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의 신'이라 불리는 일본 만화가 테즈카 오사무가 그렸지만 봉인되다시피 한 단편 <긴 땅굴>을 다뤘습니다. 이 만화는 재일조선인 차별문제를 섬세하게 다각도로 바라보는 깊은 성찰이 인상 깊은 작품입니다. 1970년 세상에 첫 선을 보였지만 이후 개정판에 실리지 않아 일본 현지의 오사무 팬들도 이 작품의 줄거리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1편과 2편으로 나눠 1편에서는 오사무가 그린 <긴 땅굴>의 줄거리와 의미, 2편 '만화의 수수께끼, 조선인은 왜 봉인됐나?'에서는 만화가 봉인되어야 했던 이유와 앞으로의 전망을 짚어내려 합니다.- 기자말"나는 꺼림칙한 것이 없다. 나는 조선인이다! 그게 어째서 나쁜가!!"- 테즈카 오사무의 단편만화 <긴 땅굴>에서 주인공 모리야마 나오히라의 마지막 대사오늘은 재일조선인 차별 문제를 다룬 일본만화 <긴 땅굴>을 추적해보자. 재일조선인이란 일제강점기 당시 강제징용 등으로 건너간 우리의 조상들과 6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그들의 후손(재일동포, 자이니치(在日))을 일컫는 표현이다.
만화는 자주 찾는 '조선(朝鮮)요릿집'이 맛있다며 식사를 권하는 아래 직원에게 불같이 화를 내는 대기업 나가하마경금속(長浜軽金属) 전무 모리야마 나오히라(森山尚平)의 모습을 비추며 시작한다.
나오히라가 왜 이런 태도를 보일까? 사실 나오히라는 침략전쟁에 나선 일제에 의해 강제 동원되어 기후(岐阜)현에서 긴 땅굴(지하방공호)을 파던 식민지 재일조선인이었다. 본래 성은 조(趙)씨였다. 그러나 인간의 기본권을 말살한 노역과 끔찍한 고문에 시달린 끝에 조선인 신분을 꽁꽁 숨기고 일본인으로 귀화한다.
"무서워. 전쟁이 끝나도 우리들은..."-일제 패망 이후에도 조선인에 대한 가혹한 핍박이 있을 것이라 몸서리치며 공포에 떠는 나오히라의 대사나오리하는 일제 패망 이후 '임자 없는 땅'이 늘어난 혼란의 틈을 타 부동산 밀거래에 나섰다. 일본인을 철저히 연기하며 수단을 가리지 않고 부를 축적해 대기업 중역으로 올라선 나오히라. 그는 '조선인 출신'임이 드러날까, 그래서 또다시 핍박받게 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철두철미하게 '토종 일본인'을 연기한다.
조선요릿집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득달같이 거부 반응을 보인 까닭이다. 하지만 결국 조선의 것을 모두 배격함으로써 순도 100%의 일본인이 되겠다던 나오히라의 꿈은 산산조각 부서지고 이야기는...
이상 '만화의 신'으로 칭송받는 테즈카 오사무(手塚治虫)의 단편만화 <긴 땅굴>(원제 ながい窖(あな) 나가이 아나)의 간략한 줄거리다. 정말 우연히 발굴해낸 작품인데 자세한 줄거리와 결말은 뒷부분에 밝히고 싶다. 일단 이 작품을 다루게 된 자초지종을 풀어내야 할 것 같다.
나는 일본을 탐색하는 통로로써 페이스북을 활용하고 있다. 팔로우와 친구를 맺은 일본인들이 담벼락에 올리는 다양한 글을 통해 한국에서 잘 알 수 없는 현지의 정보들을 길어 올리는 나날이 일상으로 자리 잡았다. 때로는 전혀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귀중한 순간을 마주하기도 한다.
'만화의 신' 테즈카 오사무가 1970년에 발표한 재일조선인의 차별문제를 다룬 단편만화 <긴 땅굴>이 바로 그런 작품이었다. 페북 링크에 딸린 블로그에 들어가 줄거리와 만화 장면을 읽어 내리던 나는 마음속으로 '이거다!'라고 크게 외쳤다.
반드시 기억해야 할 만화 <긴 땅굴>
테즈카 오사무는 누구인가. 20대 중반 이상 한국인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들어봤을(어쩌면 모르는 분들이 계실 수도 있겠지만) <우주소년 아톰>(일본어 원제, 철완 아톰(鉄腕アトム))을 그린 만화역사에 길이 남을 거장이다.
아동, 어른, 소년, 소녀, 과학, 의학, SF, 에로, 스릴러, 순정, 정치, 종교, 철학 등 실로 다양한 장르를 종횡무진해 다채로운 연출을 펼친 위대한 만화가이자, 1963년에 일본과 미국에서 장편 애니메이션(<우주소년 아톰>)의 TV방영을 선보인 애니메이션 제작자로서 그의 궤적은 널리널리 뻗어나갔다.
예컨대 오사무의 연출은 후배인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 <드래곤볼>의 토리야마 아키라(鳥山明), <도라에몽>의 후지코 후지오(ふじこエフふじお) 등 다양한 장르의 만화가에게 거대한 충격을 던졌다.
미야자키와 토리야마와 후지코의 세계는 다시 <원피스>의 오다 에이이치로(尾田栄一郎), <나루토>의 키시모토 마사시(岸本斉史), <헌터x헌터>의 토가시 요시히로(冨樫義博), <베르세르크>의 미우라 켄타로(三浦建太郎) 등 수많은 신진후배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오사무를 기리는 '만화의 신'이라는 찬사가 전혀 아깝지 않다.
그렇다면 오사무의 <긴 땅굴>은 어떤 작품인가. 우선 제목부터 살펴보자. 오사무는 일본에서 잘 쓰이지 않는 한자 窖(움막 교)를 써 작품의 의미를 강조하려 한 것으로 짐작된다. 본래 일본어로 '아나구라'라고 읽는 窖 뒤에, '구멍'이란 뜻의 아나あな라는 표기를 일부러 덧붙인 걸 보면 그 심증은 굳어진다. 네이버국어사전에 따르면 窖는 땅광(뜰이나 집채 아래에 땅을 파서 만든 광)이란 뜻을 품고 있다. 아마 오사무는 제목을 통해 움막 같이 어둡고 긴 땅굴을 표현하고자 했을 것이다.
제목 '긴 땅굴'은 만화 속에도 등장하는 태평양전쟁 당시 미군전투기 공습을 피하기 위해 땅 속 깊이 파고들어간(나오히라를 비롯한 재일조선인들이 대거 강제 동원돼 온갖 고문과 생사를 넘나들며 파낸) 지하방공호를 암시한다. 땅굴의 입구를 강조한 표지그림은 또 어떤가. 오사무가 일본사회에서 빛이 내리쬐지 않는 지하로 계속 파고들어가 볕으로 손을 뻗을 수조차 없는 재일조선인의 암담하고 섬뜩한 처지를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나오히라의 아들 히사가 일본인 고등학생들에게 '집단폭행' 당하는 장면의 펜 터치는 섬뜩하리만치 사실적이며 역동적이다. 이는 재일조선인이 일본인보다 낮은 지위에 있으며 조선인 차별문제가 일본에 만연해있음을 드러내려 작가가 각별히 신경을 기울여 작업한 것으로 풀이된다. 다른 장면들과 펜 터치, 명암 등에서 확연히 그 차이가 두드러진다.
만화 속에는 일제강점기, 전쟁에 강제 동원돼 고문당하며 생사의 기로에 놓였던 본래 조(趙)씨 성을 쓰던 자이니치 1세 모리히라 나오히라(부모)가 출생을 속이며 조선인임을 부정하는 장면, 그런 아버지에 반발해 재일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해나가던 중 비극으로 치닫는 자이니치 2세(딸 아사(亜沙)/아들 히사(久))의 모습, 일본에 홀로 남겨진 어머니를 먼 발 치에서나마 보기 위해 북한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일본으로 밀항한 청년(서영진)의 이야기, '조선인 따위에게는 폭력을 휘둘러도 괜찮다'며 재일조선인을 인간 이하로 취급하는 일본인사회의 분위기가 선명하게 담겨있다.
결말이 잊혀진 만화
이제 만화의 결말을 살펴보자. 아사는 서영진과 가까워지고 연인이 된다. 하지만 서영진의 뒤를 쫓던 형사의 손에서 도망치던 중 트럭에 치인 두 사람은 즉사한다. 연락을 받고 병원을 찾은 나오히라는 출생이 드러날까 두려워 "아닙니다 내 친구의 딸입니다"라고 말한다.
이런 아버지에게 반발해 조선고급학교(고등학교)에 진학하는 등 재일조선인의 정체성을 일깨운 아들 히사는 일본인 고등학생에게 집단린치를 당해 의식을 잃고 중태에 빠진다. 히사의 신분확인을 요구하는 경찰에게 나오히라는 "(히사가) 지인의 아들"이라고 거짓말한다.
이후 나오히라는 항의 차 히사에게 폭력을 저지른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의 교장을 찾아간다. 나오히라가 본래 조선임임을 눈치 챈 교장의 말. "자 이제 돌아가 주세요. 회사에 전화를 걸어 (당신의 태생을) 까발려도 괜찮나요. 즉 당신의 혈통을 말이지."
이 말을 들은 나오히라는 마침내 폭발해 말머리에 언급한 것처럼 자신이 재일조선임을 밝힌다. "나는 조선인이다! 그게 어째서 나쁜가!!"라는 나오히라의 호령에 교장이 들었던 전화기를 내려놓으며 벌벌 떠는 장면이 부각되며 만화는 끝난다. 일제의 핍박에 꾹 억눌려왔던 재일조선인이 마침내 스스로 정체를 밝히며 각성하는 장면이 무척 폭발적이다.
하지만 이 만화는 우리에게 소개되지 않았다. 1990년대 초반 일본만화가 한국에 본격적으로 유통되어 <드래곤볼> <슬램덩크> 등의 작품이 불법 해적판으로 나돌며 큰 인기를 끌던 시절에도.
국민의정부 당시인 1998년 10월, 1999년 9월, 2000년 6월에 걸쳐 일본대중문화개방이 정식으로 허용된 이후에도 말이다. 이후 일본의 온갖 서브컬처(하위문화)가 물밀 듯이 들어왔다. 2017년에는 신카이 마코토(新海誠) 감독의 <너의 이름은>을 보러 극장을 찾은 한국인들이 367만을 돌파해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뛰어넘는 흥행기록을 세웠다.
과거사를 반성하지 않는 일본정부의 태도와는 별개로 일본만화는 한국에서 꾸준한 붐을 일으키고 있다. 재일조선인 차별문제를 적나라하게 다룬 <긴 땅굴>이 제대로 소개됐더라면 이 흐름을 타고, 일본에 과거사 반성을 촉구하는 여론이 형성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일본인이 그린 만화로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다니, 만약 이뤄졌다면 정말 뜻깊은 역사적 사건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 땅굴>은 한국으로 전파되지 못했다. 아니, 일본 현지에서도 해외 전파는커녕 만화의 흔적을 지우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만화는 끝내 봉인됐다. <긴 땅굴>은 테즈카 오사무 전집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현재 오사무의 팬을 자처하는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만화의 존재를 아는 이들은 드물다. <깊은 땅굴>을 접한 일본인들은 '이런 만화가 있었단 말이야?'라며 놀라는 반응.
제목 그대로 <긴 땅굴> 속으로 봉인된 이 만화. 그 수수께끼를 알고 싶다면 다음 연재를 기다려 주시길. 오사무와 재일조선인을 둘러싼 깜짝 비화의 개봉박두가 머지않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주권방송>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