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중한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법원이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징역 24년형을 내리며 인정한 혐의는 광범위했다. 비선 실세와 공모해 뇌물을 수수한 것은 물론 정치 성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특정 세력을 배제하는 시대착오적 행위까지 단죄 받았다. 최측근과 가까운 인물에게 특혜를 주는 방식으로 권한을 남용한 일 역시 중형의 근거가 됐다. 하지만 이번 판결에서도 삼성은 면죄부를 받았다. 다른 기업들에게 적용된 뇌물죄가 유독 삼성만은 피해갔다.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22부(부장판사 김세윤)은 6일 "피고인의 범행이 하나둘씩 밝혀지면서 국정질서는 큰 혼란에 빠졌고, 결국 헌정 사상 초유의 탄핵 결정으로 인한 대통령 파면이라는 사태에까지 이르게 되었다"라며 "이러한 사태의 주된 책임은 헌법상 부여된 책무를 방기하고 국민으로부터 부여받은 지위와 권한을 사인에게 나눠준 피고인과 국정을 농단하고 사익을 추구한 최서원(최순실)에게 있다"라고 지적했다.
사사롭게 권한 남용... '블랙리스트' 지시 혐의도 인정가장 먼저 유죄 판단이 내려진 것은 국정농단의 시발점이었던 미르-K스포츠재단 부분이다. 재판부는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설립했다는 피고인 측 주장을 기각하고 설립 주체는 박근혜 청와대라고 판단했다. 기업들이 총 774억 원을 출연한 배경에는 청와대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부당한 불이익이 돌아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작용했다고 봤다. 따라서 박 전 대통령과 최씨, 안종범 전 청와대 경제수석이 공모해 직권을 남용하고 기업을 압박한 강요죄가 인정된다고 판시했다.
최씨가 영리 추구를 위해 설립한 회사를 부당하게 지원한 점도 인정됐다. 재판부는 박 전 대통령이 최씨가 설립·운영에 관여한 광고회사 플레이그라운드와 스포츠 매니지먼트 회사 더블루케이가 현대자동차와 포스코, KT 등과 사업 계약을 맺도록 강요했다고 결론 냈다. 다만 이런 행위는 사적 청탁으로는 볼 수 있지만 대통령의 권한 행사로는 볼 수 없어 직권남용에는 해당하지 않는다고 봤다.
비선실세 최씨와 친분이 있는 회사를 지원하거나, 그에게 도움을 준 인물을 승진하도록 압박하며 권력을 사사롭게 남용한 일도 단죄 대상이었다.
재판부는 박 전 대통령이 최씨와 친분이 있는 중소기업 '케이디코퍼레이션'의 제품을 납품 받으라고 현대자동차를 압박한 혐의를 인정했다. 박 전 대통령은 "기술 좋은 중소기업이라고 소개 받아 지원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최씨는 중소기업 기술이 좋은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는 전문성이 없는 사람"이라며 "최씨의 사적 부탁을 잘 알면서 납품 계약 체결을 요구한 거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최씨의 독일 생활에 도움을 준 이상화 전 하나은행 프랑크푸르트 지점장 승진을 하나금융그룹에 강요한 혐의 또한 인정됐다.
문화계 블랙리스트 실행의 지시자로 재판부는 박 전 대통령을 지목했다. '좌편향'되어 있는 문화 예술계를 시정해야 한다는 당시 청와대 기조가 박 전 대통령의 인식에서 비롯됐다는 게 판단 근거다. 나아가 청와대 직원들의 증원과 수석비서관회의 자료 등을 보았을 때 박 전 대통령이 구체적 계획과 조치 방안 등을 보고 받았다고도 인정했다. 재판부는 "국정 최고책임자인 대통령으로서 지위 등을 종합했을 때 피고인이 개개의 구체적인 지원 배제 행위마다 이를 인식하고 실행 행위를 분담하지 않았더라도 범행 전체에 관한 공모 및 기능적 행위 지배를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라고 했다.
블랙리스트 실행에 소극적이라는 이유로 문체부 1급 공무원 3명에게 사직을 강요한 혐의도 모두 유죄로 판단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이야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 <변호인>을 제작한 CJ그룹 이미경 회장에게 사퇴를 압박한 '강요미수' 혐의 역시 "충분히 인정된다"라고 봤다.
'승계작업' 존재는 부정... '삼성'만 웃었다가장 핵심 혐의인 뇌물 수수 부분에서는 기업별로 희비가 엇갈렸다. 재판부는 지난 최순실씨 선고 때와 마찬가지로 삼성의 제3자 뇌물죄의 핵심 전제인 '승계작업'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삼성이 미르·K스포츠 재단과 동계스포츠영재센터에 각각 건넨 204억 원과 16억2800만 원은 박 전 대통령이 수수한 뇌물에서 제외됐다. 최씨 쪽에 준 '정유라 승마지원금' 약 73억 원만 뇌물로 판단했다.
김 재판장은 "승계작업과 관련한 신문 보도나 경제 전문가의 언급을 자주 봤고, 일반인 입장에서는 당연히 승계작업이 진행되는 게 아니냐 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도 "그러나 형사 책임을 논하는 법정에서, 부정한 청탁의 대상이 되는 승계작업은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증명력 있는 증거에 의해 증명돼야 한다"라고 했다.
이어 그는 "대통령과 이재용 부회장이 단독 면담 당시 기준에서 이미 해결된 현안이었거나 다급한 현안이 아니었던 점" 등을 근거로 "검찰이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개별 현안의 진행 자체가 승계작업을 위해 이뤄졌다고 인정하기 부족하다"라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이 관련 내용을 뚜렷하고 명확히 인식하고 자기 직무집행이 대가 관계에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고도 덧붙였다.
하지만 롯데와 SK가 제3자에게 건넨 각각 70억 원(후에 반환)과 89억 원은 박 전 대통령이 수수한 뇌물로 인정했다. 삼성의 경우 단독 면담과 개별 현안 사이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은 반면 이들 기업의 현안은 대가성이 비교적 명확하다는 게 판단 이유였다.
구체적으로 신동빈 롯데 회장은 박 전 대통령과 단독 면담이 이뤄진 시기 그룹 내 지배력 강화를 위해 월드타워의 면세점 특허 재취득이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었다고 봤다. 이때 이뤄진 지원 요청은 기업 현안에 대한 대가라고 양쪽이 공통적으로 인식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SK 역시 박 전 대통령이 워커일 면세점 특허, 최재원 수석부회장 석방 등 현안을 미리 알고 그걸 들어주는 대가로 지원을 요구했다고 재판부는 판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