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나는 한때 폭력 교사였다.
나는 한때 폭력 교사였다. ⓒ pixabay

나는 한때 폭력 교사였다.

2000년, 중학교 담임으로 첫 발령을 받았다. 교사가 몇 번 진심을 담아 얘기하면 척척 새 사람으로 거듭나면 좋으련만 현실은 딴판이었다. 사범대에서 교육학 시간에 배운 교육적인 방법들을 도대체 사용해 볼 기회가 없었다.

외계인의 침공도 막아낸다는 중2병의 여자 학생들은 초짜 교사인 나를 우습게 얕잡아 보는 듯했다. '말'이 소통의 도구가 되지 않는다고 여겼다.

국민학교 4학년이 되자 마을에 버스가 다니기 시작한 산골에서 학교를 다녔던 나에게 교사들의 폭력은 일상이었다. 해가 지면 달이 뜨고 달이 지면 해가 뜨듯이 폭력엔 마침표가 없었다.

중학생 때 한 음악 교사는 수업 중에 잡담을 했다는 이유로 펜치로 학생의 머리를 때리기도 했고, 수시로 열리던 전 학년 운동장 조회에서는 학생이 공벌레처럼 데굴데굴 구르기도 했다. 유도 선수였다던 덩치 산만 한 체육 교사는 몸만 틀어도 이렇게 외쳤다.

"너 이 새끼 튀어나와!"

그는 총알처럼 튀어 높은 단상의 계단을 오르는 학생을 위에서 발로 가슴팍을 걷어찼다. 전 학생이 혼비백산하여 숨마저 참던 시절, 땡볕 조회 시간에 몇 명은 픽픽 쓰러져 양호실로 옮겨지곤 했다.

단체 기합이나 단체로 맞는 일은 피해갈 수 없었으나, 야무졌고 공부도 잘했던 탓에 개별적인 폭력으로부터는 자유로웠다. 어느 날, 교사들의 사랑을 받던 내가 엉덩이가 너덜너덜해지도록 맞는 사건이 발생했다.

'곰보'라 불렸던 국어 교사는 수업시간마다 여학생들만 골라 겨드랑이를 꼬집어 댔다. 하필 국어 수업은 일주일에 가장 많이 시간표에 박혀 있었다. 징그러운 미소를 띠며 느릿느릿 걸어와서 여자 학생들 옆에 바짝 달라붙어 보드랍고 여리고 흰 겨드랑이들을 공격했다. 긴 팔 교복을 걷어 올리라고 시켰다. 덕분에 우리들의 겨드랑이는 계속해서 색갈이를 했다. 붉은 빛, 보랏 빛, 노란 반점이 번갈아 나타났다.

"전 싫은데요."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모르지만, 불쑥 오랫동안 참아온 말이 '툭'하고 쏟아졌다. 그리고 그날 내 인생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죽지 않을 만큼 얻어터졌다.

그러고도 그는 쭉 그렇게 살았다. 여느 대한민국 공립학교 교사들처럼 몇 년마다 메뚜기처럼 학교만 옮기면서 말이다. '성추행'이나 '교사의 무자비한 폭력' 따위의 단어가 사전엔 존재했는지 모르나 아직 학교 담장을 넘어 서진 못했다.

수치심, 배반감, 공포 등 감당할 수 없는 감정들이 복받쳤다. 다행이라면 평생 학교라는 곳에서 배움 한 번 받아보지 못한 엄마는 "네가 버릇없이 대들어서 당했지"라는 말 대신 "쳐죽일 놈"이란 말을 연발했다. 밤새 배 깔고 누운 딸의 피범벅 엉덩이에 안티프라민을 바르면서.

'어쩔 수 없다' 비겁한 변명으로 회초리를 들었다

 초임 교사 시절, 좁은 원룸 방에서 혼자 벽을 쳐다보고 있으면 머릿속과 가슴이 터질 듯 답답했다.
초임 교사 시절, 좁은 원룸 방에서 혼자 벽을 쳐다보고 있으면 머릿속과 가슴이 터질 듯 답답했다. ⓒ pixabay

학교 담장 밖의 세상은 빠르게 바뀌는데, 교사가 되어 학교로 돌아왔을 때 담장 안은 낯설지가 않아서 되려 놀랐다. 펜치가 봉걸레 대나 회초리로, 전체 조회에서 가슴팍을 걷어차던 발길질이 교무실이나 복도에서의 폭력들로 약간의 변신을 했을 뿐이었다.

학교가 '인정사정 볼 것 없는 곳'처럼 무서웠다. 타 도시에서 학교를 전전하다 전학 온 일진 학생을 신입 교사인 나의 반에 배치시켰다. 매일 3~4명의 학생이 상습적으로 지각이나 결석을 해대는 반, 부모의 돈을 훔쳐 가출하는 아이가 있는 반, 쉬는 시간마다 흡연하다 발각된 아이들이 담임 자리에 와서 대기를 하고 있는 반인데도 한 명을 더 얹었다.

교사에게 최고로 할당할 수 있는 주당 24시간의 수업을 하고(그 당시엔 신입 교사에게 가장 많은 수업 시수를 몰아주고, 가장 기피 업무를 주는 것이 학교의 관습이었음), 공강시간이나 쉬는 시간에는 학부모에게 전화를 하고 학생들을 불러 상담을 해야 했다.

선배 교사들이 조언했다. 매일 교사 수첩에 말썽 피는 아이들의 상담을 기록해 놓아야 한다고. 이해할 수 없었으나, 나를 보호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니 그렇게 따랐다. 점심을 놓치는 경우도 많았고, 너무 지쳐서 밥도 넘어가지 않는 날들이 이어졌다.

변명이 될 수 없지만, 내가 택할 수 있는 가장 익숙하고 쉬운 방법은 회초리를 드는 것이었다. 비열하게 책임을 학생들에게 돌리는 말들을 쏟아냈다.

"왜 이렇게 말을 안 듣는 거야?" (네가 말을 안 들으니 때리는 거야.)
"날 무시하는 거야?" (네가 교사를 무시하니 맞아도 싸.)

맞던 자가 때리는 자가 되는 일은 그렇게 간단했다. 양심을 속일 수는 없으니 스스로를 안심시키는 위안이 필요했다. 나는 나쁜 길에 빠진 아이를 구원하고 있는 거라고, 그게 교사의 본분이라고.

'내가 이 일을 평생 할 수 있을까?'

좁은 원룸 방에서 혼자 벽을 쳐다보고 있으면 머릿속과 가슴이 터질 듯 답답했다. 축 절여진 파김치로 불면의 밤을 보내면서 사표(그때는 퇴직이라는 단어도 몰랐다)를 내는 모습을 상상하면, 미래가 불안해서 더 잠을 이룰 수 없는 악몽의 날들이 이어졌다.

외부에선 교사들에게 불신의 시선으로 '맘에 안 들면 때려 치우던지', '공무원 철밥통'이라 야유를 보내지만 직장이 맘에 안 든다고 밥그릇을 걷어찰 처지가 아니었다. 대학 때부터 내 밥그릇을 스스로 책임지던 나는 떠나지도 못하면서 차츰 폭력에 둔감한 교사가 되어갔다.

맞고 때리는 일에도 '익숙함', '면역력'이란 단어가 적용된다는 게 씁쓸했다.

*다음 기사 : 어느날 사라진 학생, 교사라는 사실이 두려웠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브런치와 블로그에도 실립니다.



#학교#학교폭력#폭력교사##METOO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