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조금은 시간이 지난 영화 한편을 텔레비전에서 보았습니다. '아이 캔 스피크'.
지난 시절 일제가 인류와 역사 앞에 저지른 '강제 종군 성노예 만행' 피해자의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를 보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 기억합니다.
1592년 임진년으로부터 7년 간 계속됐던 왜(倭)의 침략과 1895년 음력 8월 20일(양력 10월 8일) 왜적의 칼날에 국모가 무참하게 참살 당한 을미사변(乙未事變)의 그날을...그리고 1905년 을사년 다섯 놈의 역적(逆賊)이 왜적과 결탁하여 황제를 급박해 강제로 체결한 을사늑약(乙巳勒約)과 1910년 경술년 8월 29일 기어이 국권을 침탈당하고만 망국의 그날 한일병탄(韓日倂呑)·경술국치(庚戌國恥)까지.
아프고 수치스럽지만 결코 잊을 수 없는 그날들을 역사의 무게로 기억합니다.
이날들의 기억 속에 우리는 저들에게서 땅만 유린당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순결한 소녀들이, 연약한 아낙들이 짐승들에게 범하여졌고,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영혼마저 피폐해졌습니다.
그 시간 속에서 이 땅의 사람들이 지켜야할 것을 지키고, 빼앗긴 것을 되찾기 위해 결행했던 투쟁들은 역사라는 이름으로 남았습니다.
1945년 8월 15일, 빼앗긴 것을 되찾고 지켜야할 것을 기어이 지켜낸 그날로부터 73년, 땅을 되찾고 자유를 되찾았지만 과연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을 기억하고, 지켜야 할 것을 지켜내고 있는가. 저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과거 만행에 대해 반성하지 않고, 오히려 미화하려 하는데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아니, 어쩌면 우리는 저들에게 "잊어도 된다"는 잘못된 인식을 심어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문득 이런 생각들이 들곤 합니다. 그리고 얼마 전 한 국회의원이 공식회의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겐세이'라는 일본어를 사용했다는 뉴스에 분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의 단어를 둘러싸고 인터넷에서 벌어진 논쟁 하나. 나 역시도 미처 알지 못했던, 우리 모두가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였던 용어. "명성황후 시해(弑害) 사건".
정말 명성황후는 시해(弑害)를 당한 것인가.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 의해 무참하게 살해당한 사건(을미사변)을 일컬어 우리는 아무런 의심 없이 '명성황후 시해(弑害) 사건'이라는 말을 사용해 왔고 국어해석의 최고 권위를 가진 국립국어원에서 조차 이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해(弑害)'란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죽임"을 의미하는 것으로 내부에서의 하극상이나 반역에 의한 살해를 의미한다는 주장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한자(漢字)의 원뜻을 정리한 중국사전 '강희자전(康熙字典)'의 내용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중국의 고전 춘추(春秋) 좌전(선공 18년)에 "자기의 군주를 죽이는 것을 시(弑)라고 한다. 외부인이 임금을 죽인 것은 장(戕)이라고 한다"고 밝힌 바 명성황후의 경우는 '시(弑)' 자가 아닌 '장(戕)' 자를 써야 한다는 지적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아직까지 '명성황후 시해(弑害)'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일제가 명성황후의 죽음을 조선 내부의 갈등으로 돌려 자신들의 책임을 면피하려는 꼼수에서 시작된 것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을사늑약(乙巳勒約)'이나 '한일병탄(韓日倂呑)'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일제가 우리의 국권을 불법적으로 침탈한 만행을 합리화하기 위해 사용한 '조약(條約)'이라는 주장을 아무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 결과물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아직 일제의 망령, 친일 역적을 청산하지 못한 채 광복 후 73년을 지나왔습니다.
내년은 3·1만세운동의 정신으로 대한민국이 건국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대한민국의 이름을 위해 목숨을 초개 같이 버렸던 이들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지켜야 할 것들을 생각합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윈스턴 처칠)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인천게릴라뉴스(http://www.ingnews.kr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