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어느 정도 여론의 분노가 사그라든 것 같지만, 아직까지 검찰이 수사중인 사건이 있다. 바로 고모양 살해사건(굳이 이름을 밝히지는 않으려고 한다)이다. 작년 말만 해도 친부와 내연녀의 만행이 매일 하나씩 밝혀지면서 '사람이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저런 짓을 할 수 있느냐'는 반응이 폭발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친부를 향해 기자들이 녹음기를 앞다투어 들이대는 광경을 뉴스에서 본 적이 있다. 그 중에 어떤 기자의 질문이 내 귓 속을 지금까지 맴돌고 있다.
"아이를 학대하고 폭행했습니까?"자신의 혐의를 인정하지 않느냐는, 기자라면 현장에서 응당 할 법한 질문이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묘한 궁금증이 일었다. 아이를 폭행하는 것은 그 자체로 학대 아닌가? 왜 학대와 폭행을 구분해서 쓰는 거지?
애써 학대와 폭행을 구분하는 이유
김희경 인권정책연구소 이사가 쓴 <이상한 정상가족>은 내 궁금증에 해답을 주었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이 책은 '정상가족'이라는 이데올로기가 한국사회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규명하고자 하는 책이다.
정상가족은 말 그대로 전통적인 결혼제도에 의해 형성된 핵가족을 일컫는다. 여기서 벗어난 유형의 집단은 특히 한국사회에서 곧잘 '비정상'의 범주에 가로막히게 된다. 한부모가정, 미혼모가정 등이 비정상의 범주에 들어가고, 성소수자는 아예 결혼이란 '남녀의 결합'이라는 법적 판단에 의해 가족이 되지도 못하는 대표적인 '비정상'의 영역에 서 있다.
고모양 사건에서 부각되는 것은 가해자가 친부와 내연녀라는 사실이다. 보통의 사회인식에 기반하면 이미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다. 또한 언론 보도에 따르면 아이가 아픈데 병원에 데려가지도 않았고, 발목을 발로 밟는 등의 폭력이 지속되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분노하기 딱 좋은 상황이다.
그런데 기억을 되살려보면 '애는 때리면서 키워야 한다'라든가, '나도 맞으면서 자랐다'며 부모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경우도 많이 보지 않았나? 저자 김현경은 아동학대 사망사건 관련 토론회에서 나처럼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들의 사례를 소개한다.
누구나 아이를 한두 번은 때리는데 어디까지가 체벌이고 어디부터가 학대인지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느냐고 묻는 검사들, 체벌에 대한 인식전환을 요구하는 캠페인을 제안하자 체벌은 누구나 하는 거라고 그런 거 말고 학대를 다뤄보자고 말한 기자의 사례 역시 비슷하다. 왜 이 둘을 구분해 가면서 어느 정도의 폭력은 용인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지에 대해 김현경은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를 근거로 분석한다.
사소하다면 사소하달 수 있는 검사와 기자의 말을 들으며 나는 선량한 많은 이들이 정상과 비정상 사이의 금을 매우 쉽게 긋는다는 걸 깨달았다. '정상가족' 내에서 허용하는 체벌과 '비정상가족'에서나 일어나는 학대. 두 가지는 서로 다르고 섞이지 않는다고들 생각한다. 마치 정상과 비정상이 매우 동떨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중략) 많은 사람들이 앞에 예로 든 검사와 기자처럼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체벌과 학대는 동떨어져 있으며 그 사이의 경계가 뚜렷하다고 생각한다.
분명 고모양 사건에서 가해자인 친부의 잔인함을 비난하면서도 검사와 기자같은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본인들이 자의적으로 구분한 '폭행'(혹은 체벌)과 '학대'의 기준에 따라 선택적으로 분노하며, '학대가 아닌 행동'이라고 판단되면 얼마든지 훈육을 위해 할 수 있다고 정당화하곤 한다. 저자는 이런 태도를 '나는 언제든 너의 몸에 손댈 수 있다는 가르침', '나는 언제든 너를 통제할 수 있다는 권위주의적 메시지'로 규정한다.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는 정부 정책에도 큰 영향을 준다. 책에서는 박근혜 정부 시절이었던 2016년 3월의 사례를 소개한다.
당시 아동학대로 인한 비극적인 죽음이 잇따르자 아동학대 근절 원년으로 선포하며 정부는 '아동학대 방지대책'을 내놓는다. 그런데 아동학대가 빈번하게 일어날 수 있어서 지원을 확대하겠다는 '취약가정'의 범주에 한부모, 조손, 이혼, 다문화, 장애인 가정이 들어있던 것. 말그대로 '정상가족'이라면 학대가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안이한 생각이 정책에도 반영된 것이다.
폭력적인 가족주의를 넘어서
이렇듯 이 책은 가족문제에 대한 학문적 접근보다는 사회 전반에서 가족이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실제 사례와 통계를 통해 보여주고, 이것이 왜 문제일 수 있는지 규명하고자 한다.
이 책에서 가장 나에게 충격을 주었던 부분은 '일가족 동반자살의 불가능성에 대하여' 챕터다. 제목부터 벌써 '쎄~' 하지 않나. 요지는 이렇다. 언론에서 보도되는 부모와 자녀의 동반자살은 실제로는 부모가 자녀를 '살해'하고 본인은 자살을 한 것인데 왜 이것을 동반자살이라고 명명하는가 하는 지적이다.
여기에 문제의식을 느낀 저자는 동료들과 언론사 사회부에 동반자살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말아줄 것을 요청하는 의견서를 보냈는데 <경향신문> 등 일부 언론에서만 진지하게 의논을 했다고 한다. 또한 SNS에 이 글을 게재하였더니 반응이 의외였다고 한다.
이런 내용으로 "부모와 자녀의 '동반자살'은 없습니다. 자녀 살해 후 부모 자살만 있을 뿐입니다" 라는 기나긴 제목의 의견서를 25개 언론사 사회부에 보내고 페이스북에도 올렸는데, 예상외로 찬반이 열렬했다. 찬성과 동의가 많았던 것만큼 "그럴 수 밖에 없었던 부모 심정도 이해 못 하는 냉정한 의견"이라는 비판도 꽤 받았다.
이렇듯 자녀를 부모가 멋대로 다룰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이 무슨 일을 일으킬 수 있는지에 대해 아직까지 사회적으로 제대로 논의가 되지 않은 것 같다. 저자는 이를 젠더 문제와 비교해서 설명한다.
이제는 우리 사회가 성희롱을 '직장 내에서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기 위한 농담'으로 간주하지 않고 '대부분의 회사에서 다들 하니까 그 정도는 괜찮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아이들을 향한 폭력에서는 유독 관대하다는 것이다.
이런 폭력적인 가족주의를 넘어설 수 있을까. 사실 이런 문제는 대안을 제시하는 게 북잡하고 애매하다. 가족주의는 이제 가족 안에서만 작동하지 않고 '가부장적 권위'와 '위계에 의한 지배'를 위한 이데올로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 왜 문제가 되는지에 대한 사회적 논의와 함께, 정부 차원에서 가족 구성원 모두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정책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는 말도 있잖는가. 아이의 성장에는 공동체 차원의 고민이 필요한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