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PD연합회 30년, 방송민주화 기록을 담은 <6월항쟁에서 촛불혁명으로>라는 책을 재미있게 읽었다.
한국PD연합회는 1987년 6월항쟁 직후인 그해 9월 5일 1000여 명의 방송PD들이 '국민의 알권리와 표현의 자유 실현 그리고 풍요로운 대중문화 창달의 선도적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결성된 방송 PD들의 단체이다.
바로 이 책은 제목처럼 87년 6월 항쟁에서 2017년 촛불혁명까지 30년간의 한국PD연합회 활동 역사를 담았다. 정훈(전TBC)·정길화(MBC, 12대 회장) PD와 이채훈 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등이 집필을 맡았다.
지난 25일 오후 6시 엄지인 KBS아나운서의 사회로 '한국PD연합회 회장 이·취임식 및 30년사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행사에 참석한 모든 이에게 방송민주화 30년의 기록 <6월 항쟁에서 촛불혁명으로>(2018년 1월, 한국PD연합회)라는 책을 나눠줬다.
이날 체감온도 영하 20도의 한파를 뚫고 '출판기념회 및 송일준 31대 회장과 32대 류지열 회장의 연합회 이·취임식'에 참석했다. 광주MBC사장으로 임명된 송일준 31대 회장은 대학원 석사과정에서 함께 수학해 특별한 인연이 있다. 이날 송일준 31대 회장은 류지열 32대 회장으로부터 방송공공성 수호에 대한 굳은 신념과 방송문화창달을 향한 뜨거운 열정의 공로로 감사패를 받았다.
행사에는 언론개혁운동을 함께 했던 정길화 PD, 이채훈 PD, 최진용 PD, 이강택 PD, 양승동 PD, 황대준 PD, 오기현 PD, 추혜선 정의당 의원, 대학원을 함께 다녔고 광우병 방송으로 탄압을 받았던 송일준 PD, 임순혜 KNCC언론위원회 부위원장, 최성주 언론개혁시민연대 공동대표, 신학림 전 언론노조위원장, 김언경 민주언론시민연합 사무처장, 원로인 김종철 동아투위 위원장, 김광선 PD연합회 국장 등과도 반갑게 인사를 나눴고 함께 자리를 지켰다.
이·취임식에 앞서 열린 출판기념회에서는 김두관 의원, 기동민 의원, 추혜선 의원, 고삼석 방통위 상임위원 등의 축사가 이어졌다. 특히 한국PD연합회 '30년사 동영상(VCR)'이 눈길을 자극했다. 나눠준 책과 궤를 같이하고 있었다. 행사를 마치고 지하철 안부터 집과 직장에서 책을 틈틈이 꼼꼼히 읽었다. 언론개혁운동을 함께 했던 PD들의 이름과 얼굴도 간간히 보여 기뻤다.
류지열 한국PD연합회장은 30년사를 낸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사마천이 궁형의 치욕을 버텨가며 <사기>를 저술한 것은 역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조선시대 사관은 하루하루 정사를 기록해 조선왕조실록이라는 빛나는 사서를 후세에 남겼습니다. PD연합회 30년을 맞는 2017년은 6월 항쟁 30년이자 촛불혁명 원년입니다." - 서문 발간사 중에서
먼저 책은 우리나라에서 방송이 시작된 1927년부터 1987년까지의 미완의 역사인 방송 60년사도 언급했다. 일제강점기부터 미군정, 이승만 시대, 박정희 시대, 전두환 시대 등 지나온 60년의 미완의 역사를 전사(前史)로 다뤘다. 그 내용을 길지만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1927년 2월 16일 일제 강점기 경성방송국에서 송출된 첫 소리통(라디오)이 등장했고, 민중들은 소리통을 향해 '신기하다. 이 속에 사람이 들어 있느냐'라고 하는 사연도 적었다. 한 마디로 60년 방송의 역사는 당시 지배 권력에 의해 제작보다 유통, 작품성보다 상업성, 공익성보다 시청률이 중요한 시대였다.
1950년 6월 27일 대전에 피신한 이승만 대통령이 '서울을 사수하고 있다'라는 방송은 당시 국민을 기만하는 최악의 거짓 방송이었다. 박정희 시대 TV수상기가 보급됐다. 1974년 3월 신문사 최초로 노조가 결성됐고 그해 10월 자유언론실천선언이 발표된다. 언론사 최초로 광고해약사태가 발생했고, 동아일보 150여 명의 해직자중 24명의 PD들이 해직됐다. 전두환 시대는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이후 언론인 강제 해직과 언론 통폐합과 땡전뉴스로 점철돼 1982년부터 1986년까지 KBS 시청료 거부 운동이 전국에 걸쳐 불길처럼 일어났다. 전두환 정권 말기인 1987년 6월항쟁으로 6.29선언이 나온 후, 87년 9월 5일 광화문 프레스센터에서 한국PD연합회(초대 회장 이형모)가 결성됐고, 방송민주화를 위한 첫발을 내딛었다. 창립 결의문에는 '방송의 주인은 국민이고, 방송에 대한 국민의 신뢰 회복이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시급하고 기본적인 요건'이라고 밝히고 있다.
노태우 정권 시절 1988년 서울올림픽이 끝나고 5공 청문회가 진행됐고, 88년 MBC 다큐 <어머니의 노래>(연출 김윤영)와 KBS 대큐<광주는 말한다>(연출 남성우)는 87년 초부터 시작된 우리사회 숨 가쁜 변화(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4.13 호헌 선언, 이한열 군 최루탄 사망, 6월항쟁, 6.29선언, 방송노조 출범, 1987년 대선, 88올림픽, 5공 청문회 등)가 구체적인 프로그램형태로 나타난 결실이었다.
90년 1월 22일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결성에 맞춰 전격 이루어진 사건이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 등 3당 통합 정계 개편이다. 이후 KBS노조의 서기원 KBS사장 퇴진투쟁이 전개 됐고, 바로 이때 PD들은 92년 3월 총선과 12월 대선 공정방송을 위해 앞장섰다. 하지만 구체적인 결실을 맺지 못했다. 하지만 1997년 15대 대선에서 현대 민주주의와 텔레비전이 만나는 텔레크라시의 꽃인 TV토론이 이뤄졌다.
노태우 정권이 서영훈 KBS사장을 축출하고 서기원 사장을 내정하면서 활화산처럼 타올랐던 1990년 KBS 4월 투쟁과 PD수첩 사태로 촉발돼 노조위원장과 사무국장을 해고해 타올랐던 1992년 MBC 50일 파업 투쟁은 한국방송민주화운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1990년 7월 국회 방송법 날치기 통과로 민영방송시대가 열린다. 그해 11월 14일 주주총회를 열어 태영의 윤세영 회장이 SBS 대표이사로 선임되고, 91년 3월 20일 라디오개국, 12월 9일 TV가 개국된다.
1992년 12월18일 대선은 일부 언론의 당파적 행위가 극에 달해 이른바 '언권 선거'로 불렀고, 접전 끝에 여당의 김영삼 후보가 김대중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됐다.
김영삼 문민정부는 홍두표 KBS사장과 강성구 MBC사장을 임명했고, 이들은 대대적인 조직개편과 시청률 드라이브를 전개해 방송가에 파장을 일으켰다. 시청률이 저조하거나 경쟁 와중에 문제를 일으킨 연출자 경질·교체하는 일도 빚어졌다. 분노한 PD연합회는 '프로듀서의 총알받이화, 소모품화를 중단하라'는 성명을 발표했고, 이에 항의의 뜻으로 YMCA를 비롯해 20여 개 시청자단체가 시청거부 캠페인을 전개됐다.
95년 이른바 연예계 비리 사건은 여론재판으로 PD들에게 상처만 남기고 용두사미로 끝났다. 경찰수사를 비난하고 언론의 선정보도를 규탄하고 사건배후에 정치적 음모가 있다고 강변하면서 끝날 일은 아니었다. 이 사태로 인해 95년 4월 6일 프로듀서 윤리강령이 제정 발표됐다. 95년 8월 14일 PD연합회, 언론노조, 기자협회 등 언론 3단체는 '평화통일과 남북화해 협력을 위한 보도 제작준칙'을 공표했고, 3단체는 1995년 10월 '통일언론상'을 제정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97년부터는 방송의 정치적 독립을 위한 방송법 개정과 공보처 폐지, 신문 대기업과 외국자본 방송 진입저지 등을 위한 활동에 매진했다. 98년 6월 8일 방송현업인 1만여 명이 참여한 방송인총연합회가 결성됐고 이어 8월 27일 언론개혁시민연대(상임대표 김중배)가 결성되면서 언론개혁 대장정에 돌입했다.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0년 6월 15일 평양에서 6.15남북공동선언을 발표했다. 2001년 하반기부터 HDTV 디지털방송이 개막을 했고, 6.15선언 1주년을 맞아 2001년 6월 14일부터 17일까지 남북 방송교류의 서막을 알리는 <창극 춘향전> 남북합동 공연이 평양에서 열렸다. 이후 KBS <백두에서 한라까지> MBC <MBC스페셜>, SBS <평양에서의 7일>(여출 오기현)과 <조경철 박사의 북한 귀향기-52년간의 이별, 3일간의 만남>(연출 오기현) 등이 방송됐다.
이 시기 언론개혁이 화두로 떠올랐고 매체비평이 활발해졌다. 2001년 9월 10일 MBC 노사가 방송사 최초로 편성규약을 합의해 공표했다. 편성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보호하기 위한 편성위원회를 두기로 했다. 2004년 3월 12일 오전 11시 56분 16대 국회에서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편파적으로 탄핵에 몰두한 방송은 탄핵역풍으로 지탄을 받기도 했다.
2005년 11월 22일 MBC <PD수첩> '황우석 신화와 난자 의혹' 프로그램 방영으로 조중동을 비롯한 주요 신문들은 황우석 교수를 대변하기에 바빴다. <PD수첩>과 PD저널리즘의 융탄 폭격이 가해졌다. 결국 '논문은 조작됐고, 줄기세포는 없다'로 결론지었다.
2006년 3월 1일 열린 18회 한국프로듀서상 시상식 최고대상에 이를 보도했던 MBC <PD수첩> 최승호 CP와 한학수 PD에게 돌아갔다. 여론의 뭇매 속에서도 PD저널리즘의 정신을 놓지 않고, 끝까지 진실을 추구했던 <PD수첩> 제작팀을 향한 대한민국 PD들의 격려이자 존경의 표시였다.
2007년 5월 노무현 정부는 금품 수수, 관언 유착 등 기존 기자송고실 관행을 없애고 통합브리핑 룸으로 운영하겠다고 발표했다. 바로 '취재지원 시스템 선진화 방안'을 확정했다. 당시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언론개혁시민연대, 참여연대, 민주노총 전국공무원노조, 전국언론노조 등 시민사회노동단체들은 지지의사를 표시했다.
한국기자협회, 한국인터넷기자협회, 한국PD연합회, 전국언론노조 등 대표들은 지지의 뜻에 무게를 두었다. 특히 한국인터넷기자협회는 강한 지지의 뜻을 표시했고, 한국기자협회 회원사들의 반발은 만만치 않았다. 당시 PD연합회는 기존의 기자실이 안고 있는 폐해와 부작용을 알고 있었지만 언론이 추구하는 비판기능과 알 권리를 침해하거나 정부와 언론의 갈등으로 비화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모호한 입장을 폈다.
그해 6월 노무현 대통령은 한국기자협회 정일용 회장, 한국PD연합회 김환균 회장, 한국인터넷기자협회 이준희 회장, 전국언론노조 최상재 위원장 등 언론 4단체장들과 TV 공개토론을 했고 큰 틀에는 동의했지만, 한국기자협회 기자들의 반발로 최종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1997년부터 2007년까지는 김대중·노무현 정부시대였다. 남북화해무드가 조성됐고, 2002년 월드컵 열품, 정권과 야당 갈등, 대통령과 보수언론의 갈등이 점철된 시대였다.
2007년 12월 19일 17대 대선에서 승리한 이명박 정부부터 박근혜 정부까지는 방송 시련의 시간이었다. 진보정권 10년 만에 수구정권 교체로 이어졌다. 불통정권으로 불렀고 방송통신위원장 최시중은 무소불위의 권한을 행사했다. 방통대군으로 불린 이유였다.
<PD수첩> 광우병 보도로 인한 제작진들에게 구속과 탄압이 이루어졌고, 정연주 KBS사장과 엄기영 MBC 사장의 몰아내기가 이뤄졌다. 경제 진단 글을 올린 미네르바가 인터넷허위사실 유포로 구속됐다. 진보정권을 이끈 노무현 대통령이 2009년 5월 23일 서거했고 그해 8월 18일에는 김대중 대통령이 서거했다.
미디어법 강행으로 종편이 등장하고 MB측근인 김인규 KBS사장과 김재철 MBC사장이 입성했다. 불공정한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국민의 눈총을 샀다. 블랙리스트의 시발은 2010년 방송인 김미회씨였다. KBS 임원회의에서는 <다큐 3일> 내레이션을 한 김미화씨를 문제 삼았다. 천암함 침몰 특집방송에 인터뷰한 명진 스님도 문제를 삼았다. 이병순 사장이 들어선 이후 KBS에서는 윤도현, 정관용, 김제동 등 정권에 밉보인 인사들에게 물갈이를 단행했다.
4대강 보도는 금기가 됐고 4대강, 천안함, 블랙리스트, 삼성공화국 등 소재, 주제 표현의 성역이 생겼다. 방송심의제도는 사실상 사전검열이었다. 권언유착의 산물인 종편사업자 선정은 MB 언론장악의 완성판이었다. 종편의 안착을 위한 차별적 규제와 특혜는 방송환경을 철저한 자본의 논리로 길들이게 했다. 18대 대선에서는 국정원 선거개입이 이루어졌다.
이명박 정권에서 박근헤 정권으로 이어진 수구정권은 법과 제도를 악용해 민주주의와 언론자유를 능멸했다. 방송통신심의위 방송심의규정 9조, 11조는 이중검열 장치라는 비판에도 아랑곳하지 않았고, 끝내 '방송통신심의위원회를 해체하라'는 PD연합회의 성명이 발표되기도 했다. 2015년 고영주 방문진 이사장의 문재인 새정치국민연합 대표에 대한 '공산주의 발언'과 MBC 경영진들은 '해고의 증거가 없다'는 최승호 PD와 박성제 기자의 해고를 강행했다.
2016년 9월 5일 오기현 회장은 SBS 출신 최초의 연합회장으로 당선됐다. 2016년 10월 24일 박근혜 대통령은 국회에서 개헌논의를 발표해 위기국면을 전환하려고 했다. 이날 저녁 8시 JTBC <뉴스룸>이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버린 태블릿 PC를 보도했다.
성형중독, 의상실, 비아그라, 길라임 등 온갖 해괴한 뉴스와 가십이 연일 화면과 지면을 도배했고, 분노한 국민들은 연인원 1700만 명이 촛불시위에 동참했다. 촛불여망은 국회 탄핵소추 가결과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탄핵으로 이어졌다. 이로 인해 2017년 5월 문재인 정부가 출범했다.
MBC PD 해고자 최승호는 <자백>과 <공범자> 등의 영화를 선보이면서 영화감독으로 데뷔했다. 김장겸 사장 체제에서도 MBC는 멈추지 않고 추락의 길로 갔고, 2017년 9월 노조는 김장겸 사장, 고영주 이사장 퇴진 총파업에 돌입했다. 같은 날 KBS노조도 고대영 사장, 이인호 이사장 퇴진 총파업 투쟁에 돌입했다, 시민사회단체가 주최한 공영방송 정상화를 위한 '돌마고 불금파티 집회'도 이어졌다. 당시 MBC 김민식 PD는 페이스북 라이브방송을 통해 '김장겸은 물러나라'고 외쳐 화제가 되기도 했다.
결국 MBC는 최승호 사장 체제가 들어서면서 공영방송으로 탈바꿈 중이고, 현재 KBS는 이인호 이사장 사퇴와 고대영 사장 해임으로 공영방송 정상화를 눈앞에 두고 있다. 돌마고[돌아오라 마봉춘(MBC) 고봉순(KBS)]의 재건을 놀이고 있는 것이다. 양대 공영방송 노동자들이 방송의 공정성과 독립성을 확보하기 위해 온몸을 던져 투쟁을 하고 있을 때, SBS노조는 2017년 10월 13일 사장 임명동의제에 합의했다. 대표이사장을 임명할 때는 SBS 재적인원 60%이상 반대를 하면 임명을 철회하는 제도이다.
이외에도 한국PD연합회 30년사를 다룬 <6월 항쟁에서 촛불혁명으로>는 '우리 PD협회 소개'를 소재로 CBS, BBS, OBS, 한국경제TV, 아리랑 국제방송, 지역방송 울산지부, MBC플러스, 경인방송 등 PD협회를 소개하고 있다. 특별 섹션으로 '고 박환성·김광일 PD가 남긴 과제-독립PD협회의 2017년을 돌아보며-'를 다뤘고, 특별좌담으로 '지상파 3사 시사·교양 PD가 바라보는 촛불정국'을 통해 촛불혁명은 공영방송 정상화로 마무리해야 할 언론 혁명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또한 '고 이한빛 PD를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주제 좌담을 통해 드라마 제작현장에서 생각하고 실천한 일들을 정리했다. 또한 '6월 항쟁 30년, PD연합회 30년' 좌담을 통해 촛불 혁명과 PD연합회의 미래를 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