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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 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 나는 흰 나리 꽃 향내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청라 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피어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중학교 때인가 고등학교 때인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창 밖으로 목련이 뚝뚝 떨어지던 어느 봄날 토요일 음악시간, 춘곤증으로 나른한 몸과 마음을 겨우 추스르며 따라 불렀던 노래다. 원래 제목은 '동무생각(思友)'이었는데 그 당시 정치 상황 때문에 '친구생각'이라고 개명된 제목으로 배웠던 이 노래가 오늘 갑자기 생각난 것은 순전히 서울에 있는 친구의 페이스북 메시지 때문이었다.

"A가 많이 아프다. 연락해 봐라." 이 짧은 메시지를 보낸 친구 B와 아프다는 친구A는 나와 같이 대학을 다닌 30년 지기들이다. 남자들간의 우정이라는 것이 특별히 살가운 것이 있으랴마는 이 친구 B는 특히 성정이 너무 무뚝뚝해 내가 캐나다에 온 이후 몇 년 동안 이 짧은 메시지가 2번째로 온 것이다. 언필칭 '경상도 싸나이'로 불리는 친구 중의 한 명이다. 그러다 보니 이 메시지가 심상치 않은 것임이 분명하다는 느낌이 직감적으로 왔다.

서둘러 A에게 전화를 걸었다. 식당이나 시장통에서 들을 수 있는  시끌벅적한 소음이 전화기를 통해 전해졌다.

"여보세요?, 어? 태와이구나."

이 친구 역시 경상도가 고향이지만 B보다는 조금은 다정다감한 친구이다.

"그래 나야.  잘 지내지?"

A의 쾌활한 목소리를 들은 나는 '이 친구 아픈 목소리가 아니네' 하는 생각과 함께 'B가 장난을 쳤구나!'하는 생각이 동시에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한편으론 '뭐 대단한 일은 없구나'라고 안도하면서도, '너무 연락 없이 지내니 이런 식으로 연락을 취하게 하는 구나' 하는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그래서 나는 무장해제된 마음으로 반갑게 외쳐댔다.

"야! 너 목소리 들으니 멀쩡하네, B가 나한테 너 죽을 병 걸렸다고 메시지 넣었더라. 그 녀석, 나이 먹더니 안 하던 재치가 점점 늘어 가네...하하하... 거기 어딘데 주변이 소란스럽냐? 어디서 한 잔 하는 거야?"

친구의 무탈함을 확인이라도 한 듯 내 목소리는 한껏 높아졌다.

"...???..식구들이랑 밥 먹으러 왔다..."

평일 저녁인데 가족과 함께 식사를?

"오늘 무슨 날이야? "
"아니! 휴직하고 나서 식구들하고 밥 먹은 적이 없어서..."

친구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 졌다.

"야! 뜬금없이 무슨 휴직?..."

친구는 몹쓸 병에 걸려있었다. 백혈병의 일종인 혈액암이라고 했다. 얼마 전부터 계단을 오르는데 힘이 부치고 기운이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회사에서 하는 정기 검진 때 좀 신경이 쓰였는데, 그 결과가 좋지 않아 정밀진단을 받았더니 생각지도 못했던 혈액암이라는 진단이 나왔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결과를 뒤집어 보려 몇 개의 큰 병원에서 다시 진찰을 받았으나 결과는 똑 같았다. 피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회사에는 일단 휴직원을 내고 이미 1차 투석을 받았단다. 피에 암세포가 있으니 피를 전부 갈아주어야 한다. 그리고 전화한 다음날 투석 경과와 향후 치료 과정을 들으러 병원에 가보야 한다고 친구는 차분하며 담담한 목소리로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앞으로 몇 번일지 모르지만 항암치료를 받아야 하며, 이 병은 완치라는 것이 없어 지속관리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제 '시작'이라 얘기하는 친구의 음성이 내 가슴을 쳤다.

'시작이라고 뭐든 가슴 설레고 기다려지는 것만은 아니구나! 아 그렇구나! 이런 시작도 있는 거구나! '

이 친구는 화를 내는 법이 없는 호인이다. 그를 만났던 것은 대학교 2학년 때인가 무언가 큰 이슈가 걸려 학생회관에서 열띤 공개토론이 벌어졌을 때였다. 여러 사람들의 얘기가 끝나갈 무렵 체구가 그리 크지 않고 수줍은 성격인 듯 보이는 A가 사람들 사이로 나섰다. 그 때 무슨 얘기를 했는지 생각이 잘 나지는 않지만 그의 말은 느렸으나 힘이 있었고, 조용하고 어눌했지만 사람들의 공감을 샀다. 무엇보다도 그의 말이 전해주는 진실성에 나는 그의 팬이 되어 버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같은 과에 다니고 있었다. 그 후 우리는 절친한 친구가 되어 강의실에서, 운동장에서,도서관에서, 미팅 장소에서, 주막에서, 광장에서... 때론 열띤 논쟁을 하고, 때론 우리의 미래를 꿈꾸며, 노래하고 외치며, 웃고 울며, 기뻐하고 고뇌하며, 싸우고 화해하면서 우리들의 젊은 날을 함께 헤쳐 왔다.

세월이 지나고 시간이 흘러 이제 50 중반이 된 우리들. 그 사이 나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 두고 가족과 함께 캐나다로 떠나왔고  두 친구는 아직 현직에 남아 자신들의 삶을 열심히 가꾸어 나가고 있던 터였다.

인디언 말로 친구는 '내 슬픔을 자기등에 지고 가는 자'라는 뜻이라고 한다. 태평양 건너 가까이 할 수는 없지만, 지금 뜻하지 않은 시련에 좌절과 절망에 빠져 있을 그 친구에게 이렇게 전해주고 싶다.

"친구야! 네가  지금 당하고 있는 고통을  반만이라도 내 등에 짊어질 수 있다면 내가 흔쾌히 그리 하마. 마음 편히 먹고 병 치료에 집중해서 얼른 털고 쾌차하기 바란다. 그깟 암쯤이야 어린 시절 가난을 견디고, 암울했던 80년대에 대학을 꿋꿋이 다니며, 경쟁천국 한국의 월급쟁이 생활, 공든 탑이 무너졌던 IMF...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거친 우리에겐 아무것도 아니지 않은가? 우린 그보다도 더한 일들을 무수히 거치면서도 끈질기게 생존해 내는 법을 몸으로 터득한 백전 노장이잖아?  친구야!"

병마를 눌러 이기고 그가 그의 사랑하는 부인과 함께 캐나다로 여행이라도 오면 내 버선발로 뛰어나가 그를 기뻐 맞으리라. 친구B의 부부가 동행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이리라. 누추하지만 우리 집에 머물게 하면서 그 동안의 얘기와 앞으로의 우리와 우리 아이들의  삶을 얘기해 보리라. 그리고 오늘처럼 볕 좋은 가을 날 뒷마당 데크에 편안히 앉아 우리가 20대에 어깨 걸고 함께했던 노래를 나지막이 부르며 추억에 잠겨 보아도 좋겠다.

'검푸른 바닷가에 비가 내리면/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물이요/
그 깊은 바다 속에 고요히 잠기면/ 무엇이 산 것이고 무엇이 죽었소/
눈 앞에 떠오는 친구의 모습/ 흩날리는 꽃잎 위에 어른거리오/
저 멀리 들리는 친구의 음성/ 달리는 기차바퀴가 대답하려나'


덧붙이는 글 | 토론토 영락교회 웹페이지에 올린 적이 있는 글입니다.



#캐나다#이민#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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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캐나다에 살고 있는 김태완입니다. 이곳에 이민와서 산지 11년이 되었습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동안 이민자로서 경험하고 느낀 바를 그때그때 메모하고 기록으로 남기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민자는 새로운 나라에서뿐만이 아니라 자기 모국에서도 이민자입니다. 그래서 풀어놓고 싶은 얘기가 누구보다 더 많은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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