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묘사화로 스승 조광조가 죽임을 당하자 양산보는 고향 창암촌에 은거했다. 그리고 소쇄원을 지어 일생을 보냈다. 세상 사람들은 그가 세상과 담을 쌓고 깊이 은둔하려 소쇄원을 지었다고들 했다. 그러나 그는 평생 도학사상을 연구하고 실천하며 성리학 이념을 자연 속에 구현하려 했다. 그는 세상을 등진 것이 아니라 세속을 벗어나 있을 뿐이었다. 그에게 소쇄원은 은둔의 공간이 아니라 창조의 공간이었다. 소쇄원은 세속과 격리된 죽은 공간이 아니라 사람들과 교유하는 살아 있는 공간이었다. 양산보는 암울한 은둔가가 아니라 소쇄한 처사였다. 그는 단지 때가 오지 않아 평생 처사로 올곧게 살았을 뿐이었다. -기자 말
소쇄원 제월당, 소쇄원 주인이 거처하던 곳이다. 사람들은 소쇄원 경내가 한눈에 보이는 이곳에 이르면 약속이나 한 것처럼 걸음을 멈춘다. 마루에 걸터앉아 사람들의 움직임을 지켜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대숲을 나온 한 무리의 사람들이 광풍각 건너편에서 잠시 걸음을 멈춘다. 말로만 듣던 소쇄원 풍경을 곁눈질하기 위해서다. 그러곤 곧장 걸음을 옮겨 소쇄원 전체를 볼 수 있는 대봉대에서 다리쉼을 한다.
사람들은 애양단을 무심코 지나치는데, 나뭇가지에 가려진 작은 글씨에 관심을 두는 이는 별로 없다. 그 옆 오곡문도 마찬가지다. 눈썰미가 있는 이라면 간혹 벽에 적힌 글씨를 보곤 하지만 대개는 그냥 지나치고 만다.
그보다는 대개 생경한 담장에 눈길을 주거나 외나무 다리에 친근감을 표시하곤 한다. 사람들의 관심은 계곡에 발을 담근 특이한 담장과 그 옆으로 담장을 뚫어 놓은 트인 문에 집중된다. 그러다 보니 계곡 건너 잘 가꾸어진 매대도 눈여겨볼 리 만무하고 송시열이 썼다는 '소쇄처사 양공지려' 글씨 또한 매대 높직이 외롭기만 하다.
계곡 외다리에서 느릿느릿 옮기던 걸음은 제월당 마당에 이르면 일제히 멈춘다. 먼저 온 이들이 쉬고 있어 따라하는 것도 있겠지만 제월당이 가장 햇볕이 따스하고 소쇄원 전체를 시원스레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높다랗게 우뚝 솟은 제월당에 오르면 소쇄원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제야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소쇄원을 찾는 사람들이 대체로 엇비슷한 동선으로 움직인다는 걸 알게 된다. 물론 이 관찰은 제법 오래 머무는 사람만이 알 수 있다.
제월당을 마지막으로 사람들은 뒤뜰을 돌아 계곡을 건너거나 일각문 아래로 광풍각을 거쳐 소쇄원을 빠져 나간다. 이 모든 움직임에 채 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여기까지가 소쇄원을 찾는 사람들의 대체적인 동선이다.
별서로서의 완벽한 공간 구성옛날에는 어땠을까. 예전에는 창암촌을 지나면 소쇄원이었다. 지금은 대숲 가운데 널찍한 길로 소쇄원에 들어서지만 예전에는 작은 사립문이 달려 있었다고 한다. 대숲은 자연 세속과 경계가 되어 말 그대로 맑고 깨끗하게'소쇄瀟灑'하여 세속을 벗어난다. 지금처럼 외길이 아니라 길이 두셋 더 있었다고 하니 세상과의 단절이 아닌 소통하는 은자의 길이었으리라.
대숲을 벗어나면 흙돌담이 오른편 눈앞으로 길게 펼쳐지고 왼편으로 소쇄원 경내가 들어온다. 담장을 따라가면 고경명이 일산을 펴놓은 것 같다고 했던 정자가 나온다. '초정草亭' 혹은 '소정小亭'이라고 불리는 이 작은 정자는 양산보가 직접 쌓았다는 '대봉대待鳳臺' 위에 세워졌다. 소쇄원의 주인이 봉황인 손님을 맞이하는 곳이다. 대봉대 옆에는 봉황이 둥지를 틀고 산다는 오동나무가 있다.
담장을 바라보면 '애양단愛陽檀'이라는 글씨가 있다. 담벼락에 글씨를 새긴 옛사람들의 우미한 풍류가 엿보인다. 예전에는 양산보의 사돈이자 둘째 아들 양자징의 장인인 하서 김인후의 <소쇄원 48영> 시가 걸려 있었다고 하니 얼마나 운치 있었을까. 아쉽게도 담장이 홍수로 떠내려가면서 사라졌다.
볕이 잘 드는 곳, '애양'은 부모에게 효도한다는 뜻으로 효심이 강했던 양산보의 마음이 더욱 돋보인다. 면앙정 송순과 하서 김인후는 소쇄원의 2대 주인 양자징, 양자정 형제의 효성과 우애를 극찬했고, 제봉 고경명은 두 형제처럼 효성이 지극하고 우애가 깊은 사람을 세상에서 찾을 수 없다는 시를 남기기도 했다.
담장을 돌면 '외나무다리(약작, 略彴)'가 계곡에 걸쳐 있다. 이 다리를 건너면 산의 경사를 따라 층층 쌓은 흙돌담과 연결된 '오곡문五曲門'이 있다. 담벼락 매화나무 옆에는 오곡문이라는 글씨가 있다. 오곡은 무이구곡의 오곡을 말한다. 주자가 공부했던 무이정사가 있던 곳이 무이구곡 중 오곡이었다. 구곡 중 가장 중심 되는 곳이니 이 오곡문은 소쇄구곡의 중심인 것이다.
지금은 문 없이 트여 있지만 <소쇄원도>를 보면 작은 일각문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오곡문 옆 담장이 특이하다. 흐르는 계곡물에 천연덕스럽게 발을 담그고 있는 담장 굄돌支石은 소쇄원을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구조물이다. 원규투류垣窺透流, 신선 동굴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에 발을 담근 담. 흐르는 자연에 최소한의 인위를 가한 절묘한 장면이다.
외나무다리를 건너다 보면 계류가 흐르는 골짜기 양쪽 언덕으로 소쇄원이 조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오곡문 담장 아래를 흘러 외나무다리를 지난 계류는 암반에서 십장폭포十丈瀑布라고 하는 폭포수가 되어 떨어진다. 그 아래 푹 팬 웅덩이는 조담槽潭이고, 계류는 지석천支石川인데 증암천으로 흘러간다. 계곡의 좌우에는 달구경하던 너럭바위 광석廣石, 바둑을 두던 평상바위 상암床巖, 자연 속에서 사색하거나 지인들과 이야기꽃을 피우던 걸상바위 탑암榻巖 등이 있다.
광풍각 옆에는 돌을 쌓고 화초와 나무를 심은 아름다운 석가산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볼 수 없다. 이 계곡 가에는 나무가 14종, 화초가 15종이 있었다고 한다. 흥미로운 건 소쇄원에 왜철쭉이 있었다는 것. 양산보는 소쇄원에서 기른 왜철쭉을 김인후에게 선물로 보내기도 했다. 왜철쭉은 당시 꽃 가운데 최고로 귀한 대접을 받았다.
계곡물을 건너면 '매대梅臺'이다. 제월당 좌우로 매화와 파초가 심겨 있는데, 매대는 매화가 심어져 매대라 불렸다. 매대 뒤쪽에는 우암 송시열이 쓴 '소쇄처사 양공지려瀟灑處士 梁公之慮'가 하얀 벽에 검은 글씨로 걸려 있다. 양산보의 5대손 양택지가 송시열에게서 제월당, 광풍각 글씨와 함께 받아온 것이라고 한다.
소쇄원의 맨 위에 '제월당霽月堂'이 우뚝하다. 주인이 거처하며 조용히 책을 봤던 곳으로 그 이름은 송나라 황정견이 주무숙의 사람됨을'흉회쇄락여광풍제월胸懷灑落如光風霽月'이라고 비유한 데서 따왔다. "가슴에 품은 뜻의 맑고 맑음이 비 갠 뒤 부는 청량한 바람과 비 갠 하늘의 상쾌한 달빛과 같다"는 뜻이다.
제월당 담장 너머 서쪽에는 공터가 있다. '고암정사鼓巖精舍'와 '부훤당負暄堂'이 있던 자리다. 고암정사는 양산보의 둘째 아들인 고암 양자징이, 부훤당은 셋째 아들인 지암 양자정이 1570년경에 세운 서재이다.
제월당 마당 끝으로 난 일각문을 내려서면 담으로 둘러싸인 정적인 공간이 있고 그 아래로 돌층계가 이어진다. 돌층계를 하나하나 내려서다 보면 어느새 세속의 혼탁함은 사라지고 고요한 선계가 펼쳐진다.
층계를 내려 도달한 곳은 '광풍각光風閣'. 고경명이 물 위에 뜬 배와 같다고 한 광풍각은 소쇄원 원림의 한복판에 있다. 손님을 접대하던 사랑방으로 옛날에는 손님을 맞고 보내는 버드나무가 서 있었다.
광풍각 아래 계곡에는 대나무로 만든 다리가 걸쳐 있다. 투죽위교透竹危橋, 이 다리를 건너려면 몸과 마음이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계곡을 건너면 '상지上池'와 '하지下池', 두 개의 네모난 연못이 보인다. 계곡물을 나무 홈과 바위 홈으로 끌어왔다. 옛날에는 두 연못 사이에 물레방아가 있었다고 한다.
덧붙이는 글 | ※ 한국을 대표하는 정원인 소쇄원은 두 차례에 걸쳐 소개할 예정입니다. 다음 기사에서는 소쇄원이 언제 어떻게 지어졌고 후손들이 어떻게 계승했는지를 소쇄원 가의 사람들을 중심으로 살펴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