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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에서 처인성을 바라본 모습. 마치 사람 머리 위의 머리카락이 하늘로 자란 듯한 모습이다.
▲ 처인성 원경 도로에서 처인성을 바라본 모습. 마치 사람 머리 위의 머리카락이 하늘로 자란 듯한 모습이다.
ⓒ 홍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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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멸적 몽골침입기의 드문 성공 사례, 처인성 전투 

우리 역사에 숱한 전쟁이 있었지만, 그중 가장 파괴적이고 괴로웠던 전쟁은 언제였을까. 상당수의 전문가들은 몽골 침입기를 지적한다.

이유는 여러 가지다. 우선, 기간이 길었다. 몽골이 처음 침략한 1231년부터 강화가 성립하는 1259년까지 약 30년에 걸친, 단일 전쟁으로는 가장 긴 전쟁이었다. 둘째는, 전 국토가 몽골군에게 유린당했다. 몽골군은 고려의 지배층이 강화도로 천도한 이후 거의 무주공산이 된 국토를 마음껏 누비며 주기적으로 짓밟았다.

셋째는 몽골군의 성격 때문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군대로 평가받는 몽골군은 가장 잔인하고 약탈욕도 극대화되어 있으며, 상대방의 문화와 전통, 기존의 체제를 전혀 존중하지 않았다. 점령 이후의 정치적 지배를 고려하지 않았기에 필요하면 부수고 초토화시켰으며 망설임도 없었다. 침략 당한 쪽에서는 악몽일 수밖에. 그래서 유럽인들은 이들을 '타타르(Tatar)'라고 불렀는데, 그 뜻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지옥의 악마'이다. 

넷째는 지배층의 무책임이다. 정면 대결로는 몽골군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최씨 정권은 강화도로 천도하고 장기전으로 나갔지만, 그저 버티기 이외의 다른 전략이 없었다. 정예 병력으로 강화도만을 철저히 지켰을 뿐, 육지로 나가 몽골군과 정면 대결을 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세금은 꼬박꼬박 걷어갔으니 '의무를 다하지 않고 권리만 행사'한 나쁜 사례를 남겼다. 더구나 조선시대에 간간이 등장했던 민간인 부대, 의병조차 없었다. 결국 최씨 정권 말기에는 정권에 반대하는 봉기가 일어나거나 몽골에 자진 항복하는 지역과 사람들이 늘어났다.

대몽항쟁기는 약 30년 동안 버티고 항복하지 않았기에 주권을 잃지는 않았다며 고려인의 기개를 높였다 하지만, 국가가 주도하고 민들이 호응하여 장기적 전투를 벌이며 버틴 것이 아니었다. 그 실상은 정부가 섬에 들어가 방어를 포기하고 백성을 방치한 가운데, 파멸적인 공격과 한계를 넘은 주기적인 약탈 속에서 전혀 보호받지 못한 민들이 희망도 없이 고통스런 나날을 보낸 최악의 암흑기였다.

청산별곡의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얄라' 같은 의미 없는 후렴구가 반복되는 작품들이 등장한 게 우연이 아니다. 제정신으로는 살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무성한 나무들이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솟아 있다. 이곳에서 당대 최강의 몽골군 총사령관 살례탑이 사살되었다.
▲ 처인성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무성한 나무들이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솟아 있다. 이곳에서 당대 최강의 몽골군 총사령관 살례탑이 사살되었다.
ⓒ 홍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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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결과가 뻔한, 희망 없는 전쟁 중에도 고립된 전투를 벌였던 몇몇 장군이나 지역민들의 승리와 성공 사례가 남아 있다. 불가능해 보였던 전투의 성공 사례들을 보면, '국가 방어'를 내세우면서도 실제로는 '권력의 유지'를 도모했던 최씨 정권이 좀 더 대국적인 차원에서 정권의 명운을 걸고 앞장서서 지도력을 발휘했다면 희생을 줄이고 효율적인 전쟁을 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개별적인 승리의 사례들 중 가장 성공적인 것이 처인성 전투였다. 몽골의 2차 침입 당시, 이름 없던 승려인 김윤후가 정규병도 아닌, 지역민들을 이끌고 몽골 주력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여 총사령관 살례탑을 사살한, 역사에 남은 빛나는 승전이었다. (살례탑을 살리타, 살리타이, 사르타크 등 여러 명칭으로 부르고 있어 통일된 이름이 없으므로, 편의상 한자어 그대로 표기하였다)

처인성 현장에서 상상하는 처인성 전투

한국사 교과서에도 잠깐 등장하고 비교적 대중들에게 알려진 전투이지만, 정작 그 전투의 현장이 어디인지를 아는 사람은 드물다. 이름부터 낯설게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알고 보면 이 지명은 경기도 용인시의 구(區) 이름에 살아 있다. 용인에는 모두 세 개의 구가 있는데, 기흥구, 수지구, 그리고 처인구이다.

수지구와 기흥구에 비해 처인구는 상대적으로 도시화가 덜 되어 있다. 한마디로 대형 아파트 단지가 적고 인구도 적다. 이미 2017년에 시 인구 100만 명을 돌파한 대도시지만, 처인구에는 시골 풍경이 남아 있는 곳들이 있다.

처인구의 이름을 낳게 한 처인성도 그런 곳이었지만, 이 골짜기에도 개발의 바람이 불어 처인성 앞으로 4차선 도로가 건설 중이고, 옛 처인 부곡 주변으로 남사 아곡1도시의 이름으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있다. 이미 과거의 한적한 시골 풍경이 아니다. 아마 급격하게 변할 것이다.

이 처인성은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는 북쪽의 산줄기가 동서로 갈리면서 흘러내려오는 서쪽 산지의 끝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성 앞으로 작은 벌판이 있지만, 그리 넓지는 않으며, 오히려 주변 산줄기들이 길게 내려가 감싸고 있어 좁은 분지 지형을 이룬다.

처인성 북쪽에 처인부곡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지금은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있다.
▲ 처인성 내부에서 본 처인부곡 추정지 처인성 북쪽에 처인부곡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지금은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있다.
ⓒ 홍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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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때는 이 처인성 뒤편에 처인부곡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동탄에서 들어와 용인시 이동면으로 이어지는 82번 지방도로에서 북쪽 골짜기로 들어가는데, 예전에는 이 길가에서 처인성과 마을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개발 때문에 눈앞이 훤해져, 지방도로에서도 처인성이 보인다.

즉, 개발되기 이전 처인성 골짜기는 버스도 들어가지 않는 한적한 산골이었다. 주변 산들이 그리 높지는 않지만 최근까지도 주요 교통로가 비껴갔던 시골 동네였다. 거의 마지막까지 남은 용인시의 산골 동네였던 셈.

그러다보니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처인성도 거의 방치되어 있었다. 기념비야 진작에 있었지만, 마을 풍경도 그렇고, 관리 상태도 그렇고, 홍보도 안 하고 있었던 조용하고 평범한 골짜기의 작은 토성이었을 뿐이다. 흙으로 쌓아올린 성이므로, 산 위에서 내려다보는 석성(石城)과 같은 위용도 없었으니, 기념비만 아니면 그 역사 속 승전의 현장이라는 것도 전혀 몰랐을 것이다.

처인성 바로 아래에는 이곳이 처인성임을 알리는 안내판과 처인성 승첩 기념비가 있다. 돌로 쌓은 흔적이 없는 순수한 토성으로, 양쪽으로 돌아 올라가는 길이 있다.

고도 70m 높이에 자리한 처인성은 전체가 직사각형에 가까운 모양으로, 둘레가 약 400m 정도이다. 성벽을 따라 나무들이 울창하게 서 있고, 성 안쪽에도 나무들이 촘촘하다. 성벽을 따라 한 바퀴 돌면 10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이 정도면 규모가 상당히 작은 성이다.

이곳 처인성에서 몽골의 2차 침입이 절정에 이른 1232년 12월 어느 날, 역사에 남을 전투가 벌어졌다.

여러 전쟁사가들이 지적했지만, 처인성은 정규군이 아닌, 김윤후를 중심으로 한 일부 승려와 처인부곡민들이, 총사령관이 이끄는 몽골군 본대와 정면 대결을 할 만한 입지나 규모가 아니다. 몽골군 부대가 맘먹고 공격하면 제대로 방어해낼 만한 지형적 이점이 없다.

그리고 처인부곡은 특수행정구역이다. 천민은 아니었지만, 일반 군현에 비해 차별대우를 받았던 고장이다. 이들이 고려를 위해 목숨을 걸고 몽골군을 막아내야 할 이유는 별로 없다. 자기 자신과 가족의 목숨을 지켜야 하는 절박한 심정이었겠지만, 객관적 상황이 워낙 열악했다.

몽골군이 이 골짜기에 들어올 만한 합리적인 이유도 애매하다. 최근까지도 한적한 시골 마을로 남아있었을 정도로 주요 교통로에 자리한 요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조선시대에 군창이 남아 있다는 기록이 있고, 임진왜란 때 관군이 처인에 주둔한 왜군과 싸워 처인을 탈환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 때부터 군량미를 저장한 제법 큰 창고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당시 상황에 대한 대략적인 추정이 가능하다. 주요 교통로나 요지도 아닌 처인성 골짜기에 몽골군이 들어온 이유는 식량, 곧 군량미 때문일 것이다. 몽골군의 약탈적 속성도 이곳에 들어온 이유 중 하나겠다. 따라서 주민들이나 군대가 다수 주둔한 요지의 성을 함락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므로 굳이 대규모 부대를 동원할 필요는 없다. 골짜기나 벌판의 규모로 보면 몽골군이 대규모로 동원될 수도 없다.

만약 몽골군이 약탈할 만한 식량이 꽤 필요한 상황이었다면 총사령관이 직접 나선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실제로 이 즈음 몽골군이 인근의 경기도 광주성을 공격했다가 함락시키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이 처인성 공격 직전의 상황이라면 식량이 상당히 필요하지 않았을까)

차라리 양쪽 정규군이 정면으로 맞부딪히는 상황이라면 사령관이 전면에 나서지 않고 뒤에서 지휘를 했을 텐데, 별 크지도 않은 작은 성에 쌓인 군량미를 약탈하는 일이라 자신이 직접 약탈해서 먼저 차지하려 했을 수 있다. 그리고 직전 광주성 전투에서 함락에 실패했다면, 손쉬운 승리와 약탈을 통해 지휘관으로서의 체면을 세울 필요도 있었을 것이다. 결국 방심한 것이다.

이때 처인성에는 김윤후라는 승려가 -아마도 여러 명의 다른 승려들과 함께- 전투를 지휘하고 있었다. 약탈을 목적으로 덤비는 군대는 어느 정도 규율이 흩어질 수 있다. 더구나 상대의 숫자가 적고 방어 능력이 약하다고 판단되면 더욱 그렇다. 그러니 먼저 차지하려고 성급하게 덤빈다. 하물며 약탈이 일상인 몽골군이야.

아마도 전투를 직접 겪지 못한 부곡민이 다수였을 처인성 방어군 입장에서 이들을 정면 상대하는 건 자멸을 초래하는 것 뿐. 그렇다고 항복하면 몽골군이 순순히 살려둘지도 알 수 없는 상황. 그저 소소한 저항 정도로 전멸할 운명이었을 것이다. 몽골군도 이런 식의 약탈전에서 방어군의 저항을 이미 많이 경험했을 테니 더욱 방심했을 터.

이때 승부수가 날아든다. 아마 애초에 승부가 되지 않을 거라 판단한 김윤후와 그의 동지들은 처음부터 지휘관의 목숨을 노리고 매복해 있었을 것이다. 구체적인 정황은 알 수 없지만 승부수는 통했다. 아니, 통한 정도가 아니라 완벽한 성공이었다! 저격의 화살이 살례탑의 심장을 관통하는 순간, 수많은 고려민들은 비록 2년이 못 되는 짧은 시간이지만 자신들의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불의의 기습으로 지휘관을 잃은 몽골군은, 총사령관이 사망할 경우 새로운 사령관을 정할 때까지 전쟁을 중단하는 자신들의 관례에 따라 이 땅에서 거짓말처럼 철수했다. 과거 칭기스 칸이 사망하자 모든 정복전쟁을 중단하고 돌아와 새로운 칸을 선출한 다음 다시 전쟁을 재개했던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처인성은 그리 크지 않은 직사각형에 가까운 토성이다.
▲ 처인성 내부 처인성은 그리 크지 않은 직사각형에 가까운 토성이다.
ⓒ 홍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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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전이 고려 정부에 전해진 후 왕 고종은 김윤후에게 정3품 상장군을 내렸다. 파격적인 조치였다. 이에 김윤후는 이렇게 말한다.

"전투 중에 저는 활을 갖고 있지도 않았고, 적장을 쏜 사람도 제가 아닙니다. 허니 제가 특별한 공을 세운 게 아니니 그렇게 높은 직책은 받을 수 없습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공을 낮추며 6, 7품 정도의 섭랑장 직을 받았다. 그의 말대로 실제 적장을 저격한 인물이 김윤후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적장을 죽인 사람이 본인이 아니라도 군대에서는 보통 지휘관이 큰 상을 받는다. 전술을 짜고 작전 계획을 수립한 다음 이를 책임지고 수행하는 것이 지휘관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공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며 과분한 직책을 피했다.

그로부터 20년 뒤 1253년, 몽골군 본진이 충주성을 공격했을 때 그는 충주성의 노비와 하층민을 이끌고 두 달 이상을 버티며 몽골군을 격퇴하고 물러가게 했다. 이때 그는 성 함락 위기 상황에서 노비문서를 불사르며 충주성민을 독려하기도 하였다. 

이 같은 전역을 보면 당대 세계 최강의 군대-어쩌면 인류 역사상 최강의 군대-를 상대로 열악한 상황에서 연이어 승리를 거둔 그의 이름이 대중들에게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이유가 잘 이해되지 않을 정도다.

처인성 바로 아래 기념비가 서 있다.
▲ 처인성 승첩 기념비 처인성 바로 아래 기념비가 서 있다.
ⓒ 홍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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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인성 전투는 승리했으나...

처인성 전투의 승리. 그런데 빛나는 승전의 기억은 한순간의 기쁨으로 끝났을 뿐, 더 큰 재앙이 몰려들고 있었지만, 제대로 된 대비는 없었다. 이후 30년 동안 국토는 유린되었다.

사실 처인성 전투만큼 극적인 결과는 없었지만, 이후에도 드라마틱한 승전은 때때로 이어졌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개별 전투의 승리가 전쟁의 승전으로 이어지지 못한 이상 그 의미는 반감된다.

어떤 전쟁이든, 심지어 스포츠 경기도 한순간 반짝 는 개별적인 승리와 성공의 사례들이 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결국 실력과 우월의 차이는 드러난다. 개별적 성공에 도취되어 그 다음 단계를 생각하지 않거나 조직의 이해관계에 매몰되어 내적 발전을 도모하지 않으면, 그저 하나의 사례이자 영웅 탄생의 개별 스토리로 남을 뿐, 생존을 넘어서서 발전을 이룰 수는 없다.

진정한 강팀과 강국은 한 사람의 영웅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비슷한 영웅과 실력자들을 지속적으로 배출할 수 있는 시스템에서 나온다.

그다지 크지도 않고 볼품없어 보이기까지 한 처인성 앞에서 김윤후의 승리와 성공을 되새기며, '권력의 현상 유지'를 넘어선 변화와 발전을 위한 노력이 전혀 없었던 당대의 역사를 돌아보면 아쉬움만 가득 남는다.

몽골의 세계 침략사에서도 드물게 보는 사령관의 피살, 몽골 입장에서는 치욕이라 할 만한 실패를 안겼음에도 이후 이를 반전의 계기로 삼거나 적극적인 반격을 시도하지 않으며 30년 가까이 전혀 변화가 없었던 고려의 최씨 정권. 

작은 토성에서 몽골군 총사령관을 저격하고 몽골군을 물러가게 한 김윤후 개인의 영웅적인 활약은 참 고맙고, 그의 소탈한 성품에도 박수를 보낸다. 이런 인물이 드물다. 그래서 그를 존경한다.

하지만 처인성의 승리가 고려의 승리로 이어지지 못한 것, 어쩌면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 잘못은 언제까지 계속될까.

처인성 앞의 도로가 4차선 직선도로로 바뀌고, 뒤편에 규모 있는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며 주변 환경이 확 달라졌다. 이미 그 당시 지형이나 분위기를 되살리기는 어렵다. 아파트 건설이 완료되고 주민들이 입주할 날도 멀지 않았다.

말끔한 공원과 주차장이 들어서고 나면 깔끔한 도시 분위기에서 처인성은 시민들의 산책로 구실도 하게 될 것이다. 과거보다 많은 사람들과 아파트 주민들이 이 토성을 거닐며 김윤후와 처인성 승리를 반추하게도 될 것이다.

하지만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잘 꾸며진 산책로가 아니다.

현재 아파트 단지 조성과 함께 처인성 앞에 공원과 주차장이 조성 중이다.
▲ 처인성 앞 주차장과 공원 현재 아파트 단지 조성과 함께 처인성 앞에 공원과 주차장이 조성 중이다.
ⓒ 홍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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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인성의 획기적인 승리에도 불구하고 고려는 이를 계기로 몽골군을 몰아내지 못했고, 반격의 기회를 잡지도 못했으며, 오히려 역사상 가장 큰 피해와 상처만 남겼다는 사실은 여전히 남는다. 처인성을 보며 승리의 짜릿함보다 하나의 진지한 교훈으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전쟁이 현실이 되면 그것은 모든 일상을 약탈해 끌고 들어가는 블랙홀이 된다. 더구나 무책임한 정치권력을 만나면 숱한 희생자를 배출하는 생지옥이 된다. 일차적으로 수많은 고통과 희생자를 낳는 전쟁이 있어서는 안 되며,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함은 물론, 전쟁이 일어날 경우 승리로 이끌 수 있는 전략과 판단력, 지휘력이 꼭 필요하다.

한편, 볼품없이 작은 규모의 처인성은 객관적인 방어 능력과 상관없이 지휘관의 현장 판단력과 전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체험장이기도 하다. 전시에만 필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역사의 현장이다.   

이상할 정도로 방치됐다가 이제 도시 개발과 함께 정비되고 있는 처인성에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여 여러 가지 의미를 생각하게 되길 바란다.

* 답사 정보

차량으로 갈 경우 내비게이션에서 '처인성지'를 찾으면 안내해 준다.

경부고속도로 오산IC에서 나와 한참 개발 중인 동탄 2신도시 건설 현장을 거쳐 82번 지방도로로 약 10km 진행한 후 왼쪽으로 처인성 안내판을 보고 좌회전, 4차선 공사 중인 도로를 따라 800m 가까이 들어가면 왼쪽에 처인성이 있다.

주차장이 공사 중인데, 완공되면 50대 이상 주차가 가능할 것 같다. 현재는 성 아래에 적당히 주차하면 된다.

대중교통으로는 경부선 오산역 앞 혹은 용인시 공용버스터미널 앞에서 24-1번 시내버스를 이용하면 처인성 앞에 내린다. 하지만 버스가 1시간에 한 대 정도로 자주 다니지 않아 불편하다. 아파트 단지 입주가 본격화되면 버스 교통도 개선될 것이다.



태그:#처인성, #처인성 전투, #김윤후, #살례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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