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보다는 글이, 글보다는 행(行)함이 더 무겁다. 그래서일까, <언어의 온도>에 실린 글들도 1편 '말'에서보다는 2편 '글'이, 그보다는 3편 '행'이 더 무겁게 다가온다.
말은 혀를 떠나면 날아간다. 그 순간을 포착해서 작가는 글을 쓴다. '그냥' 한 번 전화해봤다는 어르신의 말에서, 딸의 존재만으로도 하늘에 감사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읽는다.
그렇다면 글은 어떻게 써야 할까. 저자는 글쓰기 조언을 구하는 후배에게, '라이팅은 리라이팅'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혀를 떠나면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말보다는, '나무의 유전자를 지닌' 종이 위에 낙인과도 같이 찍히는 글에 대해서, 사람들은 더 무겁게 책임을 묻는다. 그래서 쓴 것을 고치고 또 고쳐야 한다. 헤밍웨이도 "모든 초고는 걸레"라고 하지 않았던가.
말은 글이 되어 무거워지면서 가라앉지만, 행함을 글로 남기려면 우유에서 치즈를 걸러내듯 그렇게 뭔가를 떨어내야 한다. 그래서 행함이 충분히 무겁지 않으면 거기에서 걸러낸 글에도 무게가 제대로 실리지 않는다.
유시민은 사는 만큼 쓸 수 있다고 했다. 자신은 그렇게 살지 않으면서 이렇게 저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면, 본인은 몰라도 사람들은 느낀다. 속이 빈 말의 가벼움을 말이다. 그래서 말과 글을 거쳐 행함에 이르게 되면, 결국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게 되는 것 아닐까. 그래서인지, 작가 이기주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묻고, 되묻고, 답한다.
'우린 어떤 일에 실패했다는 사실보다, 무언가 시도하지 않았거나 스스로 솔직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더 깊은 무력감에 빠지곤 한다. 그러니 가끔은 한 번도 던져보지 않은 물음을 스스로 내던지는 방식으로 내면의 민낯을 살펴야 한다. '나'를 향한 질문이 매번 삶의 해법을 제공하지는 않지만, 최소한 삶의 후회를 줄이는 데는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살다 보니 그런 듯하다.'(259)''어른'이 되는 것보다 중요한 건 '진짜 내'가 되는 것이 아닐까?'(265)'느끼는 일과 깨닫는 일을 모두 내려놓은 채 최대한 느리게 생을 마감하는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순간, 삶의 밝음이 사라지고 암흑 같은 절망의 그림자가 우리를 괴롭힌다. 그때 비로소 진짜 늙음이 시작된다.'(270)오츠 슈이치의 <죽을 때 후회하는 25가지>를 접했을 때, 나는 5년 뒤도 생각하지 못하던 상상력에서 해방되어 나의 임종을 흐릿하게나마 상상할 수 있었다. 어린 시절 눈물을 훔치며 보던 장 발장의 행복한 죽음을 나도 맞을 수 있을까. 사람들은 나의 삶을 살지 못하고, 세상이 나에게 기대한 삶을 산 것을 가장 후회한다고, 오츠 슈이치도, 브로니 웨어도 각자의 책에서 증언한다.
다른 사람의 삶이 아닌 나의 삶을 사는 일, 그것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실존의) 숙제가 아닐까. 그렇게 살기 위해 오늘 하루도 경건하고 겸허한 마음으로 노력했다면, 말과 글의 무게를 넘는 행함의 하루를 보냈다고 나 자신에게 떳떳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잠자리에 들면서, 내일 또 보자고, 나 자신에게 유쾌한 인사를 건넬 수 있지 않을까. 내일도 나는 나로서 존재할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약속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