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그런 순간이 있다. 도움이 되지 않으면서 아픈 곳만 찌르는 간섭에 화가 나거나, 누군가를 겨냥한 혐오 발언을 듣고 울컥했던 때. 그런데도 제대로 받아치거나 잘못된 부분을 적절히 지적하지 못해서, 혼자 삭히다가 문득 이불을 덮고 누웠는데 다시 떠올라서 '이불킥' 하게 되는 날들.
물론 모든 불만이 표현돼야 마땅한 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의를 지키지 못하는 사람을 만나거나 막말을 일삼는 누군가에 맞서야 한다면 어떨까? 어쩌면 우리 모두에겐 '민폐적 인간'을 상대해야 하는 어떤 순간에는 '강단 있는 자세'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여기 '품격 있는 불만'이 필요하다는 사람이 있다. 중요한 건 불편을 이야기하는데 '위계'가 아닌 '품위'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는 거다. "나 위주로 판단하지 않고 타인을 위하는 경청의 자세, 예의 없는 자들에게 웃음과 재치로 맞서는 기술"이 포함되어야 한다는 주장. 이와 같이 '솔직한 고백'과 '당당한 발언'이 가득한 책, 최서윤씨의 <불만의 품격>을 소개한다.
'모두의 품격을 위한 불만'에 관해 말하는 책
'잉여들을 위한 잡지' <월간잉여>의 편집장, '잉집장'으로 알려진 최서윤씨가 새로운 책으로 돌아왔다. 앞서 소개한 것처럼 <불만의 품격>이라는 제목인데, 목차를 살펴보면 '정의롭게 욕하는 법', '싫은 소리 잘하는 법', '솜씨 좋게 거절하는 법', '개소리에 대응하는 법' 등이 차례로 적혀 있다. <오마이뉴스>에서 명절 기사로 나간 바 있는 글 '명절에 불참할 권리'도 실렸다(관련 기사 :
추석명절, '콩가루 집안'이라 행복해요).
본문에선 '프로불편러(pro+불편+er)'라는 단어도 소개하는데, "이거 나만 불편한가요?"라며 일상에서 흔히 접하는 일에서도 불편함을 자주 지적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 최서윤씨는 이 단어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는 프로불편러들에 대해 긍정적이다. 그들이 스스로의 불편이 정당한지에 대해 남에게 '질문'한다는 점에서, 열린 태도와 학습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다른 시선, 다른 입장의 이야기를 들어보며 내 기분의 정당성을 점검하겠다는 의도이며, 이것이 상대를 조롱하면서 자신의 '둔감함'을 고수하는 것보다는 훨씬 훌륭한 태도라고 느꼈다." - 본문 26쪽 중에서'불만'의 표출에 관해 말하면서도, 발랄하면서도 너무 가볍지 않은 서술이 인상적이다. 이를테면 "기왕이면 '둔감러'들 때문에 상처받지 않기를 기원하고, 만약 그런 일을 당하더라도 농담과 여유로움을 잃지 말고 맞서 싸울 수 있기를" 바란다고 프로불편러들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보낸 부분도 그렇다.
그러면서도 '과녁이 되어선 안 되는 사람들'을 언급하는 부분은 어떤가. '까칠함'을 장착하자고 하면서도, 막연히 떠오르는 불쾌함을 무분별하게 내뱉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저자의 글이 불만에 관해 얘기하면서도 무게를 유지하는 건, 나름의 원칙을 세우고 스스로 적용한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막 던지고 사과하기'에도 나름의 원칙은 있다. 권력 관계 안에서의 약자를 조롱하는 일, 태도나 행위가 아닌 태생적 조건을 희롱하는 일은 피하는 것이 옳다.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농담을 하는 사람에게 '정당한 공격'을 가리는 지성과, 누군가에게 깊은 상처를 새기는 일을 지양하는 매너가 필요할 것이다." - 본문 45쪽 중에서'규정지음' 당하는 일에 맞서기
최서윤씨의 책 <불만의 품격>이 청년의 관점에서 서술된 것은, 아마도 기성세대로부터 '규정'되는 걸 '당하는' 입장이라 그런 것은 아닐까 싶다. 한국에서 청년은 젊다는 이유로, 선거 때마다 '개새끼론'이 뒤따르거나 'N포 세대'로 묶이는 일도 허다한 상황이지 않나.
"그동안 청년이자 여성으로 한국 사회에서 신나게 얻어터지며 살아왔다. 규정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권력을 가진 자들일 때가 많았다. 20대 때에는 어른들 보시기에 언짢게 투표와 시위를 한답시고 싸잡혀 '개새끼'라고 불렸고, 열심히 살지 않는다는 이유로 '루저'라고 낙인찍히기도 했다. 패기가 없다고 두들겨 패다가 갑자기 청년들을 불쌍해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더니 3포 세대니 N포 세대니 하는 용어를 우리에게 들먹였다.스타벅스 종이컵을 들고 다니기만 해도 '된장녀'라는 딱지가 붙었다. 한국에서 여자로 태어났다는 사실만으로 '김치녀'라고 규정당하며 비난과 혐오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에 은근하게 항의 의사를 표하면 '프로불편러'라고 조롱당했고, 상대의 언어를 차용해 강하게 응수하면 '메갈' 딱지가 붙었다. 심지어 기준도 모호했다. 너무 큰 범주 안에 다수의 개인들을 마구잡이로 때려 넣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그 용어로 규정할 수 있는지, 그 기준을 명확히 밝혀달라고 요구해도 묵살당하기 일쑤였다." - 본문 113~114쪽 중에서이 점에서 최서윤씨는 과거 <월간잉여>에서 밝혔던 '잉여'의 개념과 창간 의도를 다시 언급하기도 한다. "잉여는 타자에 의해 폭력적으로 규정당하는 게 아닌, 스스로 자조하며 최초로 세상에 던지는 자아 선언"이고, "잉여가 소수가 아니며, '너도 잉여고 나도 잉여'라는 공감대를 토대로 <월간잉여>를 창간했다"고 말이다. 말하자면 <불만의 품격>은 <월간잉여>의 연장선인지도 모르겠다.
'정권교체'가 종착역이 아닌 이유, '사회는 계속 변해야 하니까' 어떤 사람은 '정권이 바뀌고 새 시대가 열렸는데 무슨 불만이 그렇게 많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정부를 향해 비판이 나오자 '괜한 트집은 해로우니 이젠 조용히 새로운 대통령의 행보를 지켜보자'는 식으로 말하는 지지자도 있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에서 살아가는 누군가는 멈추지 않고 또 다른 불만을 목소리 높여 말해야 한다. 소수자들, 청년들, 규정당하는 게 일상인 사람에게는 '정권교체'가 종착역이 아니고, 사회는 계속 변해야 하기 때문이다.
"시민들의 일상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곳은 회사이고, 밀레니얼 세대 중 상당수가 조직생활에서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촛불 시민' 중 기성세대에 속하는 분들에게 묻고 싶다. 권위주의적 태도로 다른 가족 구성원의 의사를 묵살하지는 않았는지, 직장 내 부하 직원에게 권력을 남용하지는 않았는지, 일주일 중 단 하루, 토요일에만 깨어 있는 시민이 되어 뿌듯하게 감정을 해소한 뒤 일상으로 돌아가 또 다른 폭력을 양산하진 않았는지 말이다.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근본적으로 개혁할 절호의 기회를 열어주는 문이기도 했다. (중략) 그러나 단 한 번의 선거나 누군가의 투옥만으로 성취할 수 있는 승리가 아님을 안다. 수천만 명이 얽혀 사는 이 사회는 마치 유기체처럼 건강했다가, 병색이 완연했다가를 반복하는 것 같다. 결국 지치지 않고 일상에서의 실천을 거듭하는 것이, 내가 살고 있는 사회를 만드는 데 일조하는 길이다. 이야말로 사회가 내가 더 나빠지지 않도록 지키는 데 주요한 방법 아닐까." - 본문 180쪽~181쪽 중에서본문의 다양한 사례를 요약하면, 저자가 겪은 '억압과 불안의 순간'을 그저 듣기만 하지 않고 맞선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낙인찍기'를 거부하며 "사회가 개인을 더 존중하고 덜 억압하는 곳이기를 희망"하며 써 내려간 글인 셈이다.
"어쩌면 지루한 공성전에 접어든 것인지도 모른다. 불편러를 불편해하며,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을 낙인찍으며 자신들이 점유하고 있는 성을 지키려는 사람들. 그리고 나는, 우리는 성 밖에서 전투하고 있다. 결국 오래도록 지치지 않는 것이 관건일 테다. 오래도록 포위하고 고립시키는 것. 성안의 이들보다 성 밖 사람들 수가 더 많도록 동료를 늘리는 것. (중략) 이 모든 것은 토론과 설득과 제도 수립에 대한 은유로 느껴진다. 그들의 성, 바로 앞에 공론장을 마련해 외면하지 못하게 만들겠다는 다짐으로 이어진다." - 본문 282쪽~283쪽 중에서정재승 카이스트 교수는 이 책의 추천사에 "경쟁적인 경제 환경은 물려받았으나 공정한 인권 환경은 제공받지 못한 젊은 세대가 인권의식이 부족한 기성세대에게 들려주는 송곳 같은 가르침"이라고 적었다. 저자의 글과 정재승 교수의 시선을 겹쳐서 본다면, 저자가 책에서 말하는 '불만'이란 '인권의식이 부족한 기성세대의 성'을 향해 던지는 돌팔매라고 할 수도 있겠다.
'차별'과 '꼰대질'이라는 벽돌로 견고하게 지은 성을 무너뜨리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저자 최서윤씨의 말처럼 '성 밖의 사람들'인 우리가 꾸준히 늘어간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닐 것이다. 세상을 바꾸는 일은 '이 정도는 괜찮다'는 사람들보다는 '이래서는 안된다'는 '프로불편러'가 많아져야 가능한 것이니까. 성찰과 '상대를 면밀하게 파악하기'를 전제로 한 비판이 날카롭게 이어진다면 말이다. 저자와 함께 '성 밖의 사람들' 중 한 사람으로 우뚝 서고 싶다면, <불만의 품격>을 읽어보기를 적극 권하는 바다.
덧붙이는 글 | <불만의 품격>(최서윤 씀/ 웨일북 펴냄/ 2017.12.1/ 1만4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