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완주군에는 '대한민국 술테마 박물관'이 있다. 2015년 박물관이 개관한다는 기사를 봤을 때부터 술을 테마로 박물관을 만들다니 참 기발한 발상이란 생각에 다른 박물관과는 무엇이 다른지 많이 궁금하였다. 궁금한 걸 못 참는데도 도통 가볼 시간이 허락되지 않아 못가보고 있었는데 마침내 다녀왔다.
술테마박물관은 시골 마을에 자리 잡고 있어서 찾아가는 길은 농촌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드라이브 코스였다. 넓은 주차장과 미로, 그리고 술 항아리를 지나 박물관으로 들어갔다. 날이 풀리는 봄에 오면 산책하기 좋게 예쁘게 꾸며져 있다. 박물관은 둥근 건물이다. 술 방울이 퍼져나가는 것을 형상화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2천원의 입장료가 있는데 완주군민은 50%가 할인되어 천원으로 입장하였다. 1층 로비에는 장석으로 장식된 반닫이가 진열되어 있었다. '술 테마 박물관인데 반닫이를 왜 진열해 놓았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마침 박물관 나상용 학예사의 설명을 듣고서야 '그렇구나!' 끄덕이게 되었다.
나상용 학예사에 의하면 술은 우리 민족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에 민속과 민예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했다. 그래서 술 박물관에는 술과 관련된 많은 자료들과 함께 민속품과 민예품들이 수집되어있다고 한다.
1층 로비에는 반닫이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서민들의 일상용품인 반닫이는 '반쪽을 열었다, 닫았다'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반닫이는 장석으로 여러 문양을 만들어 장식하고 있는데 이 문양은 하나하나 소원과 의미를 담고 있다.
예를 들면 호리병은 도교의 신선들이 약을 담아 가지고 다니며 환자를 치료하였던 도구이기에 무병장수의 기원과 호리병을 만드는 호로박에는 씨가 많아 자손번성의 의미도 있다. 거북은 장수, 잉어는 등용문 고사에 근거한 장원급제의 염원을 담았고 박쥐는 중국어로 발음하면 '복'이다. 이처럼 장식 하나하나에 모두 의미를 담아 만들어 붙였다.
3층에 있는 수장고형 유물전시관은 박물관의 수장고에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음에 착안하여 전시실을 수장고처럼 꾸며 관람객들에게 수장고가 어떠한지 눈으로 볼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이곳에는 5만여 점의 유물이 보관되어 있는데 눈길을 끄는 것은 글이 쓰여 있는 항아리이다.
글씨는 일제강점기 일본 사람들이 주세를 걷기 위해 표시해 놓은 글씨이다. '항아리 하나에 세금 얼마' 이런 식이다. 우리나라가 일본에 강제 병합되기 전 일본의 통감정치시절 조선의 식민지 통치를 준비하였다. 가장 먼저 우리의 자원과 문화, 풍습 등을 철저하게 조사하였다. 이 조사에서 일본 사람들은 식민통치를 위한 재원을 주세에서 얻을 수 있다고 판단한다. 그만큼 많은 사람이 술을 마셨고 소비량이 많았다는 이야기이다.
1909년의 주세법에 의하면 술을 만드는 사람은 영업장은 물론이고 집에서 먹기 위해 만들어도 면허를 받아야 했다. 영업장의 면허는 상속이 가능하였지만 개인의 면허는 상속할 수 없었다. 거기다 영업장의 세율보다 개인에게 부과한 세율이 훨씬 높았다. 결과는 1916년 30만 명이던 가양주 주조자가 1930년대에는 10명으로 줄었다.
집에서 만드는 술을 가양주라고 한다. 조선시대에 술은 전통적으로 가정에서 빚었다. '명가명주(明家銘酒- 이름 있는 집안의 술이 맛있는 술이라는 뜻)'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술은 지방에 따라, 가문에 따라, 빚는 사람의 솜씨에 따라 맛과 향기가 다른 가양주들이 만들어졌다. 이름 있는 집에서는 가양주를 만들어서 손님을 접대하고 제사와 차례를 지내는 등 집안행사를 치렀다.
이러한 가양주들이 일제강점기를 지나며 위기를 맞았고 해방 이후에는 식량이 부족하여 쌀로 술을 만드는 것을 금지한다. 그나마 명맥을 유지해 오던 가양주들이 사라지게 된다. 1980년대 쌀의 자급자족이 이루어지고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치르면서 전통주에 대한 인식이 새롭게 일어나면서 관광콘텐츠로 발전하여 많은 지역에서 전통주가 복원되게 된다. 항아리 하나에서 우리의 역사와 술의 역사를 만난다.
반대편 벽면에는 수많은 술병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 중 시선을 잡아끈 것은 빨간 두꺼비이다. 지금은 참이슬이라 이름을 바뀌었지만 예전엔 진로였다. 진로소주는 1924년 평남 용강군의 '진천양조상회'가 모체이다. 이때 소주의 도수는 35도였고 트레이드마크도 원숭이였다.
서북지방에서 원숭이는 영물이다. 원숭이는 사람 모습을 하고 있고 사람 말을 알아들으며 술을 만들어 마실 줄 알기 때문에 복을 주는 동물로 여겼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고 남하한 진로는 더 이상 원숭이를 심벌마크로 사용할 수 없었다. 남한에서 원숭이는 얍삽하고 교활한 사기꾼 이미지가 강하기 때문이다. 대신 '떡 두꺼비 같은 아들' '은혜 갚은 두꺼비'와 같은 이미지를 가진 두꺼비가 원숭이 대신 1955년부터 사용된다.
이곳에서는 1969년 생산된 우리나라 최초의 와인을 만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최초의 와인은 사과로 만든 애플와인 '파라다이스'이다. 포도로 만든 와인은 1973년 동양맥주에서 생산한 마주앙이 최초로, 마주 앉아서 즐긴다는 뜻이다.
마주앙은 지금도 생산되고 있기 때문에 국내 최장수 와인 브랜드이다. 또한 마주앙은 처음 판매될 때부터 로마교황청의 승인을 받아 지금까지 한국천주교의 미사주로 사용되고 있다. 마주앙 미사주는 마주앙 중에서도 가장 좋은 품질의 포도주로 재배를 시작하면서부터 관리와 수확하고 만드는 과정은 물론 숙성되는 과정까지 천주교전례위원회에서 관리하고 있다.
그럼 포도주를 만드는 포도는 언제부터 재배 되었을까? 신사임당의 그림에 포도가 있으니 조선 초부터 재배 되었을 거라고 생각 하지만 신사임당이 그린 포도는 포도가 아닌 머루이다. 그러므로 조선시대 만들어진 포도주는 엄밀히 말하면 머루주이다.
우리나라에서 포도가 대량으로 재배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 때부터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유물들이 조곤조곤 자신들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그 이야기 속에는 우리의 역사와 문화가 있고 삶이 담겨 있다.
술 박물관이라 아이들과 같이 가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지 않아도 된다. 2층에서는 3월까지 진행되는 '낭만에 대하여'라는 기획전시 중이다. 최백호의 노래 '낭만에 대하여'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낭만에 대하여 가사 중에 '도라지 위스키'라는 노랫말이 나온다.
도라지 위스키는 소주에 위스키 향을 첨가한 위스키가 한 방울도 들어가지 않은 술인데도 불구하고 위스키를 마시는 기분을 낼 수 있었기 때문에 인기가 높았다. 도라지 위스키가 처음 나왔을 때의 이름은 도리스 위스키였다. 그런데 일본에는 토리스 위스키라는 상품이 있었다. 도리스 위스키가 일본의 토리스 위스키의 상표를 모방했다는 문제가 제기되자 이름을 도라지 위스키로 바꾸었다.
50~60년대 다방에서는 홍차에 도리스 위스키를 한 방울 떨어트린 위스키티를 팔았다. 2층 기획전시실에는 위스키티를 팔던 다방을 재현해 놓아 재미있는 사진을 찍을 수 있다. 이제는 사라져버린 LP판과 전축을 볼 수 있으며 전축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감상할 수 있다. 희미한 다방의 기억을 아이들과 재미있게 공유할 수 있도록 해 놓았다.
또한 3층 제2전시관에는 70~80년대 실제 전주의 골목길을 그대로 옮겨다 놓았다.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포토 존이 있어서 아이들과 사진을 찍으며 부모님의 어릴 적 추억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이 꾸며져 있다. 정말 딱 그 시절로 돌아간 듯 나도 모르게 입 꼬리가 올라가며 즐거워진다. 가장 안쪽으로는 아이들이 체험할 수 있는 도구들이 있어서 온 가족이 '술'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정말 재미있게 놀 수 있다.
꼭 놓치면 안 되는 곳은 입구에 있는 시음장이다. 이곳에서는 2017년 대한민국 술 품평회에서 대상을 받은 산삼막걸리와 함양의 하동 정씨 가문의 가양주인 솔송주와 전주이강주 그리고 제주 감귤로 만든 니모매가 이달의 시음주로 준비되어 있다. 덤으로 진짜 위스키를 넣은 위스키티도 맛볼 수 있다.
톡톡 튀는 아이디어와 감성을 자극하는 추억 여행이 가능한 곳, 아이들에게 부모의 기억을 체험할 수 있게 하는 곳, 유물들이 들려주는 생생한 이야기가 있는 곳이 술 테마 박물관이다.
근처에는 구이 저수지 산책길과 모악산 도립공원, 모악산 도립미술관, 국내에서 유일하게 스님이 만드시는 송화백일주의 수왕사가 지근거리에 있고, 경각산에서는 패러글라이딩을 즐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