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정권을 때려잡느라 정신이 없다""복수하려고 서로 정권을 잡느냐. 나라를 잘 되게 해야지, 무슨 복수를 하려고...(정권을 잡나). 국가의 미래가 없다."안철수 국민의당 대표가 지난 3일(현지시각) 독일 백범훈 프랑크푸르트 총영사와 만찬 자리에서 한 말이다. <연합뉴스>가 이 소식을 전했는데, 보도를 접한 순간 귀를 의심했다. 자유한국당이나 바른정당 등 구 여권 인사들의 입에서나 나올 듯한 말이어서다.
안 대표의 '극우'성 발언은 이번만이 아니다. 지난 달 18일 안 대표는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방한 일정에 대해 국격을 들먹이며 강한 유감을 표시했다. 그의 말은 이랬다.
"트럼프 대통령의 일정이 1박 2일로 정해졌는데 여러면에서 씁쓸하다. 일본은 2박 3일을 가는데, 초미의 관심사인 한반도 문제의 당사국인 한국은 짧게 머물고 간다…품격있는 나라에서 국빈 방문이 1박 2일이라는 게 있는 일인가."안 대표의 발언은 보수 정치권에서 제기하고 있는 '코리아 패싱', 즉 한국홀대론과 맞닿아 있다. 안 대표의 발언에 자유한국당은 화답이라도 하듯 "일본보다 짧은 트럼프 방한 일정은 외교실패", "청, 외교안보라인 책임 물어라"며 공세 수위를 높였다.
안 대표는 문재인 정부에 수차례 날을 세웠다. 안 대표는 지난 달 16일 문재인 대통령과 여당이 김이수 헌법재판소장 대행 체제에 대해 힘을 실어 주자 "'국회에서 인준을 부결한 사람이 헌재소장을 대행하는 것은 위헌 소지가 있다'고 했더니 문재인 대통령이 국회를 비난하며 삼권 분립을 얘기해서 어안이 벙벙하다"고 날을 세웠다.
또 청와대 외교안보 라인을 거론하면서 "작년 이맘때 촛불집회에서 국민은 '이게 나라냐'고 외쳤는데 지금 외교안보 라인의 무능을 보면서 '이게 정부냐'고 외친다"고 비판했다. 또 최저임금 정책에 대해선 ""지금도 최저임금을 감당하지 못하는 자영업자와 영세기업이 많은데 생색은 정부가 내고 영세업자와 비정규직 알바생은 '을대 을'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 불평등과 빈곤 해소를 또 다른 약자에게 넘기는 셈"이라고 일갈했다.
캐스팅 보트를 쥐고 있는 야당 대표로서 정부 여당에 대립각을 세우는 건 한편으로는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안 대표의 발언에서는 건전한 대안은 찾아볼 수 없다. 트럼프의 방한일정에 대한 문제제기만 봐도 그렇다. 안 대표의 발언이 전해지자, 즉각 반론이 이어졌다.
일단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각각 2009년과 2014년 1박2일 일정으로 한국을 찾았다. 이전 사례를 보면 1960년 아이젠하워, 1974년 포드 대통령이 1박2일 동안 한국을 다녀갔다. 즉, 트럼프의 1박2일 일정이 처음이 아니라는 말이다. 게다가 "일본보다 일정이 짧다"는 안 대표의 발언도 사실과 거리가 멀다는 점이 JTBC뉴스룸 '팩트체크' 보도를 통해 드러나기도 했다. "방한일정보다 중요한 건 트럼프를 상대로 어떻게 우리의 입장을 전달하고 국익을 관철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1년 전 '나라 바로 설 기회'라 했던 안 대표
더욱 심각한 건 안 대표의 인식이다. 새 정부가 '이전 정권을 때려잡다'니, 이 무슨 망발인가? 이명박, 박근혜 두 전직 대통령은 단순한 비리 차원을 넘어 국가 공동체의 근간을 뒤흔들었다. 정보기관을 동원해 여론을 왜곡시켰고, 정부에 비판적인 시민들을 감시하고 때론 간첩 조작을 일삼았으며, 정권에 불편한 활동을 한 문화예술인들의 명단을 작성해 정부 지원에서 배제시켰다. 이 모든 일을 바로 잡지 않으면, 이 나라의 미래는 없다.
안 대표의 프랑크푸르트 발언은 그의 과거 발언과도 충돌한다. 안 대표는 꼭 1년 전인 2016년 11월22일 충남도당 개소식 참석차 충남 천안을 찾았다. 이때는 최순실 국정개입이 드러나 시민들이 촛불을 들던 시절이었다. 당시 안 대표는 전 대표 신분이었는데, 그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어쩌면 이번이 대한민국이 다시 바로 설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보통 때는 개혁이 힘들다. 기득권이 저항하기 때문이다. 특히 정치권에서 기득권 세력은 두 가지다. 정치는 세상을 바꾸어야 하는데 오히려 반대로 세상이 바뀌는 걸 막고 있거나, 개인의 사리사욕을 위해 정치를 하는 것이다. 특히 후자를 국민들의 혐오대상인 기득권 정치세력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지금 나라는 위기에 빠졌고, 밑바닥을 쳤다. 그러다 보니 개혁에 반대하는 기득권 세력이 사리사욕을 채우겠다고 달려들 수 없다."불과 1년 전 '대한민국이 바로 설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했던 안 대표가 지금 와서는 '복수' 운운하며 구 여권세력의 정치보복 프레임과 궤를 같이 하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안 대표는 2013년 4월 노원병 보궐선거에서 당선돼 정치에 입문할 때만 해도 참신한 이미지였다. 스스로 '새정치'라는 슬로건을 내세웠고, 줄서기 정치·금권 정치·지역감정 등 기존 정치권의 행태에 염증을 느낀 부동층 유권자들은 그에게 열광했다.
그러나 이후 안 대표의 행보는 새정치와 거리가 멀어 보였다. 안 대표는 지난 해 10월부터 올해 3월까지 이어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정국의 와중에 안 대표는 '촛불집회와 태극기 집회에 모두 나가지 않았다'고 다소 자랑스레 말했다.
당시 80%에 가까운 국민들이 박 전 대통령 탄핵에 찬성하고 있었음을 감안해 볼 때, 안 대표의 발언은 여론과 동떨어져 보였다. 한편 올해 4월 대선후보 TV토론회에서 문재인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에게 대놓고 '내가 MB(이명박 전 대통령의 별칭 – 글쓴이) 아바타입니까?'라고 물어 여론의 조롱을 사기도 했다.
지금은 정국 운영의 키를 쥔 야당 대표로서 건전한 비판과 대안을 제시하기 보다는 문재인 정부 흠집내기에 골몰한다는 인상을 강하게 풍긴다. 특히 '전 정권 때려잡는 데 정신 없다'는 발언이 전해지면서 안 대표는 'MB 아바타'로 각인되는 모양새다.
정치는 대화와 타협의 기술이다. 설혹 상대에게 감정적 앙금이 있다하더라도 대의를 위해 일단 한 발 물러서는 운영의 묘가 필요하다. 그러나 안 대표에게서 이 같은 묘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상대를 깎아 내린다고 자신이 높아지지 않는다. 안 대표는 이 점, 분명 명심하기 바란다. 만약 지금처럼 정부·여당 흠집내기에 정신이 없으면, 정치인으로서 안 대표의 미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