있습니다.



태그:#호주 , #NSW, #GRAF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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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에서 300km 정도 북쪽에 있는 바닷가 마을에서 은퇴 생활하고 있습니다. 호주 여행과 시골 삶을 독자와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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