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재판을 받았더라면 다 끝났을 거고, 이렇게 고통받으며 생활하지 않았을 거다."이명박 정부 시절 국가정보원 예산을 여론 조작에 사용하게 한 혐의를 받는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검찰 수사를 비난하며 고통을 호소했다.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24부(부장판사 김상동)는 3일 원 전 원장과 이종명 전 국정원 3차장, 민병주 전 심리전단장의 국고손실 11차 공판을 열었다. 이들은 사이버 외곽팀 운용에 국정원 예산 65억 원을 사용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날 재판부는 국정원 직원들의 진술조서, 검찰이 국정원 TF에 의뢰한 보고서 등 서류 증거 조사를 진행했다.
다소 지친 기색으로 모습을 드러낸 원 전 원장은 자신의 변호인들 사이에 앉았다. 그는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변호인에게 큰 소리로 "그 얘길 해줘야지"라고 말하거나 혼자 고개를 절레절레 젓기도 했다.
원 전 원장의 변호인 배호근 변호사는 "지난 2013년 4월, 국정원 댓글수사가 시작됐는데 지금 5년 됐다. 기억을 자세히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다"며 "당시 수사가 안 됐던 게 원세훈 피고인의 잘못인 것처럼 얘기하는데 전혀 그런 바 없다. 이때 기소가 다 돼서 재판을 받았다면 다 끝났을 거고, 이렇게 고통받으며 생활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지금까지 원 전 원장이 재판을 받고 있는 이유는 국정원이 당시 수사를 방해했기 때문이다. 국정원이 검찰 수사를 방해하면서 실체를 규명하지 못했고, 정권교체 이후에 뒤늦게 범죄 혐의가 밝혀져 재판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결국 원 전 원장이 푸념할 대상은 검찰이 아니라 그가 이끌었던 국정원이다.
검찰 "조직적인 방해 없었다면 진실 일찍 드러났을 것"원 전 원장은 지난 2013년 8월부터 직원들에게 SNS를 통해 사이버 정치공작 활동을 지시한 혐의로 형사재판을 받고 있다. 그는 1심에서 국정원법 위반만 유죄를 선고받았고, 2심에선 선거법 위반까지 유죄로 인정돼 법정구속됐다. 그러나 대법원은 증거능력을 이유로 파기환송해 지난해 8월, 다시 법정구속된 뒤 현재 대법원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
당시 국정원 직원들은 증인으로 나와 "정치 개입 관련 지시는 없었다", "기억나지 않는다"며 거짓으로 진술했다. 원 전 원장 또한 무죄를 주장했다. 국정원은 불리한 부분을 가리고 자료를 제출하는 등 재판에 비협조적이었다.
검찰 수사 결과 국정원은 2013년, 원 전 원장의 정치 개입을 덮으려고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남재준 당시 국정원장은 "원세훈 유죄가 나오면 대한민국이 망한다. 무조건 무죄로 만들어라"라고 지시했다. 이 지시에 따라 국정원에 '현안TF'가 만들어졌다. 이들은 가짜 국정원 사무실을 만들어 당시 수사팀의 수사를 방해하기도 했고, 증언하러 나가는 직원들에게 허위 증언을 하도록 만들었다.
검찰 관계자는 지난해 국정원 간부 등을 재판에 넘기면서 "조직적인 사법 방해 공작이 없었더라면 실체 진실이 일찍 드러났을 것"이라며 "약 4년이 지난 지금도 원 전 원장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도록 하는 등 국가 사법 자원 측면에서 인적·물적으로 엄청난 손해를 초래하게 한 중대한 사안임이 명백히 밝혀졌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원 전 원장 측은 "피고인은 사법방해와 전혀 상관없다. 공소사실과 연결하는 건 부당하다"며 "국정원 외곽팀에 대한 인식도 없었다"고 반박했다.
재판부는 오는 10일 원 전 원장의 결심 공판을 진행할 예정이다. 재판부는 이후 이 사건을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을 비난하는 책자를 발간한 혐의 등으로 박승춘 전 보훈처장과 함께 기소된 다른 사건과 병합해 선고할 방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