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이 돌아올 때마다 주변 지인 분들의 투정 섞인 불만들을 많이 듣는다. 특히 여성일수록 더하다. 2016년 기준으로 통계청에 따르면 가사노동을 남편이 주도하는 경우가 3.9%일 정도로 가사노동의 편중이 심한데 친척끼리 모인 자리에서도 여전히 잡다한 일거리는 여성의 몫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부끄럽게도 나는 여성주의를 접하고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처지가 어떠한지 여러 경험을 통해 이해하고 공감하는 노력을 꾸준히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명절날 여자만 노동을 하는 분위기를 바꾸지 못했다.
사실 그게 쉬운 것은 아니었다. 장남이다 보니 의무가 따라왔다. 처음으로 전을 다 부치고 나서 성묘를 다녀오겠다고 자신있게 말했던 날은 된통 혼만 나고 그 자리를 떠나야 했다. '네가 전을 왜 부치냐'라는 핀잔은 덤이었다.
그 대신 나는 아버지가 주도하는 제사를 잘 봐두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나중에 그걸 내가 해야 한다니까. '장남의 의무'는 외가와 친가에서 동일하게 작동한다. 주방에 들어가 다른 걸 한 것도 아니고 소반을 옮기겠다고 하는 그 행동마저도 외가에서는 저지 당했다. 우리가 하면 될 것을 왜 하느냐고. 내가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외가는 밥상을 분리한다. 때로는 남녀로, 혹은 노소로.
각자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투쟁을 생각하다사실 그래서 여성만 일하는 집안 분위기를 바꾸는 경험을 성공적으로 해낸 남성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에겐 다소 비현실적으로 들렸다. 특히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분들의 경험담을 즐겨 읽지만, 유감스럽게도 사적 공간에서 투쟁을 성공적으로 치른 남성들은 기혼이거나 부모에게 반드시 의존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의 경제력이 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하다 못해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그 싸움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장남'이었기 때문에 집에서도 시간 날 때마다 하는 설거지를 명절 때는 줄곧 저지당하곤 했다, 굳이 내 위치에서 할 필요가 없는 일이라는 무언의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달까.
이번 명절에는 사정이 있어 가족 모두 집에 머무르기로 했다. 식탁에는 전과 튀김이 올라왔다. 처음엔 설마 이걸 어머니가 직접 부쳤나 싶었는데, 알고 보니 마트에서 사온 것이다. 명절의 핵심적인 노동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직접 부쳐먹는 것만큼 맛이 꽤 훌륭했다. 물론 이런 날은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먼 거리를 달려서라도 당연히 명절에는 제사를 지내고 성묘를 하고 친척들을 만나야 한다는 암묵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위에서 말한 '지위를 이용한 사적 투쟁'으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늘 고민하던 차에 '마트에서 사온 전'이 큰 영감(?)을 주었다. '왜 여자들만 요리하고 상 차리냐'라는 말, 지난 세월 동안 지속되어온 큰 질서를 깨는 말을 좋아하는 어른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명절노동의 당사자들이야 고마워하기는 하겠지만 차린 음식 먹기만 하는 일부 남자 어른들 - 하필이면 그런 사람들은 나이가 많아서 목소리를 크게 낼 권력이 있는 경우가 많다 - 의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만들어 먹기 귀찮으니까 처리하기도 쉽게 명절음식은 사서 먹자, 란 말이 어떤 효과를 일으킬지 정말 궁금하다.
다음 명절때 꼭 해볼 생각이다. 해야 할 노동을 점차 줄이다 보면 각자에게 부과되는 부담을 줄이거나 나눌 수 있을 거라고 본다. 제사도 그렇게 줄여나가야 한다. 실제로 사먹은 전이 맛있길래 어머니한테 '이렇게 사먹어도 맛있지 않느냐 다음부터 그만 만들고 사서 먹자'라고 하니까 진지하게 생각해보겠다는 답변을 얻었다.
정말 다음부터 못해도 상관은 없다. 내 위치에서 바꾸어나갈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생각은 계속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