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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형적인 터키의 시골 풍경. 아름답고 조용하며 평화롭다.
전형적인 터키의 시골 풍경. 아름답고 조용하며 평화롭다. ⓒ 류태규 제공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됐다. 이 무렵이면 생각이 많아지는 게 인지상정이다. 현재가 행복하지 않은 이들은 과거의 '행복했던 기억'에 매달리게 된다.

얼마 전 지진이 땅을 뒤흔든 경상북도 바닷가 마을에서 초등학생이 연주하는 단조로운 피아노곡 같은 지루한 날들을 살아가는 나 또한 '좋았던 과거'를 자주 떠올리는 요즘이다.

몇 해 전.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나라 터키에서 한 달쯤을 보냈다. 그중 보름 이상을 이스탄불에 머물렀다. 추억은 여행자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즐거움.

어젯밤. 터키 여행 때 쓴 일기를 뒤적이다가 혼자 웃음 지었다. "저 때의 나는 지금과 달리 웃는 얼굴로 살았구나"라는 혼잣말을 하며.

2018년의 시작. '현재가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싶다. 해묵은 일기의 몇 부분을 공개하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올해는 여행 외의 것에서도 행복을 느끼는 이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바람을 가져본다.

해장국 없이도 즐거운 도시 이스탄불

터키 여행일기의 첫 부분은 아시아에서 출발해 동유럽을 거쳐 이스탄불에 도착하기까지의 과정과 느낌을 적고 있다. 불면에 시달리는 어제오늘과 달리 그곳에서의 편안했던 잠도 기록돼 있다.

 무슬림 예배당인 모스크는 터키를 상징하는 것 중 하나다.
무슬림 예배당인 모스크는 터키를 상징하는 것 중 하나다. ⓒ 류태규 제공

 관광지에서 여행자에게 터키 국기를 판매하는 상인.
관광지에서 여행자에게 터키 국기를 판매하는 상인. ⓒ 류태규 제공

태국 방콕을 출발한 비행기가 우크라이나 키예프공항에 도착했다. 이스탄불로의 비행까지는 4시간쯤이 남아있다. 달리 할 일이 없어 공항 안을 서성거렸다. 미남미녀가 많기로 소문난 우크라이나. 공항의 보안요원은 패션모델을 방불했고, 스낵바에서 맥주를 가져다준 종업원의 푸른 눈동자가 눈부셨다.

대기 시간은 빨리 흘렀다. 마침내 키예프공항을 출발한 에어로스비트 항공기는 2시간 15분 만에 나를 옛 동로마제국의 수도에 내려놓았다.

버스를 타고 이스탄불 시내로 들어가니 가장 먼저 눈에 띈 풍경은 이슬람 예배당 모스크의 둥근 지붕들. 한두 개가 아니고, 수십 수백 개였다. 무슬림들의 기도 시간을 알리는 아잔(Azan)이 조용하게 울려 퍼졌다.

이스탄불과 한국은 6시간의 시차가 난다. 마음은 그렇지 않지만 몸은 그 간극을 이기기 힘들었는지 자정이 되기 전 잠들었다. 이스탄불의 밤 12시는 한국 시각 오전 6시.

낯선 곳에선 쉬이 잠들지 못하는 내가 단 한 번도 뒤척이거나 깨지 않고 죽은 듯 잤다. 꿈 한 조각 없는 깊디깊은 잠이었다. 이슬람 국가 터키에서의 잠은 달콤했다.

깨어나 도미토리 숙박비 13유로(약 1만7천 원)에 포함된 아침을 먹었다. 오이와 토마토, 치즈와 빵, 삶은 달걀과 각종 과일잼, 오렌지 주스와 우유, 시리얼과 다양한 형태로 가공된 올리브, 커피와 홍차...

북엇국이나 생태찌개 따위의 해장국이 없어도 좋았다. 사람은 어디서건 적응하며 살 수 있는 동물이고, 여행은 그 적응력을 단련하는 시간이 아닌가.

거리를 걷는 것만으로 행복감을 맛보다

터키에 도착한 후 맞은 첫 번째 토요일과 일요일. 철없는 아이처럼 거리를 쏘다녔다. '낯선 공간의 탐험'이라 불러도 좋았다. 여행일기에는 즐거웠던 거리 탐험의 기억이 고스란히 담겼다.

 이스탄불 거리를 오가는 빨간 트램은 재밌는 볼거리다.
이스탄불 거리를 오가는 빨간 트램은 재밌는 볼거리다. ⓒ 류태규 제공

 터키 재래시장에선 다양한 색깔의 향신료들이 판매되고 있다.
터키 재래시장에선 다양한 색깔의 향신료들이 판매되고 있다. ⓒ 류태규 제공

주말을 이스탄불에서 보냈다. 옛날, 아니 아주 옛날도 아니다. 작년 겨울만 하더라도 내가 튤립 가득한 이 고풍스러운 도시에서 주말을 보내리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사람의 생이란 그런 것이다. 아무도 내일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드라마틱하고 재밌는 게 인생이 아닐까.

토요일 저녁엔 옛 직장 동료와 만났다. 서울을 떠나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결혼해 이스탄불에 사는 유쾌한 여성. 같은 회사를 잠시 함께 다녔다는 인연만으로 그녀는 내게 한국식당에서 소주와 불고기, 냉면을 사줬다.

짐작하다시피 외국에서 먹는 한국 음식은 비싸다. 소주가 한 병에 1만 5천 원이니. 식사비가 20만 원 가까이 나왔다. 나는 그녀에게 별로 해줄 게 없었다. 마르마라(Marmara) 바다가 훤하게 내려다보이는 빌라에 산다는 옛 동료의 삶이 앞으로도 웃음으로 가득하기를 빌어주었을 뿐.

일요일 밤엔 오만가지 국적의 사람들이 넘쳐나는 술탄아흐멧 광장과 공원, 이스탄불 유럽 지구에서 아시아 지구로 건너가는 배를 타는 항구, 어른 팔뚝만 한 도미가 가지런히 진열된 생선시장, 향기와 색깔로 휘황찬란한 향신료 장터를 홀로 돌아다녔다.

점심으로는 터키식 패스트푸드인 양고기 샌드위치와 감자튀김을 먹었기에 저녁은 해산물을 택했다. 싱싱한 생선은 소금 외엔 아무 양념을 더하지 않고 구웠는데도 혀를 놀라게 할 만큼 맛있었다. 날생선을 절인 요리와 초록빛 해초무침도 입에 딱 맞았다.

수십 년 전 서울 중심가를 운행했다는 전차와 유사한 이스탄불의 '트램'을 타본 것도 즐거웠다. 영화배우 말론 브랜도를 닮은 흰 수염의 할아버지가 운전하고, 조지 클루니처럼 근사하게 웃는 차장이 차비를 받는 버스도 탔다. 터키 남자들은 건장하고 잘 생겼다.

겨우 거리와 시장을 돌아보고, 대중교통에 올라 도시 외곽을 구경했을 뿐인데도, 온종일 입가에선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새로운 도시에서의 새로운 경험. 인간이란 그 경험 속에서 커가는 것이다.

 터키식 패스트푸드를 판매하는 식당. 저렴하고 맛있는 것들이 많다.
터키식 패스트푸드를 판매하는 식당. 저렴하고 맛있는 것들이 많다. ⓒ 류태규 제공

어느 곳에서건 평화로운 꿈을 꾸는 새해가 되길


생의 모든 시간을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 많은 이가 지지부진한 현재의 상황에서 벗어나 근사하고 멋들어진 '또 다른 삶'을 꿈꾼다.

낯설고 먼 곳으로 훌쩍 떠나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고, 콧노래 흥얼거릴 수 있는 여행 역시 그런 욕망이 반영된 행위다. 그러나 마음먹은 시간에 자신이 가고자 하는 어떤 곳으로건 훌쩍 떠날 시간적·금전적 여유를 갖추고 사는 사람은 지극히 적다. 슬프지만 엄연한 현실이다.

덜컹거리는 기차 안에서 본 터키의 시골 마을이 떠오른다. 한없이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2018년엔 우리가 어디에 있건 그 풍경을 닮은 평화와 행복만이라도 꿈꿀 수 있었으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경북매일신문>에 게재된 것을 일부 수정·보완한 것입니다.



#터키#이스탄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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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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