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나라 일본을 여행하다가 만난 인상적인 곳 가운데 하나는 숙박시설인 료칸(旅館)이 아닐까 싶다. 일본 특유의 정취와 문화가 담겨있는 독특한 공간으로 국내외 여행자들의 인기가 높다. 료칸 여행기 책이 나올 정도다. 도쿄에 있는 료칸 가운데 17세기 중반에 창업해 무려 300년이 넘게 영업하는 곳도 있다. 당시 도쿄가 이미 관광도시였다는 증거다.
이 시기를 '에도시대'라고 하는데 에도(江戶)는 도쿄의 옛 이름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에 막부(幕府)를 개창한 1603년부터 막부가 천황에게 권력을 넘겨준 1867년까지다. 일본 외교관 출신의 저자가 쓴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는 에도시대에 주목하는 책이다. 일본의 성공적인 근대화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여정의 기록이기도 하다.
흔히 일본은 1868년 메이지유신이 선포되고 급속한 근대화에 성공하여 국력을 키웠다고 알려져 있지만, 저자에 의하면 에도시대에 축적된 문화와 저력이 현재의 일본을 만들었단다. 이 시대만큼 일본의 역사에서 흥미진진하고 배울 것이 많은 역사가 없다고 주장한다. 게다가 에도시대는 한·중·일 동아시아 삼국의 근대화 운명을 가를 거의 모든 선행조건들이 결정된 시기였다고.
한국인에게 에도시대는 사무라이가 칼 차고 다니며 공포를 조성하고, 백성들은 그들의 눈치나 보며 벌벌 떨며 살았다고 알고 있는 때다. 하지만 에도시대에 이미 일본은 조선을 저만치 앞서가고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근대화를 위한 역량을 갖춘 에도시대
17세기 이후 일본의 출판문화는 엄청난 기세로 성장한다. 17세기 중반이 되면 200여 개의 출판업자가 경쟁하고, 18세기 중반이 되면 연간 1000여 종의 신간이 서점에 쏟아져 나오고, 19세기에 접어들면 거의 모든 국민이 책을 일상생활의 필수품으로 활용하는 '출판대국'이 되었다. 전근대 사회임에도 어떻게 이러한 기적과 같은 변화가 가능했을까? - 책 본문 중
에도시대는 한국인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생소한 시기다. 이 시기 한국의 교과서에 등장하는 일본은 임진왜란 때 납치한 도공이나 조선통신사에게 한 수 배우며 선진 문물을 습득한 문명의 변방국일 뿐이다. 학창시절 국사시간에 배운 것과 달리 책속에 펼쳐지는 에도시대의 문명과 성장이 놀랍다. 18세기 중반 에도는 인구 100만이 거주하는 왕성한 상업활동과 도시기반 시설을 자랑하는 세계 최고의 도시로 성장한다. 당시 한양 인구는 20만 명 정도였고, 파리는 50만 명이었다. 상수도 개통과 치수 사업, 택지 마련을 위한 매립 공사가 이뤄졌고, 공예업, 운수업, 외식업, 의상업과 향락업까지 다채로운 상업 활동이 전개됐다. 상행위의 중요한 기반인 화폐제도도 자연히 발달하게 된다. 유럽이 대항해시대에 경험한 이 과정을 일본은 에도시대에 밟아갔다. 당시 조선과 일본의 경제력 혹은 국력을 가른 것은 상업이지 싶다. 주지하다시피 조선은 상업과 이윤 창출을 가장 천한 일로 여겼다. 조선은 개국할 때 내건 사농공상의 가치와 신념을 끝까지 고수했다. 모네, 반 고흐 등 서양의 인상파 그림이 탄생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던 '우키요에'(일본전통회화), 연간 1000여 종이 넘는 신간이 나오는 대중출판물 시장의 형성, '의료(衣料)혁명'이라 불렸던 면직물의 보급으로 인한 의류산업 성장, 유망한 유통산업이 된 미소(일본된장)시장, 관광객들을 위한 전문숙박시설 료칸 등이 에도시대에 생겨난다. 경제와 예술면에서 일본을 풍요롭게 한 도자기 산업은 특히 눈길을 끌었다.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 부를 정도로 전쟁 통에 일본에 건너온 조선의 도공들에 의해 고급 도자기 기술이 전수되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 끌려간 도공들의 기술에 힘입어 일본은 이 시기에 유럽으로 도자기를 수출하게 된다. 당시 일본이 세계적인 도자기 수출국인 된 데는 몰랐던 사실이 있었다. 포로로 끌려온 도공들을 노예처럼 부리지 않고 장인 대접을 해주었다는 것. 끌려간 도공 가운데 묘비와 신사가 건립될 정도로 유명했던 이삼평(?~1655)은 도조(陶祖) 혹은 도자기의 신으로 추앙받았다.
한국은 왜 근대화의 문턱에서 일본에 뒤처졌을까
"에도시대는 당시 조선시대의 거울이자 동전의 양면으로, 이 시기를 보면 조선의 상황이 더 뚜렷하게 보인다. 그것이 주변국 역사를 공부하는 묘미다. 한국의 과거, 현재, 미래에 적용할 수 있는 통찰과 영감을 원하거든 <삼국지>나 <손자병법>이 아니라 에도시대 역사를 들여다보라." - 책 본문 중
저자는 이렇게 일본과 조선의 갈림길을 17세기로 소급한다. 에도시대 국가의 지배 영역 바깥인 시장을 활용하는 민간의 힘이 급성장해 근대화를 위한 동력을 축적할 수 있었다. 17세기~19세기에 축적한 역량의 차이는 서세동점(西勢東漸, 서구 열강의 동양 진출)의 시기에 서구 세력에 대응하는 역량의 차이로 이어졌다.
일본보다 늦었지만 조선후기 의미 있는 움직임이 있었는데 다산 정약용, 연암 박지원 등의 소수 학자들이 주창한 실학이다. 하지만 실학은 논의만 됐을 뿐 국가의 역량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전남 강진에 유배 중 500여 권이나 책을 쓴 정약용(1762∼1836)의 저술은 간행되지 못했다.
경제, 과학, 공학 등의 분야를 아우르는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지식인이자 천재라 불리는 인물을 조정은 활용하지 못했다. 다른 실학자들의 저서도 끝내 출판되지 못한 채 필사본으로만 전해지다가 일제 강점기 때인 1930년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책으로 나왔다.
에도시대에 발간한 일본 최초의 영일사전은 상징적이다. 1808년에 들어온 서양세력에 대한 막부 정부의 경각심은 외국어 학습의 동기가 되었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태(白戰不殆)'의 실천적 결과물로서, 영어를 번역해 만든 일본 최초의 영일사전을 만들게 된다.
이때 지금의 우리도 자연스럽게 쓰는 자유, 경제, 물리, 화학 등의 말이 탄생하게 된다. 개항 이후 이뤄진 일본의 급속한 근대화는 에도시대 지식인들의 고뇌가 담긴 '언어의 통로'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최초의 영한사전을 만든 이는 구한말 선교사 언더우드였다.
덧붙이는 글 | 신상목 (지은이) | 뿌리와이파리 | 2017-08-07
제 블로그(sunnyk21.blog.me)에도 송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