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지난 1월 10일, 고 이돈명 변호사님의 7주기를 추모하며 열린 7회 이돈명인권상을 수상하신 <초등성평등연구회>의 대표 서한솔 선생님의 수상 소감입니다. -기자말
당혹스러웠다. 페미니스트 교사에게 집중된 공격은 아직 진행 중이고 성교육 표준안 폐지 운동은 미궁 속에서 헤매고 있으며, 학교 현장에 도착한 새 교과서는 그 어느 때 보다 성평등하지 못한데, 우리는 당시 '성평등이 아니라 양성평등을 쓰라'는 일부 기독교 단체와 '그게 아니고 성평등이 맞다'는 그런 수준의 싸움을 벌이고 있는 도중이었다. 뭐 해낸 것이 없는데 상을 주겠다는 말에 어깨가 으쓱하기보다 묵직해졌다.
그다음은 왜 우리인가 생각했다. 페미니스트 자매들의 분투가 무엇보다 두드러졌던 한해였기 때문이다. 불법촬영에서 소라넷을 비롯한 인터넷 커뮤니티로 이어지는 디지털 성폭력에 맞서는 여성들. 생리대와 낙태죄 폐지 등 여성의 몸에 대한 주권을 되찾으려는 여성들.
다양한 분야에서 이루어지는 성폭행에 침묵 대신 말하기를 선택한 여성들의 #OO계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 여성의 목숨 자체를 위협하는 남성의 폭력에 마지막 보루가 되어준 수많은 여성 단체들. 올해의 운동과 사건만 가지고도 끝도 없이 이어지는 리스트를 만들 수 있다. 그들을 대표하기엔 우리의 활동이 너무나도 미흡해 보였다.
마지막으로 사진이 찍힐 것을 걱정했다. 이전에도 인터뷰를 하며 사진을 찍을 수 없겠냐고 요청하는 미디어가 많았지만 차마 승낙할 수 없었다. 상을 받는 자리에서조차 얼굴을 가려야 하는 처지가 비참했다. 다른 이들을 위해서라도 용기를 내야하지 않겠냐는 말을, 특히 남성에게 들을 때면 부끄러운 동시에 그 둔감함에 화가 났다. 개인의 얼굴을 내걸고 하는 말이 가지는 진정성이란 가치는 2018년 대한민국에서 남성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임을 뼈저리게 느낀다. 이것이 현재 여성들이 살고 있는 현실이다.
초등성평등교육, '제대로' 하겠다고 마음먹은 이유 초등성평등연구회는 2016년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을 계기로 초등교사 커뮤니티에서 시작되었다. 사실 학교 현장에서는 이미 성평등 교육이 창의적 체험활동의 한 분야로 들어와 교육되고 있다. 이전에도 사회적으로 반향을 일으킨 사건이 시초가 되어 수업 자료 등을 제작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에 크게 문제될 거라고 여기지는 않았다.
착각이었다. 함께 수업연구를 해보자는 글에 달린 수많은 댓글 중엔 응원도 있었지만 공공연하게 여성혐오를 드러내는 내용도 많았다. 일부 동료 교사에 대한 배신감을 느낀 것과 동시에 견딜 수 없을 만큼 화가 났다. 여성이 죽었는데, 죽고 있는데, 그걸 하지 말라고 교육하겠다는 이들에게 역차별이다, 이미 여성우월사회다, 페미니즘 말고 생명 존중 교육이나 예의 교육해라 운운하는 이들이 있다니 기가 막혔다. 동시에 그저 막연하게 '한번 수업 자료 만들어 볼까?'하는 생각이 바뀌었다. 정말 제대로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초반 교육 자료는 아이들을 훈육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여성혐오적인 미디어를 비판적인 시선으로 볼 수 있도록 가르치고, 어린이들이 즐겨보는 애니메이션이 성평등하지 않다는 사실을 주장하는 글로 표현하도록 하고 생리에 대해, 경력 단절과 유리 천장에 대해 가르쳤다.
동료 교사들에게 도움이 되는 자료를 만들어 배포하면 자연스레 여러 교실에서도 페미니즘 수업이 이루어지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들은 학생들을 훈육의 대상으로만 보고 동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으로 보지 않았던 한계가 있었다. 다인수 학급에서 아이들을 조용하게 관리하고, 성 평등한 시선에서 쓰이지 않은 교과서를 '중립적'으로 전달할 것을 기대 받는 이가 바로 교사다.
이 교사라는 자리가 가진 권력이 아이들을 한 명의 동시대인이 아닌 훈육의 대상, 관리의 대상으로 볼 수밖에 없게 만든다는 걸 깨달았다. 어디서부터 바꿔야 할지 모를 정도로 메꿔야 할 부분이 너무 많아서 우왕좌왕하고 있던 차 기독교계에서 페미니스트 교사인 최현희 선생님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페미니즘 교육이 곧 남성혐오 교육이고, 동성애 교육이다', '이런 짓을 하는 이가 바로 혁신교육을 하는 전교조 교사들이다'로 이어지는 프레임은 놀랍도록 잘 통했다. '어떻게 페미니즘을 교육할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페미니즘을 왜 가르쳐야 하는가'란 질문으로. 페미니즘은 남성 혐오가 아니라는 설득으로, 애플 같은 국제적 기업의 사장이 성소수자인데 성소수자 안 가르치면 우리 아이들이 뒤떨어진다는 협박으로, 논의의 수준을 계속해서 낮출 때마다 참담했다.
누군가는 혐오의 대상이 되며 목숨을 위협받고 있는 와중인데, 그들이 학교 현장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데, 내 학생과 동료의 실존이 위협받고 있는데,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해 언급조차 해선 안 된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는 게 끔찍했다. 아이들에게 페미니스트가 되라고 가르치려 했지만 교사는 페미니스트가 돼서는 안 된다는 압력 앞에서 겨우 만난 페미니스트 동료 교사와 '우리는 항문 성교를 가르치지 않았다'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전달할지 고민하며 반년을 보냈다.
'학창시절 당신을 만났더라면' 절절한 외침들
해시태그 캠페인은 그 기간 동안 가장 힘이 되는 동시에 내가 속한 교육 현실을 돌아보게 된 사건이었다. 많은 분들이 각종 SNS를 통해 해시태그를 달아 동의의 뜻을 보여주셨고 경험을 나눠주셨다. 그 중 남녀를 막론하고 가장 많이 보였던 내용은 "내가 학창시절에 페미니스트 교사를 만났더라면 나의 시야는 지금과 많이 달랐을 것이다"라는 절절한 말이었다.
수상소감을 쓰기 전 이돈명 인권상의 역대 수상자들을 살펴보았다. '학생인권조례제정운동 서울본부', '밀양 765kV 송전탑 반대 대책위원회', '장애등급제 부양의무제 폐지 공동행동', '무지개 농성단',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 '전쟁 없는 세상.' 인권운동의 최전선에서 싸워온 이들과 우리 이름을 나란히 놓는 것에 대한 겸양을 표현하는 것이, 가뜩이나 폄하되고 삭제되고 있는 여성들의 성취에 대한 누가 될까 두렵다.
그저 천주교인권위원회에서 우리에게 준 이 상은, 지금 우리의 성과에 대한 축하가 아니라 지금까지 초등성평등연구회가 걸어온 방향에 대한 지지라고 여긴다. 이는 앞으로 교육현장에서 더욱 활발하게 페미니즘 교육이 자리 잡을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초등성평등연구회의 목적은 최현희 선생님의 닉네임처럼 학교현장의 마중물 역할을 하는 것이다. 성 고정관념의 틀에서 벗어나 결국에는 모두가 자기답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보여줄 수 있는, 마중물이 되는 성평등 교육을 실현하기 위하여 초등성평등연구회는 앞으로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나갈 것이다.
끝으로 페미니스트 교사를 선언했다는 이유만으로 많은 핍박을 견디고 계신 최현희 선생님을 비롯한 모든 페미니스트 선생님들. 우리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서도 지치지 않고 목소리를 내는 수많은 페미니스트들 자매들께 지지와 연대의 마음과 함께 상금 또한 나누고자 한다. 자매들이 없었으면 우리도 없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천주교인권위원회 월간 소식지 <교회와 인권>에도 실릴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