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소중한

성산일출봉 머리 위에 먹구름이 내려앉았다. 고등학교 수학여행 이후 15년 만에 마주한 봉우리는 먹구름마저 아름답게 만들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저 "아름답다"는 말이 머리와 가슴을 맴돌았다.

15년 전과 오늘이 달랐던 점은 딛고 서 있는 땅이었다. 그땐 성산일출봉에 올라 바다를 내다봤고, 오늘은 약간 떨어진 '터진목'에서 성산일출봉을 바라봤다.

터진목은 제주올레길 1코스인 광치기해변 일대에 자리 잡고 있다. 성산일출봉의 깎아지는 절벽이 쉼 없이 눈을 압도하고, 검은 모래 해변의 바람과 파도 소리가 연신 귀를 간질인다. 지금은 도로가 생겨 성산일출봉이 육지와 이어졌지만 예전엔 조수차에 따라 터진목에서 길이 이어지기도, 끊기기도 했다. 터진목이란 이름(트인 길목)도 그래서 붙었다.

ⓒ 소중한

터진목과 성산일출봉은 아름다움만큼이나 아픈 기억을 갖고 있다. 이 아름다운 곳이 대한민국 현대사의 비극인 '제주4.3'의 학살 현장이었다.

"저희는 들었습니다. 콩 볶듯 볶아대던 구구식 장총소리를, 미친개의 눈빛처럼 시퍼렇게 지나가던 징 박힌 군화 소리를. 그리고 보았습니다. 아닙니다.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와 어머니, 당신의 형과 아우와 당신의 삼촌과 조카와 아들과 딸과 손자와 손녀와 그리고 함께 있던 이웃들이 저 건너 조개 밭에 밀려와 썩어가던 멸치 떼처럼 널브러진 채 죽어가는 것을.

이유도 모른 채 끌려와 저들이 쏘아대는 총탄을 몸으로 막아내며 늙은 어머니를 구해내던 어느 이웃집 아들의 죽음도, 젖먹이 자식만은 품에 꼭꼭 껴안고 처절히 숨져가던 어느 젊은 어미의 한 맺힌 죽음도, 아버지가 아들을 아들이 아버지를,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피 토하듯 부르다가 눈을 감던 모습도 코흘리개 어린 우리는 기어이 그 모든 것을 보고 말았습니다. 서럽도록 보았습니다. 그리고 미치도록 울었습니다." - 터진목 '제주4.3 성산읍희생자위령비' 추모글 중

ⓒ 소중한

"1948년 9월 25일(음력) 아침에 군인들이 성산포 사람들을 총살하기 위해 트럭에서 해변으로 내리게 했을 때 그들의 눈앞에 보였던 게 이 바위(성산일출봉)다. 나는 그들이 이 순간에 느꼈을, 새벽의 노르스름한 빛이 하늘을 비추는 동안에 해안선에 우뚝 서 있는 바위의 친숙한 모습으로 향한 그들의 눈길을 상상할 수 있다.

(중략) 오늘날 이 잔인한 전쟁의 기억은 지워지고 있다. 아이들은 바다에서 헤엄치고 자신들 부모의 피를 마신 모래에서 논다. 매일 아침 휴가를 맞은 여행객들은 가족들과 함께 바위 너머로 솟는 일출을 보러 이 바위에 오른다. 숙청 때 아버지,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들을 잃은 시인 강중훈씨 조차 시간의 흐름에 굴복했다." - 장 마리 귀스타브 르 클레지오, <GEO> 2009년 3월호 '제주기행문' 중

터진목뿐만 아니라 성산일출봉 북쪽의 우뭇개 언덕과 옛 성산초등학교도 참극이 벌어졌던 곳이다. 이곳에서만 토벌대에 의해 제주도민 460여 명이 학살됐다.

ⓒ 소중한

성산일출봉을 마주했을 때 들 수밖에 없는 생각.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어떻게 그런 일이...' 가수 장재인씨도 이런 생각이 들었나보다. 그는 3일 제주문예회관에서 열린 '제주4.3 70주년 뮤직토크콘서트'에 참석해 4.3 전문가 김종민 전 기자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런 답이 돌아왔다.

"제주도 전역에서 4.3의 피해가 있었어요. 그런데 제주도 모든 곳이 아름답거든요. 관광객 분들은 '왜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 비극이 숨어 있을까'라고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죠. 모든 곳이 아름다웠고, 모든 곳에서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 소중한

ⓒ 소중한

제주4.3 70주년 기념사업위원회와 범국민위원회가 만든 <4.3이 머우꽈?> 마지막장엔 '4.3 희생자 분포지도'가 담겨 있다(정부 공식 희생자 1만4231명 표시, 미신고·미확인 포함 전체 희생자는 3만여 명으로 추정되며 이는 당시 제주도 인구의 10분의 1에 달하는 숫자). 희생자 수에 따라 붉은색으로 명암을 달리해 표시했는데, 연한 곳은 있어도 붉지 않은 곳은 없었다.

제주도 모든 곳이 아름다웠고, 모든 곳에서 사람이 죽었다.

ⓒ 소중한




#모이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선악의 저편을 바라봅니다. extremes88@ohmynews.com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