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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인생에서 가장 빛나던 시절과 순간은 잊을 수가 없다. 서울에서 태어난 최루미(55, 충남 홍성)씨는 지금부터 30여 년 전 어린이집 하나만을 보고 아무런 연고도 없는 낯선 곳에 내려와 뿌리를 내리고 살았다.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의 영향 탓인지 홍동에는 귀농 귀촌인이 유난히 많다.  

최루미씨는 홍동 귀촌 1세이다. 유아교육을 전공한 최 씨는 대학 졸업 직후인 지난 1986년 충남 홍성군 홍동면에 있는 갓골 어린이집 교사로 부임했다. 그가 첫눈에 반한 것은 홍동의 경치도 남편도 아닌 갓골 어린이집 그 차제였다. 갓골 어린이집은 도시에서조차도 어린이집이 귀했던 시절인 1981년도에 개원했다.

그는 지금도 인생에서 가장 빛나던 시기를 '갓골 어린이집에서 일한 초기 3년'이라고 말한다. 그에게 갓골 어린이집에서의 생활은 인생의 전환점이자 새로운 도전이었다. 요즘은 갓골 어린이집에 부임했던 80년대 중반의 이야기를 책으로 펴내기 위해 원고를 퇴고 중이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원고는 "글이 내려왔을 때 무작정 썼다"고 했다.  

그는 인생은 특별히 계획하지 않아도 뜻하지 않는 순간에 눈앞에 상황이 펼쳐 질 때가 있다고 말했다. 그의 30년 귀촌 생활도 그렇게 시작됐다. 최근에는 홍성군 의회 더불어 민주당 비례 대표 의원직을 제안 받고 '쿨'하게 수용했다. 정치에는 큰 관심이 없었지만 정치도 일종의 '살림살이'이라고 생각해서 결정한 일이란다. 물론 아직 경선 과정이 남아 있다.

귀촌 30년, 그는 귀촌 후배들에게도 자신들의 문화를 가져와 시골에 이식하고 있는 모습이 오히려 좋아 보인다며 쓴 소리나 조언 보다는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지난 22일 홍성의 한 카페에서 갓골어린이집 전 원장 최루미 씨를 만났다. 최 씨는 현재 식생활교육홍성네트워크 공동대표이기도 하다. 아래는 그와 나눈 대화를 정리한 것이다.

 지난 22일 갓골 어린이집 최루미 전 원장을 만났다. 최 전 원장은 갓골 어린이집에서 일했던 초기인 1980년대가 인생에서 가장 빛나던 시절이라고 기억했다.
지난 22일 갓골 어린이집 최루미 전 원장을 만났다. 최 전 원장은 갓골 어린이집에서 일했던 초기인 1980년대가 인생에서 가장 빛나던 시절이라고 기억했다. ⓒ 이재환

-특별히 홍동을 선택해 귀촌을 한 계기가 있었을 것 같다. 농활을 왔다가 부군을 만나 마을에 정착했다는 얘기도 있다.
"그게 바로 카더라 통신이다. 1985년도에 이화여대 4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학교 여성개발원에서 농촌 여성 지원 프로젝트가 있었다. 농촌 여성 지원 중 하나가 농촌 농번기 탁아소 지원이었다. 당시 홍성의 갓골 어린이집은 농촌 어린이집의 모범 사례로 알려져 있었다. 85년 여름, 연구소 팀과 함께 홍성의 갓골 어린이집을 견학 온 것이 인연이 되어 귀촌을 하게 되었다." 

- 서울과 농촌의 차이에서 오는 문화적 충격 같은 것은 없었나.
"사실 그런 것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 당시(80년대)에는 홍동에 손님이 오면 무조건 갓골 어린이집을 찾았다. 선생님들이 마을 구경도 시켜주고 어린이집에서 숙식도 제공했다. 갓골 어린이집을 처음 보자마자 너무 좋았다. 홍동에 다녀간 뒤 갓골 어린이집에서 일하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 86년 2월부터 갓골 어린이집에서 일하게 되었다. 오히려 문화적 충격은 결혼한 이후에 있었다. 어린이집 선생님이 아닌 며느리로써 아내로써의 생활에 적응하는 것이 오히려 더 어려웠다. (웃음)"

- 힘이 들어 다시 도시로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나.
"힘들지 않은 인생이 있겠나. 아이들이 있어서 그런지 그런 생각은 안했던 것 같다. 89년도에 아이가 태어났다. 잠시 휴직을 하고 육아에 신경을 썼다. 남편과 함께 수박 오이 등의 농사를 유기농으로 지었다. 남편이 소농을 하다 보니 계속 일손을 거들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 만약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간다면 같은 선택을 할 것 같나.
"그렇게는 못할 것 같다. 하지만 갓골 어린이집은 다시 갈 것 같다. 갓골 어린이집이란 곳은 상당히 주체적이고 열린 곳이었다. 할 수 있는 것이 무궁무진했다. 일반적으로 조직에는 상하 위계질서가 있다. 하지만 갓골 어린이집은 달랐다. 교사들이 그림을 다 그렸다. 당시 홍순명 원장 선생님은 주로 조언을 하시며 큰 그림을 그렸다. 선생님들 스스로 결정하고 실행하는 것이 많았다. 비록 월급은 적었지만 그 안에서 울고 웃으며 많은 일을 했다.

교사 둘이서 30명의 아이들에게 밥도 해주고 돌보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도 가정방문도 다니고 주말에는 학부모님들의 농사일도 도왔다. 방학이면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교육프로그램도 진행했다. 모두 우리(선생님들)가 차처해서 한 것이다."

- 갓골 어린이집과 관련된 이야기를 집필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어떤 내용을 담을 생각인가.
"제목을 <우리 삶의 빛나던 날들을 기억 합니다>로 정했다. 갓골 어린이집에서 가장 치열하게 살았던 86년부터 88년도 사이이의 이야기이다. 사실 갓골 어린이집에 처음 왔던 그때가 나에게만 빛나던 시절인줄 알았다. 집필 과정에서 제 1회 갓골 어린이집 선생님들부터 후원자 분들까지도 만나봤다.

그분들 모두 갓골에서 일하던 그 시절이 인생에서 가장 빛나던 시기였다고 말했다. 비록 힘들지만 행복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공통적으로 "미안하다"는 말을 남겼다. 아이들에게 좀 더 잘하지 못한 것이 미안하다는 얘기였다. 책을 통해 나를 포함해 선생들에게 '그만하면 됐다, 더 이상 미안해하지 말라'고 위로를 건네고 싶었다."
 
- 홍성군 의회 비례대표에도 출사표를 던졌다. 어떤 정치를 하고 싶은가.
"사실 정치가 내 삶에 들어올 것이라고 생각해 본적은 없다. 제안이 들어 왔을 때 많은 고민을 하지 않았다. 내 인생에 그런 제의는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지방 정치는 살림을 하는 정치란 생각이 든다. 나름대로 공부를 하면서 정치를 할 생각이다."

- 정치를 한다고 했을 때 주변의 반대 같은 것은 없었나.
"이런 결정을 할 때는 철저히 이기적으로 결정한다. 내가 결정하고 내가 책임을 지는 스타일이다. 간혹 "최루미라면 잘 할 수 있을 것"이라며 믿어주는 분들도 있다. 오히려 그런 격려가 고맙지만 더 부담스러울 때가 있다."

- 귀촌 30년차에 접어 드셨는데, 혹시 후배 귀촌인들에게 조언하고 싶은 말은 없나.
- 내가 30년 전 귀촌할 때는 나를 버리고 왔다. 여기 현지인이 되려고 무던히도 노력을 했다. 하지만 요즘 젊은이들은 자신의 것을 가져오는 것 같다. 그것을 놓고 공유도 하고 부딪치기고  한다. 그러면서 합일점을 찾는다. 오히려 그것이 더 현명하다고 본다.

요즘 젊은이들은 만화방이나 뜰(마을 주점)처럼 자신들의 문화를 가지고 온다. 현지인들은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이다. 그런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내는 것이 참 보기가 좋다."


#갓골 어린이집 #최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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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자. 개인주의자. 이성애자. 윤회론자. 사색가. 타고난 반골. 충남 예산, 홍성, 당진, 아산, 보령 등을 주로 취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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