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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 70주년을 맞아 제주도는 북새통이다. 70주년 때문인지 6월 지방선거 때문인지 4.3 행사가 벚꽃보다 더 만발하다. 한 4.3전문가에 따르면 관련 예산이 100억원에 육박한다고 하니 제주 현지 분위기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다. 벚꽃처럼 만발했다가 어느 순간 앙상해지면 어쩌지 하고 나는 벌써 걱정스럽다.

나는 제주4.3의 유족이다. 외할아버지는 군경의 학살을 피해 제주를 탈출하시다가 행방불명되셨고 외할머니는 경찰서에 끌려가 대살(代殺)당했다. 이 때문에 어머니는 고아가 되셨고 인생이 꼬여버렸다.

어머니는 장가 가서 아이 둘 낳은 나에게 틈만 나면 건강 얘기를 하셨다. 부모가 없으면 아이들은 '죽은 목숨'이라는 말을 귀가 따갑게 들었다. 제주4.3을 공부하면 할수록 어머니의 그 말씀이 거대한 바위 덩어리 같이 무거워졌다. '죽은 목숨'이란 어머니 당신의 이야기였다.

대학 시절부터 제주4.3에 대해서 '사명감'을 가지고 공부를 했던 것 같다. 글 좀 쓰거나 책 좀 읽는 제주도 태생에게는 숙명과도 같은 일이다. 하지만 대부분 '피해자 중심'의 서사다. 4.3 관련 예술 작품들도 이런 흐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진리에 이르는 길은 두 갈래다. 하나는 긍정의 길이며, 하나는 부정의 길이다.

<순이 삼촌>을 써서 한국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제주4.3을 알린 현기영 작가는 부정의 길을 보여주었다. 그는 제주도를 떠나 있었다. 그는 한 강연에서 "만약 내가 제주를 떠나지 않았다면 아마도 4.3 이야기를 더는 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했다.

제주에서 도망치고 나서 제주를 제대로 이해하게 된 건 나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은 귀향해서 제주에 살고 있지만 13년간 제주를 떠나 있었다. 떠나 보니 더 그리워지고 더 궁금해지고 더 공부하고 싶었다. 다시 나는 제주4.3을 공부했다. 혼자서 틈틈이.

더 이상 제주4.3을 국내적 시각으로 보지 않기로 했다

 대표적인 지한파 브루스 커밍스 교수는 한국전쟁뿐 아니라 아예 한국현대사를 책으로 썼다. 《한국현대사》는 고대 삼국시대로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한국인의 감정과 인식의 큰 맥락을 따라가려고 애썼다. 냉전문제의 세계적인 석학이자 역사학자인 베른트 슈퇴버 역시 한국전쟁을 세계사적으로 조망한 《한국전쟁》을 썼다.
대표적인 지한파 브루스 커밍스 교수는 한국전쟁뿐 아니라 아예 한국현대사를 책으로 썼다. 《한국현대사》는 고대 삼국시대로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한국인의 감정과 인식의 큰 맥락을 따라가려고 애썼다. 냉전문제의 세계적인 석학이자 역사학자인 베른트 슈퇴버 역시 한국전쟁을 세계사적으로 조망한 《한국전쟁》을 썼다. ⓒ 오승주

제주4.3과 한국현대사를 공부하면서 궁금했던 사실이 하나 있다. 왜 외국인이 남의 나라 역사에 이렇게 관심이 많을까? 대표적인 지한파 브루스 커밍스 교수는 한국전쟁뿐 아니라 아예 한국현대사를 책으로 썼다.

<한국현대사>는 고대 삼국시대로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한국인의 감정과 인식의 큰 맥락을 따라가려고 애쓴 역작이다. 냉전문제의 세계적인 석학이자 역사학자인 베른트 슈퇴버 역시 한국전쟁을 세계사적으로 조망한 <한국전쟁>을 썼다.

나는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한참 생각했다. 한국전쟁은 2차세계대전 이후 세계 최강대국이 된 미국과 소련의 대리 전쟁이다. 그러니까 한국전쟁은 '세계대전의 결승전'이나 다름 없었고, 사실상 3차 세계대전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미 1948년에 전쟁은 시작되었다. 제주도에서.

나는 '제주4.3'이라는 임시 간판 같은 낱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1948년 제주 사건'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제주4.3'이라고 했을 때는 1947년 3.1절 발포 사건과 1948년 4월 3일 무장대의 봉기를 강조할 뿐 사건 전체를 조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제주4.3은 국내용 이름일 뿐이다.

1948년이라고 했을 때의 잇점은 1948년 남한단독선거와의 연관성을 드러낸다. 전국적인 단독선거 보이콧이 펼쳐졌지만 제주도에서는 매우 강렬해 2석이 궐석이 되었다. 결국 대한민국 제헌의회는 200석에서 2석 모자란 198석으로 건국하였다.

남한 단독선거를 주재한 미국에게는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겼고, 그것이 결국 '제주 대학살'의 빌미가 된 것이다. 1948이라는 숫자는 미소 냉전과 한국전쟁에 대한 암시 역할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미국'을 강력히 암시한다는 점에서 나는 이 표현을 쓴다.

사건이 난 지 70년이 되도록 왜 4.3평화공원의 '백비(白碑)'에는 이름이 없을까? 당연하다. 우리들이 아직 역사적 진실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공부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공부해야 할 것인가?

제주4.3은 미처 못 들은 20세기 인간의 이야기다

 제주 4.3과 '미국'과 연관해서 서술한 대중 학술서로는 최초가 아닐까 싶다. 허상수 교수(성공회대)는 오랜 시간 동안 제주4.3을 연구한 사회학자다.
제주 4.3과 '미국'과 연관해서 서술한 대중 학술서로는 최초가 아닐까 싶다. 허상수 교수(성공회대)는 오랜 시간 동안 제주4.3을 연구한 사회학자다. ⓒ 다락방

제주 4.3의 역사와 예술 작품들을 살펴보면 유난히 많이 등장하는 낱말이 있다. '학살', '서청'(서북청년단), '이승만'. 여기에 낱말 하나를 추가해야 한다. '미국'. 잘 알려지지 않은 책 한 권이 2015년에 출간되었다.

제주4.3과 미국의 연관성을 분석한 학술서 <4.3과 미국>(다락방)이다. 제주4.3을 공부하다 보면 반드시 만나게 되는 것은 '미국'이고, 거꾸로 말하면 '미국'을 상수로 놓지 않고서는 결코 제주4.3의 진실에 도달할 수 없다.

미국은 제주4.3 당시 직접 대학살극을 지휘했으면서도 직접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았다. 피해자들은 서북청년단원과 군경, 이승만 등에게 분노한다. 그리고 학살에 가담했던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가 부정당하지 않기 위해서 신념적으로 제주4.3을 폭동으로 밀고 간다. 이 부조리한 게임을 만든 미국에게는 분노할 수조차 없다.

젊었을 때는 김일성과 소련 정권에게 터전과 재산, 가족의 생명을 모두 빼앗기고, 미국에게는 이용당하고, 죽어서까지 그들은 이용만 당했다. 그들이 잘못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이용당하고 세뇌당한 점에 대해서는 일말의 동정심이 생긴다. 미국에 분노하지 않는다는 건, 살인자에게만 분노할 뿐 살인교사자에게는 분노하지 않는 것과 똑같다.

하지만 제주4.3에 대한 미국의 행태를 낱낱이 알아낸다고 하더라도 부족하다. '20세기의 세계'라는 독특한 특성을 이해해야 하며, 파탄난 인간성을 발견해야 한다. 1차 세계대전 직전만 해도 유럽인은 자신들이 세계 문명을 완성했다는 자부심에 취해 있었다. 역사, 문화, 경제, 정치, 사회 등 모든 영역에서 더 이상 발전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문명을 완성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세계가 무너졌다.

 제주4.3 당시 미국인의 감정과 인식을 보여주는 미국 소설에 관심을 갖는 것은 어쩌면 4.3의 완전한 해결에 도달하는 뜻 밖의 힌트가 될지도 모른다.
제주4.3 당시 미국인의 감정과 인식을 보여주는 미국 소설에 관심을 갖는 것은 어쩌면 4.3의 완전한 해결에 도달하는 뜻 밖의 힌트가 될지도 모른다. ⓒ 오승주

1차세계대전 이후 '실존주의'가 문학과 철학을 지배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1948년의 미국과 미국인이라는 것도 결국 파탄난 인격의 하수인일 뿐이다. 미국인의 사고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살펴보려면 문학의 힘을 빌려야 한다. 제주4.3을 세상에 알린 것도 문학이며, 제주4.3의 진실을 온전히 드러내는 것도 문학이 될 것이다.

한국전쟁 종군기자 출신의 미국 작가 도널드 바셀미의 <죽은 아버지>, 2차세계대전 참전해 독일군의 포로가 되기도 했던 커트 보니것의 반전 소설 <제5도살장>, 20세기 초 미국인의 일그러진 열정을 다룬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와 <밤은 부드러워>, 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방황하던 세대를 지칭하는 '로스트 제너레이션'이라는 말이 처음으로 쓰인 헤밍웨이의 <태양은 다시 뜬다>을 읽으면서 20세기에게 미처 못 들은 이야기에 귀기울인다. 제주4.3은 21세기에 듣는 20세기의 숨겨진 이야기다.


#4.3과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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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놀이 책>, <인문고전으로 하는 아빠의 아이 공부>, <공자, 사람답게 사는 인의 세상을 열다> 이제 세 권째네요. 네 번째는 사마천이 될 듯합니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이런 제목 어때요?>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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