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이곳에서는 4일과 9일마다 오일장이 섭니다. 면소재지인 온수리장은 오일장 명맥을 유지하는 작은 시골장입니다. 이 장, 저 장 옮겨 다니는 장꾼들도 있지만, 주로 인근 마을 농민들이 장날에 자기네가 농사지은 농산물을 팔러 나옵니다.
겨울 장터가 한산하고 을씨년스럽습니다. 장꾼들 숫자도 얼마 안 되고, 물건 사러 나온 사람들도 많지 않습니다.
장터 한 구석에 할머니 네 분이 점심을 드시고 계십니다. 머리를 맞대고 오순도순 모여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장터 물건을 기웃거리다 말고 말을 걸어봅니다.
"할머니들 도시락 드시네! 차갑지 않으세요?""차갑지는 않아! 보온도시락이라 먹을만해!"각자 집에서 싸온 도시락 반찬을 풀어놓고 함께 드시는 모양입니다. 할머니들 옆자리에 도시락가방과 보온병이 있습니다. 보온병에서 따뜻한 국물도 꺼내 드시는 것 같습니다. 할머니 한 분이 말씀을 꺼내십니다.
"이래 보여도 진수성찬이야. 식당 밥 사먹는 것보다는 이렇게 나눠먹는 게 더 나아!"할머니 말마따나 여럿이 싸온 찬거리를 함께 드시니 그럴 만도 합니다. 김치, 된장국, 여러 밑반찬이 소박합니다.
언 몸을 녹이기 위해 피운 연탄 화덕에는 주전자 물이 끓어오릅니다. 어떤 할머니는 뜨거운 물에 밥을 말아 드시고 계십니다.
할머니들이 가지고 나온 물건을 구경합니다. 여러 가지 많은 것을 골고루 가져오셨습니다. 시금치와 같은 푸성귀도 있지만, 대부분 마른 것들입니다. 건고추를 비롯한 콩, 팥, 조, 수수 등 잡곡에다 집에서 정성들여 말린 무말랭이, 시래기도 있습니다. 강화도 속노랑고구마와 참기름, 들기름병도 보입니다.
할머니들 점심을 먹는 모습이 참 정겹습니다. 도시락 드시는 모습에서 학창시절에는 어머니가, 직장에 다닐 때는 아내가 싸준 도시락을 먹던 생각이 났습니다. 친구들 여럿이 모여서 도시락 까먹는 재미는 여간 아니었습니다.
가난한 어린 시절, 어머니가 싸준 꽁보리밥이 부끄럽기도 했지만, 어머니 정성이 담긴 반찬은 친구들한테 인기가 많았습니다. 그때 어머니는 국물이 흐르지 않도록 김치를 꼭 짜서 담고, 단골반찬인 단무지와 무장아찌를 한쪽에 넣었습니다. 어쩌다 멸치볶음과 계란찜은 최고의 도시락 반찬이었습니다.
아내도 나와 아들 딸 도시락 세 개를 쌀 때, 싫은 내색하지 않고 맛나게 싸줬습니다. 나중 학교 급식이 제공됐을 때 도시락은 추억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후딱 그릇을 비우신 할머니 한 분께 내가 물었습니다.
"할머니, 많이 파셨어요?""잘 팔리지 않아! 추워서 사람들이 많이 나오질 않잖아!""그럼 쉬시지?""쉬면 뭐해? 몸 움직이는 게 나아. 날 찾는 사람도 더러 있으니까!""난 곰피나 좀 살까 했는데, 없네요!""쇠미역? 우린 그런 것 없어! 저기 마트에나 있을라나?""그럼, 할머니, 이 시금치는 얼마에요?""이거 몽땅 3000원만 내! 데쳐 나물 무치든가 된장국 끓이면 좋아!"나는 할머니가 가져온 시금치를 모두 샀습니다. 수월찮은 양입니다. 싼 거래를 한 것 같습니다.
옆에 계신 할머니께서도 내게 말을 걸어오십니다.
"우리 잡곡도 좀 사지? 다 내가 농사지은 거야. 서리태, 팥, 밥에 놓아먹으면 맛있어!""할머니, 저희도 농사짓는 걸요. 팔아드리면 좋은데, 죄송해요.""하는 수 없지! 그럼 무시래기라도!"무시래기도 집에 말려놨다는 말을 하니 할머니는 실망스러워 하는 눈빛입니다. 물건을 사드리지 못해 공연히 죄송스러운 마음이 듭니다.
할머니들은 자식들한테 손 안 벌리고, 스스로 용돈이나 벌어 쓸 요량으로 장사를 하신다고 합니다. 몸 움직일 때까지는 일을 하고, 그래야 건강하다는 할머니들 이야기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집니다.
얼마 남지 않은 벌이로 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도시락으로 점심을 때우는 것은 절약과 검소함이 몸에 배인 정신일 것입니다. 예전 어머니께서 우리 키울 때의 마음도 그러하셨습니다.
아무리 그렇지만, 추운 장날 한데에서 도시락을 드시는 모습에서 애잔한 생각이 드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요?
식사를 마친 할머니께서 주전자에서 끓인 물을 따라 종이컵에 맛나게 커피를 마십니다. 내게도 한잔 권하는데 손사래를 쳤습니다. 물건도 많이 사드리지 못한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입니다.
나는 시금치가 담긴 까만 비닐봉지를 들고 돌아서며 할머니들께 인사를 건넸습니다.
"날 추우니까 감기조심하시고, 많이 파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