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보강: 2월 7일 오후 5시 20분]서울 압구정동 구현대아파트를 10년째 지키고 있는 경비원 이정익(가명·63)씨는 5일 용역업체 D사와 근로계약을 맺었다.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로부터 오는 9일부로 해고 통보를 받은 이들 94명 가운데 약 20여 명의 동료들은 일터를 떠나기로 결정했다.
이씨는 새로 생긴 직책 '관리원'을 자임했다. 주차 관리, 택배 보관, 재활용품 분리수거, 청소, 제설 작업 등을 도맡는 일이다. 지난 1일 대표회의는 관리사무소가 낸 '경비원 및 관리원 운영 안내' 공고문을 통해 경비 인력의 수를 크게 줄여 24시간 격일 근무하는 순찰조원을 28명 두고, 3조 3교대 근무하는 관리원을 70명 간접 고용하겠다는 계획을 알렸다.
바뀐 편제는 이달 26일부터 본격 적용된다. 집집마다 안내문이 날아들었다. 현행 경비원 근무 제도 변경을 설명하는 게 주된 내용이란다. 6일 구현대아파트 단지에서 인터뷰에 응한 주민들은 입을 모아 "이번 경비원 해고 사태의 제일 큰 책임은 대표회의에 있다"고 성토했다.
실질적 경비역 '순찰조원' 수는 28명 불과61동 근처 인도를 지나던 조영수(가명·52)씨는 "입주자대표회의가 주민들의 의사는 제대로 물어보지도 않은 채 독단적으로 결정을 내렸다"며 "신문을 읽고 나서야 (이 사실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옛날 아파트라는 점에서 도둑이 활개 치지 않을까 두렵다"며 "경비 용역업체의 간접고용이 주민들의 편익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타당성 분석 평가를 해서 주민들한테 알려야 하는데 그러한 과정은 없었다"고 말했다.
입주 6년 차 주부 김지윤(가명·40)씨는 "입주자대표회의는 원래 그렇게 일방적으로 업무를 추진한다"며 혀를 찼다. 김씨는 "입주자대표회의와 관리사무소가 지출을 약간만 줄이면 경비원들을 계속 고용할 수 있다고 들었다"며 "차라리 관리비를 더 내서 경비원 월급을 올려주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을 자르는 건 원치 않는다"고 밝혔다.
기실 2014년 18대 입주자대표회장 선거에 이어 2016년 19대 선거 때도 부정선거 시비가 붙었다. 잡음이 끊이질 않으니, 대표회의를 둘러싼 주민들의 불신이 팽배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파트 관리사무소장과 입주자대표회장이 운용하는 예산 액수만 한 해 80억 원에 육박한다. 의심의 눈초리를 쉬이 거둘 리 없다.
78동 주차장에서 만난 허준상(가명·64)씨는 "많은 주민들이 경비원 해고에 반대했는데 동대표들의 뜻이 관철됐다"며 "입주자대표회장과 동대표들이 짬짜미해서 용역회사를 끌어들인 게 혹시 돈과 관계된 것 아니냐"고 되물었다.
주민들은 그렇지않아도 심각한 주차난이 가중될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단지 입주민들의 차량을 닦으며 생계를 잇는 염종준(가명·70)씨는 "35년 전만 하더라도 한 동에 차가 20대 정도 있는 수준이었다"며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지하주차장이라도 조성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주부 김지윤씨는 "퇴근 시간대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댈 만한 공간이 없어 이중주차를 하는 차들이 많다"며 "바쁜 아침에는 부득이 경비원이 차 열쇠를 갖고 다니며 일일이 차량을 빼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관리원 체제로 가면 불편이 예상된다"는 의견을 냈다.
경비원 이정익씨도 이러한 주장에 공감했다.
"앞으로 3교대 근무제로 운영되면, 한밤중 경비초소에는 사람이 없을 거예요. 아침 7시에 출근하고 밤 10시에 퇴근하는 거니까요. 밤늦게 차를 운전하려면 이제 본인들이 나와서 해야겠죠.""밥 먹다가도 숟갈 내려놓고 밖으로"
애초 대표회의는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인건비 부담이 늘어나는 것을 덜겠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본질은 다른 데 있었다. 휴게시간이 보장되지 않는 경비원의 처우를 둘러싼 노사 갈등이 핵심 원인이었다.
지난 2015년 경비 노동자의 최저임금 보장 범위가 90%에서 100% 수준으로 올랐다. 그러자 대표회의 쪽에선 경비원들의 임금 상승률을 낮출 요량으로 24시간의 근무 시간에 6시간의 휴게시간을 포함했다. 그러나 경비원들은 발 뻗고 편히 쉴 수 없었다. "밥 먹다가도 주민이 급하다고 하면 숟가락을 내려놓고 초소 밖으로 나가는 직업"이라는 푸념 소리가 맴돈다.
이정익씨의 근무 초소. 오후 1시를 앞뒀지만, 엄연히 점심시간이자 휴게시간이다. 인터뷰하는 와중에 대뜸 이씨가 창문 너머를 살폈다. "아저씨!" 외침이 들렸다. 그는 뒤편 벽에 붙은 철제 보관함에서 열쇠 하나를 탁 집어 들었다. 80여 개의 열쇠들이 대롱거렸다.
"앞에 차가 막고 서 있어서요. 도와주세요."한 입주민이 청하자, 이씨는 주차장 복판에 서 있던 시커먼 K7 승용차에 올라탔다. 차는 뒤로 두세 걸음 물러섰다. 그제서야 흰색 SUV가 길을 나섰다.
이씨는 "우리 동 주민들의 95%가 차 열쇠를 맡겨놨다"며 "주차 공간이 없어 바깥 도로변에 대는 차들은 나중에 구청의 단속에 적발돼 과태료를 물기 때문에, 한밤중 놀이터에도 차를 밀어 넣을 정도로 빼곡하게 대리 주차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아파트 주차장에 비싼 외제차들이 많아서 밤에 눈비가 올 땐 사고가 나지는 않을까 가슴이 조마조마하다"며 "만일 사고라도 났다 하면 차주가 누구냐에 따라서 내가 손해 배상 책임을 뒤집어쓰느냐, 조금이라도 덜 지느냐, 혹은 아예 책임을 면하느냐가 결정된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경비 노동자들은 휴게시간에도 일을 하고 있으니, 차라리 임금이라도 더 달라고 작년 고용노동부에 진정서를 냈다. 하지만 돌아온 건 대표회의의 '경비원 전원 해고 통보'와 '경비 업무의 용역 전환 방침'이었다.
경비원 "우리는 완전히 졌다"
지난해 10월에 가결된 결의안에 맞서 경비원들은 서울중앙지방법원에 결의안 효력 정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하지만 사법부는 이를 각하했다. "경비원들은 아파트 입주민이 아니기" 때문에 대표회의의 결정에 제동을 걸 자격이 없다고 본 게다.
대표회의 등 일각에선 "주민들이 경비원에게 팁을 줬으니, 사실상 경비원들이 수당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주장을 펴며 노동청 등 관계 당국에 호소한 바 있다. 이를 두고 경비원 이씨는 "누가 나더러 담뱃값 조로 팁을 준다 해서 그 사람만 관리하는 줄 아느냐"며 "팁을 주지 않는다 해서 여태까지 주민들 차량을 대리주차하길 거부한 적 결코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새해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이 이곳을 찾아 경비원들과 면담할 것이라는 보도가 나왔지만 '최저임금 인상'에 얽힌 문제가 아니라는 이유로 무산됐다. 이씨는 "용역업체 계약 단계로 넘어간 이상 지금은 싸울 여지가 없다"며 "우리들은 완전히 패배했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아무리 청와대고 노동청이고 현장에 나와서 좋은 이야기만 해봐야 소용없어요. '사이좋게 잘 합의하라'는 권고뿐이잖아요. 힘으로써 '하지 말라'고 강제하지 않는 이상 우린 상대가 진행하는 걸 막을 도리가 없습니다."고용불안은 여전... 아파트엔 냉기가 돈다일터에 남은 자들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이다. 대표회의는 그들에게 '전원 고용 보장'을 약속했다. 하지만 못 미덥다. "1년이 지난 뒤에 판단해서 더 줄일 수 있다"는 대표회장의 2017년 12월 21일 자 회의록상 발언 때문이다.
다른 경비원 강주형(가명·59)씨는 "아무래도 장기적으로 우리들 머릿수를 줄여야 용역 업체가 마진을 먹기 수월할 것"이라며 "고용 보장이 확실치 않아 여전히 불안하다"고 말했다. 강씨는 "어떤 회사는 마음에 들지 않는 경비원을 갖다가 거주지와 멀리 떨어진 의정부나 동두천 지역으로 발령 내더라"며 "일하면서 손해를 볼 수도 있지만, 먹고 살려면 (용역 업체와) 계약하는 수밖에 없다"고 낮은 어조로 귀띔했다.
기자는 아파트 관리사무소를 통해 입주자대표회장과 접촉을 시도했다. 관리사무소 측은 "현재 입주자대표회장은 어떤 언론과도 만나지 않고 있다"고 답했다.
이날 수도권 전역엔 맹추위가 엄습했다. 서울을 대표하는 부촌(富村), 압구정 구현대아파트에 냉기가 돈다. 경비원이나, 주민이나 마음 구석에 쌓인 불안감이 증폭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