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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사 활동을 하다 우연히 <벌거벗은 임금님>을 다시 읽을 기회가 생겼다. '감회가 새롭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읽은 <벌거벗은 임금님>은 내게 새롭게 다가왔다.

어렸을 적엔, "임금님은 벌거벗고 있다"라고 말한 아이의 용기가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왕의 주변에 있던 신하들, 어른들이 침묵하고 있었던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게 됐다.

그 시절 왕은 전지전능했다. 자신의 생업과 가족의 생계가 달려있는데, 감히 어떤 어른이 "임금님은 벌거벗고 있다"라고 외칠 수 있을까. 전후 사정에 대한 고민이 상대적으로 덜한 '아이'였기에 폭로가 가능했던 것이지...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가 책 <왜 사회에는 이견이 필요한가>를 접했다. <왜 사회에는 이견이 필요한가>는, "왜 우리는 침묵하나?"라는 질문에서 시작한다.
대체로 동조는 현명한 행위다.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따라 하다 보면 우리는 훨씬 잘 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동조하는 이유는 종종 정보의 부족 때문이고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결정하는지는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최상의 정보 가운데 하나다. 만약 무엇을 해야 할지 확실치 않다면, 손쉽게 적용할 수 있는 경험의 원리로서 '군중을 따르라'는 견해를 받아들일 것이다. -<왜 사회에는 이견이 필요한가> P.25.
저자는 정보의 부족과 사회의 시선이 우리를 다른 사람에게 동조하게 한다고 했다. 인간은 문제가 복잡할수록 다수가 선택한 답에 그 의사를 의탁한다. 또한, 혹시나 자신이 제시한 의견이 조직의 연대를 약하게 하거나 효율성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데에 대한 두려움과 그에 따른 구성원의 눈총이 사람들을 침묵하게 하고 동조하게 한다고 했다. 이러한 사례는 우리 주변에서도 찾아볼 수 있고, 역사적으로도 많다.

 <왜 사회에는 이견이 필요한가>
<왜 사회에는 이견이 필요한가> ⓒ 후마니타스

문제는 '무조건적인' 침묵이다. 조직의 명운이 달린 결정에 있어, 무조건 자신의 안위만 신경 써 침묵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민주주의 사회로 친다면, '알아야 할 정보'를 모르고, 잘못된 주장에 동조함으로써 사회를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게 하는 것이다. 히틀러의 나치가 그랬다. 극단적 전체주의와 배타주의, 그리고 동조와 침묵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보여주는 사례다.
침묵이 종종 폐해를 야기한다면, 어떻게 사람들이 아무런 부담 없이 자신의 견해를 말할 수 있도록 뒷받침할 수 있을까? 가장 분명한 방법은 불일치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지배적인 정설에서 벗어난 사람들을 처벌하지 않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다. -<왜 사회에는 이견이 필요한가> P.61.
사람들이 이견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게 하려면 무엇보다 '불일치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자세'가 우리 사회에 필요하다. 하지만, 그 문화는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는다. 명제 자체도 추상적이다. 저자가 언론의 자유와 같은 다양한 시민적 자유의 보장을 동조의 압력 해방 장치로 예를 든 이유일 테다.

그중에서도 언론의 자유는 특히 필요하다. 언론의 자유는 권력자들로부터 시민의 공간을 만든다. 시민은 언론을 통해서 다양한 이견을 표현하고, 검증받는다. 이 과정에서 다른 집단 혹은 시민은 자신의 의사에 반(反)하는 의견을 접하며 자신의 사고를 확장할 수 있다. A라는 의견과 B라는 의견은 언론의 자유가 만든 공간에서 서로를 보완하며 완결성을 높일 수 있다.
'내가 강조한 바와 같이, 이견을 제시하는 사람들이 터무니없는 것을 말하기도 하고 그들이 말한 것이 유익하지 않거나 심지어 해로운 것일 수도 있다. 우리가 장려하는 것은 그런 종류의 이견이 아니라 합리적인 견해 혹은 올바른 종류의 이견이다. 유익한 결정을 산출하고 잘못된 쏠림 현상의 위험을 줄이려면, 바로 이 점이 근본적인 목표가 되어야 한다.' - <왜 사회에는 이견이 필요한가> P.152.
극단을 향해 달리는 사회와 집단에 브레이크를 걸기 위해서만 '이견'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궁극적으로 합리적 주장의 건설적 대결과 토론은 '더 나은 결과'를 만들 수 있다. 책에서는 미국의 1961년 쿠바 침공(피그스 만 침공)을 예로 든다.

쿠바 침공이 실패한 후, 존.F.케네디 대통령은 쿠바 침공에 대해 한탄한다. 존.F.케네디 대통령이 쿠바 침공에 임할 때, 그에게 반대되는 의견을 전한 이는 없었다. '온건파'라는 꼬리표가 자신에게 붙을까 무서워한 참모들은 아무도 쿠바 침공에 이견을 달지 않았다고 한다. 만약 건설적 토론이 보장된 상황이었다면 얘기는 달라졌을 것이다.

다시 읽은 <벌거벗은 임금님>에서 느낀 감회는 <왜 사회에는 이견이 필요한가>를 읽으면서 다시 바뀌었다. 생계를 위해 얘기를 못 한 사람들, 생계에서 자유로운 아이의 용기보다 더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이견 표출이 자유로운 사회'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벌거벗은 임금님>의 궁극적 문제는 이견에 관대한 사회가 아니었다는 데에 있었다.

점점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우리 사회 역시 마찬가지다. '다름'을 인정하고 이견을 수용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보수와 진보, 우파와 좌파로 나누어져 서로를 반목하기보단, 타인(타 집단)의 의견을 이견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견(異見)은 '다른 의견'이지 '틀린 의견'이 아니다. <왜 사회에는 이견이 필요한가>는 극단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우리 사회에 필요한 책이다.


왜 사회에는 이견이 필요한가 - 개정판

카스 R. 선스타인 지음, 박지우.송호창 옮김, 후마니타스(2015)


#이견#사회#다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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