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엄마의 일’이라는 구닥다리 공식을 벗어나 적극적으로 육아에 참여하는 아빠들, ‘육아빠’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최악의 저출산 사회, 2018년 대한민국에서 육아빠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육아빠와 워킹맘의 솔직한 목소리를 들어봅니다. 또한 새로운 ‘아빠 노릇’을 고민하는 이들을 만나봅니다. [편집자말] |
신호승(53)씨는 지금은 20대인 딸 때문에 '대화 활동가'가 됐다. 공동체 내 갈등을 대화를 통해 전환하는 법을 강의하고 활동가를 육성하는 일을 한다. 신씨가 기억하는 딸이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는 아이와 이야기만 하면 싸웠다. 도무지 대화가 안 됐다.
아이의 질문에 신씨는 관념적인 답변을 했고, 아이는 아빠한테 물어보면 더 어려워진다고 짜증을 냈다. 반면 엄마와 아이는 '짝짜꿍'이 맞았다. 집안에서 혼자만 소외당하는 기분이었다.
"애랑 자꾸 싸우니까 화를 내게 되고, 제가 화를 내면 애는 울고. 서로 점점 거리가 멀어지는 거죠. 평생에 딸 하나 키우는데 애하고 이렇게 대화를 해야 하나, 관계를 맺어야 하나, 다른 방법은 없나 방법을 고민하던 차에 비폭력 대화를 알게 됐어요. 지금은 굉장히 사이가 좋아졌어요. 딸하고 대화가 너무 많아서 탈이죠. 이렇게 되는 데 10년 걸리더라고요(웃음)." 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인 손병기(54)씨 역시 아들과의 관계가 힘들었다. 평생 일밖에 모르고 살아온 인생이었다. 아이가 4살 때부터 5년간 회사 지방근무로 가족과 떨어져 살았다. 손씨는 아이가 아빠를 가장 필요로 했던 시기에 아이 곁에 있어주지 못했다며 자책했다. 중고등학교 6년간은 아이가 대안학교 생활을 하느라 또 다시 떨어져 살았다.
밖에서는 친구들과 장난도 많이 치고 말도 많다는 아들은 집에 오면 말이 없고 무거웠다. 그런 아들에게 다정다감하고 살가운 아빠가 돼보려 뒤늦게 교육을 받고 책도 읽으며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가부장적인 문화에서 저도 그런 아버지를 보고 자라다 보니 머리로는 이해가 가는데 가슴으로 잘 안 되는 거죠. 그러니까 효과가 없는 거예요." 아이가 아빠를 필요로 할 때는 회사 일 때문에 바빴고, 이제 아빠가 여유가 생기자 아이가 바빠졌다. 손씨는 이런 자신의 모습을 이 시대 아빠들의 자화상이라고 표현했다. 아들은 최근 군대에 입대했다.
출판사 대표인 김태영(52)씨는 현재 중3인 딸과 비교적 잘 지내는 편이다. 다른 아버지들처럼 가끔씩 '욱' 할 때도 있다. 하지만 아침저녁으로 꼭 딸과 포옹을 나누는 등 스킨십을 자주 하며 유대감을 다지려고 한다.
김태영씨의 고민은 다른 곳에 있었다. 아이를 대안학교에 보내고 적극적으로 학교 활동에 참여하다 보니 점점 자기 자신이 없어졌다. 아이가 대안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는 어떻게 하지, 나의 고민을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은 없을까, 아빠이기 이전에 '나'라는 정체성을 찾고 싶었다.
아빠는 왜 이런 존재가 됐을까'아빠'라는 역할에 대한 각기 다른 고민을 가진 아빠들이 '아빠학교협동조합'이라는 이름으로 만났다. 시작은 신호승씨의 아이디어였다. 역시 아이를 대안학교에 보냈던 신씨는 대안교육부모연대에서 교육위원장 일을 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밑거름 삼아 '부모교육원'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부모들이 자신을 되돌아보고 서로 배우면서 성장할 수 있는 네트워크를 구상했다. 하지만 그 꿈은 번번이 생업에 밀렸다.
이러한 아쉬움을 페이스북에 털어놓자, 김태영씨가 댓글로 '그 꿈은 아직 유효하다'며 '펌프질'을 했다. 2015년 비슷한 생각을 가진 아빠들이 모였고 1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2016년 '아빠학교협동조합'을 창립했다.
멤버는 총 8명. 신호승씨가 이사장을, 김태영씨는 이사를 맡았다. 멤버 가운데는 엄마도 있다. 손병기씨는 아빠학교협동조합에서 준비한 6주간의 교육 프로그램인 '아빠 나(我)빠'에 '아빠의 두 번째 인생' 강사로 참여했다. 이후 이들의 취지에 적극 공감하고 이사로 합류했다.
아빠 나빠에서 '나빠'는 '책임과 의무의 아빠가 아닌, 존엄과 권리의 '나', 나를 사랑하는 아빠를 뜻한다. 지난 8일 공덕동 서울시50플러스재단에 위치한 협동조합 사무실에서 세 아빠를 만났다.
'과거의 아빠는 사라졌지만 미래의 아빠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아빠의 이야기가 달라져야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의기투합했습니다. 우리 각자가, 과거의 권위주의적이고 일만 아는 아빠의 이야기 대신, 수평적이며 함께 놀 줄 아는 아빠가 되고 싶습니다.' - 아빠협동조합 홈페이지 소개글 가운데
대화가 안 통하는 아빠, 욱하는 아빠, 권위주의적이고 일만 아는 아빠. 아빠들은 왜 이런 부정적인 존재가 되었을까. 50대인 이들은 특정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사회문화적인 요인이 크다고 봤다.
신호승 : "제가 얼마 전에 영화 <1987>을 봤는데, 우리 세대가 30년 전인 20대 때 현장에 있었던 이야기에요. 지금 제 딸이 딱 나이더라고요. 50대는 민주화의 주역 세대라고 봐야 해요. 문제는 이런 거예요. 정치사회적 민주화에 대한 투쟁과 요구는 강렬했어요. 그런데 우리 삶도 민주적인가요? 가정 내 자녀와의 관계라든지, 아내와의 관계라든지. 여전히 과거의 습관이 남아 있어요. 아빠라고 하면 뭔가 권위가 있어야 하고, 집안을 이끌어가는 사람인 것처럼 스스로를 생각하고. 돈도 다 벌어 와야 하고. 모든 사람이 내 말만 따라야 하고. 그런 태도들 때문에 가정 내 불화가 생기는 거예요. 사회는 점점 민주화, 개인화 되어 가는데 아빠들 의식은 따라가지 못하고 있어요. 그 안에서 갈등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죠."이들은 이구동성으로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 '아빠 역할'에 대한 고민이 부재했다고 지적했다.
손병기 : "직장에서나 사회에서는 끊임없이 진단을 받았어요. 직장에서는 어떻게 해야 하고 관계를 어떻게 맺어야 하고 실적을 어떻게 올리고... 그런데 '아빠는 이래야 해, 그건 잘못된 거야' 이런 진단이 없었어요. 가정은 유교적인 영향도 있고 프라이버시가 굉장히 중요한 곳이니까요. 그러다 보니 그 성이 더욱 공고해진 거예요. 제가 아는 분 아들이 대학생인데 너무 독재적으로 하는 거예요. 새벽 몇 시에 일어나서 공부하고 토익은 몇 점을 받아야 하고. 그 아들이 울면서 아빠랑 도저히 못 살겠다고 하는데 제가 그 아버지한테 뭐라고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못 해요. 마치 치외법권과도 같은 영역이니까 발전이 안 되는 거예요. 머리를 맞대고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을까 고민해야 하는데."
아빠도 아프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아빠들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갔다. 김태영 이사는 "우리 또래 아빠들은 '아빠는 어때야 한다'고 누구한테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고 자신의 아빠한테 보고 배운 게 전부"라고 말했다.
신호승 : "아빠학교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계기 중 하나가 제 아버지와의 관계예요. 지금 세대가 아들과 관계 맺기 어려운 것 이상으로 우리 세대가 우리 아버지 세대랑 관계 맺기는 더 어려웠어요. 지금은 돌아가셨는데 저희 아버지가 36년생이셨어요. 이 시대를 사셨던 분들은 아주 봉건적인 생각으로 똘똘 뭉쳐있는 양반들이었는데, 우리는 민주화 세대로서 봉건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던 아버지들과 치열한 갈등이 있었어요. 어렸을 때 재떨이 날아오고, 방에서 담배 피고. 아버지 주무시면 꼼짝도 못하고... 저희 아버지는 그런 분이셨어요."김태영 : "저도 좀 비슷해요. 저희 아버지도 지금 안 계시는데 저는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없어요. 그게 제일 마음이 아파요. 분명히 맛있는 것도 먹으러 가고 휴가도 같이 갔을 텐데...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나쁜 기억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내 아이에게는 이 나이대에 이런 추억을 주고 싶다는 생각으로 의도적으로 이벤트를 해요. 내 아이에게는 추억을 많이 주고 싶어서요. 마음 아픈 현실이죠. 누군가 그러더라고요. 아빠와의 고리를 풀어야만 내 밑에 세대와도 자연스럽게 관계가 풀린다고." 신호승 : "내 아버지와 화해를 하지 않으면 내 자식과의 관계도 꼬이게 되는 것 같아요." 김태영 : "화해라기보다는 이해랄까요. 지금은 그 시절 아버지가 오로지 먹고살기 위해서 그럴 수도 있었겠구나, 그런 이해력이 생겼어요. 내 아이한테는 그러고 싶지 않은 거죠."
세 아빠들은 말했다. '아빠도 아프다'고. '아빠 노릇'이 없는 진지한 고민이 없는 사회에서 과거의 아버지를 따르다 보니 아빠도 아팠고, 가족도 아팠다.
아빠들은 만나야 한다아빠학교협동조합은 그동안 '아빠나(我)빠'를 비롯해 아빠 바로서기를 위한 '아빠인문학', 아빠가 서로를 돌보는 '빠빠케어' 강좌 등을 열었다. '아빠와 함께 여행하기' 프로그램을 진행했고, 서울50플러스재단에서 주최하는 '서울50플러스페스티벌'에 참여하기도 했다. 서울50플러스재단은 50대 이상 세대의 새로운 인생 모색을 지원하는 기관이다. 아빠학교협동조합은 공익활동 단체로 선정돼 사무실 공간 등의 지원을 받고 있다.
또한 지난해 말에는 서울시 여성가족복합공간인 '스페이스 살림'과 함께 '아이들의 성평등한 미래를 위한 부모의 역할 찾기'라는 주제로 집담회를 열기도 했다. 신호승 이사장은 "성평등이라는 키워드로 가족문화를 재구성해내는 문제는 새로운 가족문화의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멤버들 각자 생업이 있는 상황에서 상근자 없이 고군분투 해왔지만, 좀 더 적극적으로 사업을 진행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다. 난관은 또 있었다. 바로 프로그램의 주체이자 대상이 되어야 할 아빠들이 너무 바쁘다는 것.
신호승 이사장은 "'아빠'를 자기 삶의 핵심 키워드로 가져가기에는 아빠들이 삶의 여유가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특히 한창 일과 육아를 하고 있는 30, 40대 아빠들의 참여가 저조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아빠들이 서로 만나 연대해야 한다는 것이 신 이사장의 생각이다.
"요즘 아빠들은 내 자식과의 관계 속에서만 내가 어떻게 육아에 많이 참여할 것인가 고민해요. 이게 나쁘다는 게 아니라 '내 새끼'만 생각하게 되면 전체 사회구조적 문제에 대한 시야를 잃어버리게 되거든요. 대선에서 손학규 후보가 '저녁 있는 삶'이라는 이야기를 했어요. 아빠들의 로망이죠. 하지만 노동시간 단축 등 정치사회적 문제들이 동시에 해결되지 않는 한 아빠들의 삶은 보장되기 힘들어요. 이건 혼자서 풀 수 없는 문제예요. 밖으로 나와서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과 대화하고 공부하고, 제도적인 변화가 필요하면 활동도 같이 하고 함께 성장하고. 그런 장이 우리 사회에는 필요해요." 신 이사장은 "지역단위, 마을단위 커뮤니티가 활성화되는 게 중요하다"면서 "마을단위 아빠 공동체가 활성화될 수 있도록 아빠학교협동조합도 역할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올해부터 조합원 모집을 할 예정이라며, '3040아빠들의 참여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고 꼭 써달라고 당부했다.
"저희도 배운 게 없어요. 우리가 10년 먼저 아빠 노릇 했다고 해서 가르쳐 줄 수 있는 건 많지 않아요. 다만 시행착오 겪으면서 이렇게 해봤더니 잘되더라, 이렇게 해봤더니 잘 안 되더라, 공유는 할 수 있겠죠. 서로 교류하면서 함께 발전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건강한 아빠가 건강한 사회를 만든다'. 인터뷰 내내 세 아빠가 강조한 말이다. 손병기 이사는 "아빠 스스로 자아가 건강해져야 아이들이 건강해지고 가정이 건강해지고 나아가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 수 있는 기초가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빠들의 새로운 도전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