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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이 최근 삼성그룹의 노조파괴 문서를 입수해 수사에 착수했다. 삼성은 창립 이후 '무노조 경영'이라는 방침을 고수하며 노조 설립을 방해해 왔다. 하지만 헌법이 보장하는 노동자들의 권리를 영원히 차단할 수는 없었다.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노조가 이미 여럿이다. 그들이 노조를 만들고 삼성과 맞서왔던 과정이 모두 삼성노조의 역사다. 그들의 이야기를 연속 인터뷰를 통해 싣는다. [편집자말]
 금속노조 삼성서비스지회 곽형수 수석 부지회장.
금속노조 삼성서비스지회 곽형수 수석 부지회장. ⓒ 이희훈

"저 최종범, 그동안 삼성서비스 다니며 너무 힘들었어요. 배고파 못 살았고 다들 너무 힘들어서 옆에서 보는 것도 힘들었어요. 그래서 전 전태일님처럼 그렇진 못해도 전 선택했어요. 부디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더 이상 누구의 희생도 아픔도 보질 못하겠으며 조합원들의 힘든 모습도 보지 못하겠기에 절 바칩니다. 저 하나로 인해 지회의 승리를 기원합니다. 저의 시신을 찾게 되면 우리 지회가 승리할 때까지 안치해 주십시오."

두 명의 노동자가 있었다. 최종범은 삼성전자서비스 천안센터에서 일했다. 신혼이었고, 막 첫돌을 앞둔 딸이 있었다. 그가 노조활동을 하자 회사는 표적감사를 벌였다. 일감을 줄였다. 센터 사장은 폭언을 일삼았다. 마음이 여린 그는 모든 것을 속으로 삭였다. 그리고 전태일 열사가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인지 43년이나 지난 2013년, 그는 노조에 "도움이 되길 바란다"라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나의 33세였다.

염호석은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양산분회장이었다. 항상 살갑고 활기찬 사람이었다. 자신보다 남을 더 돌보는 사람이었다. 그가 동료들과 함께 노조를 설립한 지 1년 가까이 지났지만, 사 측의 압박은 더욱 강해졌다. 노조를 막기 위해 조합원이 많은 센터 문을 닫아버리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는 지난 2014년 "저를 받칩니다. 지회의 승리를 기원합니다"라며 자신의 시신을 노조에 맡겼다. 그의 나이 35세였다.

삼성전자서비스는 최근 검찰이 벌이는 삼성의 노조파괴 문건 관련 수사에 핵심적인 사업장이다. 삼성전자서비스의 문제는 지난 2013년 5월 <오마이뉴스>의 '삼성A/S의 눈물'이라는 기획을 통해 처음 폭로됐다. 서비스 기사들의 열악한 근로환경과 회사의 부당한 처우, 그리고 삼성전자서비스의 불법파견 의혹이 제기됐다. 500여 명의 노동자들은 삼성이 실제 사용자라는 것을 인정하라는 '근로자지위확인소송'에 나섰다. 그리고 이는 기획보도 이후 두 달 만에 노조 설립으로 이어졌다.

그동안 삼성에서는 여러 차례 노동자들의 자발적인 노조 설립시도가 있었다. 사측은 이를 조직적으로 방해했다. 결국, 노조 설립으로 이어지는 사례는 찾기 어려웠다. 그때까지 삼성에버랜드 노동자 4명이 만든 삼성지회가 유일하다시피 했다. 그런 상황에서 삼성전자서비스노조는 가히 폭발적이라고 할 기세로 설립됐다. 삼성은 자신들이 실사용자가 아니라며 노조의 지휘를 인정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삼성전자서비스는 삼성과 노조가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는 전선이 될 수밖에 없었다.

곽형수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수석부지회장은 그 전선 한가운데 있었다. 그는 설립 당시부터 노조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지난 9일 검찰의 신속하고 철저한 수사를 촉구하기 위해 대검찰청을 찾은 그를 만났다. 곽 수석부지회장은 인터뷰에서 자신의 마음속에 놓여있는 큰 돌 두 가지를 털어 놨다. 앞서 이야기 한 최종범, 염호석의 이야기다. 특히 그는 경찰의 '염호석 시신탈취 의혹 사건'을 이야기하면서 눈물을 글썽였다.

"표적감사, 지역 쪼개기로 시작된 노조 탄압"

곽 수석부지회장은 인터뷰에서 "이번 검찰 수사에서 반드시 (시신탈취 의혹에) 진상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분명히 검찰이 확보했다는 문건 안에 있을 것"이라며 "열사는 우리에게 자신을 맡겼는데 그걸 지키지 못했다. 장례나 제대로 치렀는지, 그 시신이 지금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 화장했다면 그 '분'이라도, 아니라면 열사의 시신이라도 돌려주실 간곡히 부탁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다음은 곽 수석부지회장과 나눈 일문일답이다.

- 2013년 삼성전자서비스지회가 설립됐다. <오마이뉴스>가 처음 위장도급, 열악한 근로조건 문제를 제기하고 불과 두 달 만에 수백 명의 조합원이 모였다. 노조하기 어렵다는 삼성에서 아주 드문 사례였다.
"업무 특성상 각 센터가 떨어져 있고, 일하는 구역도 다 정해져 있기 때문에 구성원들끼리 서로 잘 알 수가 없었다. 영등포와 양천 센터가 가깝지만 서로 모른다. 그래도 그 안에서 꾸준히 노조를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노사협의회 활동했던 분들을 중심으로 한 흐름이 있었다. 또 기술 교육을 위해 전국 센터에서 '기술 리더'를 뽑아 집체교육을 하면서 각 센터별로 교류가 생기기 시작했다. 여기가 또 하나의 흐름이 됐다.

<오마이뉴스>가 우리 문제를 처음 보도하고 국회에서 나서면서 노조결성에 불이 붙었다. 시민사회와 금속노조가 전국 센터 앞에 1인 시위를 조직했다. 그걸 통해 노조가입 운동을 벌였다. 그때부터 사측의 엄청난 압박이 있었다. '삼성에서 노조가 가능할 거 같은가', '삼성에서만 잘리는 게 아니라 대한민국 어디에도 발 못 붙인다' 같은 소리를 들었다. 이런 협박을 계속 듣고 있으니 위축만 되고 노조도 못 세울 수 있겠다는 불안이 있었다. 그래서 급하게 설립을 준비했다. 그랬음에도 7월 설립총회에 수백 명이 모였다. 이후 9월까지 1500명으로 급격히 늘어났다."

- 노조가 설립된 이후에도 삼성은 어떻게 나왔나?
"먼저 표적감사가 시작됐다. 보통 성수기가 지나면 감사가 나온다. 물량이 많을 때 허위신고를 했거나 잘못 처리한 게 있는지 한 번 살피는 과정이다. 이미 정상적인 감사가 끝났는데 또 감사를 했다. 조합원이 많은 센터에 집중됐다. 3~4년 전 문서까지 다 뒤졌다.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서 괴롭혔다. 조합을 탈퇴하면 표적감사를 면제해주겠다는 식으로 노조를 약화시켰다."

- 그 당시 '지역 쪼개기'도 이뤄졌다고 들었다. 어떤 방식이었나?
"각 센터별로 담당하는 구역이 있다. 100% 구역이 있다면 갑자기 50%를 다른 센터로 보내는 거다. 어제까지는 내가 담당했던 구역인데, 오늘은 다른 센터가 담당하게 됐다. 주로 조합원이 많은 센터의 구역을 비조합원들만 있는 센터로 넘기거나, 원청(삼성전자서비스 직고용) 직원들이 가져갔다. 구역이 줄어들면 일감도 준다. 서비스 기사들은 건당 수수료를 받아야 하는데 급속도로 줄어들게 됐다. 그때 30~50만 원짜리 월급명세서가 여러 장 나왔다. 평소 급여가 많아 저축하면서 살아온 것도 아니고, 당장 생활이 안됐다. 결국 여러 사람들이 노조를 탈퇴하게 됐다. 그렇다고 그 분들을 원망하거나 그러지 않는다. "

- 센터가 담당하는 구역은 일종의 원청과 협력업체의 계약인데 어떻게 그렇게 쉽게 변경할 수 있었나?
"서류상으로는 문제가 없다. 협력사(각 센터) 사장이 갑자기 자기 구역 반납요청을 한다. 주로 인력부족을 이유로 든다. 그러면 그걸 원청이 받아서 다른 센터와 계약하는 식으로 구역을 뺏어가는 거다. 이게 정말 말이 안 되는 이유는 협력사 사장들도 서비스 건수를 기준으로 이익을 가져간다. 아무 문제 없는 구역을 원청에 반납한다는 건 자기 이익을 버리겠다는 얘기다. 당장 사장들도 타격을 입는 구조인데, 결코 스스로 반납할 이유가 없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겠나. 결국, 삼성이 실질적인 사용자라고 봐야 하지 않겠나."

"최종범, 그 모멸감을 혼자 버티다 떠났다"

 2013년 12월 24일 오후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사옥 앞에서 열린 삼성전자서비스 협력업체 직원 고 최종범 씨 노제에서 유가족이 고인의 영정 사진을 모시고 있다.
이날 장례식은 최종범 씨가 근로조건 개선과 노동조합 활동 보장 등을 요구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지 50여 일만에 장례식이 치러졌지만, 삼성전자는 정문 앞에 차벽을 세우고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했다.
2013년 12월 24일 오후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사옥 앞에서 열린 삼성전자서비스 협력업체 직원 고 최종범 씨 노제에서 유가족이 고인의 영정 사진을 모시고 있다. 이날 장례식은 최종범 씨가 근로조건 개선과 노동조합 활동 보장 등을 요구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지 50여 일만에 장례식이 치러졌지만, 삼성전자는 정문 앞에 차벽을 세우고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했다. ⓒ 유성호

- 그런 과정에서 조합원 숫자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었다. 그리고 천안센터에 최종범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있었다.
"그 당시에 최종범 열사가 고객에게 클레임(항의)이 걸린 일이 있었다. 저녁에 집에서 가족들과 식사 중인데 센터 사장이 전화를 해서 입에 담기 어려운, 모욕적인 말을 많이 했다. 부인과 딸 앞에서 얼마나 모멸감을 느꼈을지... 그 와중에 그걸 녹음했다. 그래서 그걸 공개를 해야 하나 고민이 많았다. 최종범 열사는 마음이 정말 여렸다. 결국, 그 모멸감을 혼자 버티다가... 많이 힘들었을 거다."

*기자주 : 최씨는 <오마이뉴스>에 센터 사장과 통화한 녹취 파일을 제보했다. 하지만 최씨가 최종적으로 보도를 원치 않아 당시에는 공개하지 못했다. 해당 녹취에서 센터 사장은 최씨에게 고객 항의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걸 지적하며 "임마 새끼야. 고객이 주장하는 게 있으니까(가서 빌지) 네가 지져 불든지 칼로 찔러서 꼭꼭 조사서 갈기갈기 찢어서 죽여 벌든지 그렇게 하던지 해야지, 왜 말이 나오게 해가꼬 얘들이 가서 빌게 만드냐 이거야. 종범아. 그렇잖아. 죽이려고 갈기갈기 찢어 죽여 버리든지 해야지"라고 폭언을 쏟아냈다. (관련 기사 : 그는 왜 죽음을 택했나?)

- 곧바로 '최종범 열사 대책위'가 꾸려졌다. 서울 서초동 삼성전자 본관 앞에서 노숙농성을 했다. 그때 심경이 어땠나?
"우리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상태였다. 단체협약도 없고, 타임오프도 없었다. 조합원들이 2박 3일씩 연차를 써서 서울로 올라왔다. 지하철을 타고 살면서 처음 시민들에게 호소도 해봤다. 가장 견디기 힘든 건 추위였다. 11월~12월이었지만 그해가 유난히 춥고 눈이 많이 왔다. 그런데 경찰이 침낭까지 다 뺏어 갔다. 조합원들이 덜덜 떨면서 바닥에 까는 비닐 하나 덮고 잠을 잤다. 정말 사람이 할 짓이 아닌데, 우리는 할 수 있는 게 그거밖에 없었다. 한여름에도 그 앞(삼성전자 서초사옥)을 가면 한기가 느껴진다. 아직도 춥다. 몸이 덜덜 떨린다."

- 결국 그해 겨울 노조 설립 후 처음으로 사측과 합의가 이뤄졌다. 협력사와 합의하는 형태였지만 내용은 삼성이 개입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이었다.
"맞다. 우선 외부 수리업무에 리스 차를 제공하기로 했다. 비수기에는 인센티브 제도를 적용하기로 했다. 이건 형태만 협력사와 합의하는 것이지 내용은 삼성이 합의를 했다고 봐야 한다. 리스 차나 인센티브 제도는 협력사 차원에서 이뤄질 수 없는 내용이다. 삼성이 하겠다고 하니까 꼭두각시인 협력사가 나서서 합의를 한 것이다."

- 그렇게 한고비를 넘겼다고 생각했는데, 끝이 아니었다.
"그 합의를 이행시키기 위해 또다시 투쟁해야 했다. 또 각 센터별로 교섭을 벌여야 하는데, 사측이 계속 지연을 시켰다. 그리고 다시 전방위적인 압박이 시작됐다. 부산 해운대 센터를 시작으로 경기도 이천, 충남 아산 센터가 차례로 문을 닫았다. 모두 조합원들이 있던 곳이다. 우리는 회사가 노조를 막으려고 문까지 닫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우리가 하는 서비스는 고객들의 필요에 따른 거다. 해운대 센터 경우 서울 강남 다음으로 고객 수요가 높은 곳이다. 여기 문을 닫고 다른 지역 센터로 보낸다는 걸 어떻게 상상할 수 있겠나. 정말 삼성은 노조를 파괴하기 위해서 어떤 것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인식을 노동자들에게 심어준 거다."

- 그 과정에서 2014년 5월 염호석씨가 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길이 안 보였다. 정상적으로 급여를 받아도 생활하기 벅찬데, 일감이 줄고 월급도 줄었다. 센터 문까지 닫아버렸다. 이 전방위적인 탄압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그야말로 우리가 넘지 못할 벽으로 느껴졌다. 그때 5월 14일, 15일 수원 삼성전자 앞에서 집회를 하고 나오는데 염호석 열사가 나를 뒤에서 안아주며 '부지회장님 힘내세요'라고 했다. 그러고 나서 떠났다.

난 해운대에 있었고, 염호석 열사는 경남 양산분회장이었기 때문에 서로 잘 알았다. 정동진에서 휴대전화 마지막 신호가 잡혔다는 얘기를 듣고 갔다. 차로 다니면서 수색을 하는데 딱 한곳만 못 갔다. 차가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다. 거기서 염호석 열사가 발견됐다. 그게 아직도 죄책감으로 남아 있다. 그때 내가 거길 봤으면, 우리 호석이가 지금 살아있지 않았을까..."

"삼성전자서비스는 빙산의 일각, 실체 다 밝혀야"

 2014년 5월 30일 전국금속노조 조합원과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조합원들이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 앞에서 '염호석 열사정신 계승 경찰 규탄 금속노조 결의대회'를 열고 경찰의 시신 탈취 만행을 규탄하며 경찰청장 사과와 책임자 처벌 등을 요구하고 있다. 
이날 전규석 금속노조 위원장은 "염호석 열사의 시신과 유골이 (경찰들에게) 강제적으로 탈취돼 그 혼이 어디로 가 있는지 잘 모른다. 분명한 것은 열사의 시신을 경찰이 개입해서 강제적으로 유골까지 빼돌린 데에는 정권의 실세와 삼성이 개입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전 위원장은 "이로 인해 지난주 경찰청장의 사과와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지만 경찰청의 태도는 집회를 불허하며 불법을 조작하고 있다"며 "경찰이 시신 탈취의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박근혜에게 그 책임을 묻겠다"고 강조했다.    
이어 전 위원장은 "열사의 시신이 없다고 열사의 정신이 없는 것은 아니다"며 "염호석 열사가 죽어가면서 외쳤던 삼성전사서비스지회의 노동조합이 굳건하게 임단협 체결해서 삼성전자서비스지회 투쟁 승리할 때 힘차게 싸우자는 열사의 염원을 받드시 실현하자"고 결의를 다졌다.
2014년 5월 30일 전국금속노조 조합원과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조합원들이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 앞에서 '염호석 열사정신 계승 경찰 규탄 금속노조 결의대회'를 열고 경찰의 시신 탈취 만행을 규탄하며 경찰청장 사과와 책임자 처벌 등을 요구하고 있다. 이날 전규석 금속노조 위원장은 "염호석 열사의 시신과 유골이 (경찰들에게) 강제적으로 탈취돼 그 혼이 어디로 가 있는지 잘 모른다. 분명한 것은 열사의 시신을 경찰이 개입해서 강제적으로 유골까지 빼돌린 데에는 정권의 실세와 삼성이 개입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전 위원장은 "이로 인해 지난주 경찰청장의 사과와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지만 경찰청의 태도는 집회를 불허하며 불법을 조작하고 있다"며 "경찰이 시신 탈취의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박근혜에게 그 책임을 묻겠다"고 강조했다. 이어 전 위원장은 "열사의 시신이 없다고 열사의 정신이 없는 것은 아니다"며 "염호석 열사가 죽어가면서 외쳤던 삼성전사서비스지회의 노동조합이 굳건하게 임단협 체결해서 삼성전자서비스지회 투쟁 승리할 때 힘차게 싸우자는 열사의 염원을 받드시 실현하자"고 결의를 다졌다. ⓒ 유성호

- 또다시 '열사 투쟁'이 시작됐다. 염호석씨는 유서에 "노조가 승리할 때까지 시신을 안치해 달라"고 했다.
"같은 내용으로 부모님께도 별도의 유서를 남긴다. '삼성전자서비스지회가 좋은 결과가 나온다면 그때 장례를 치러 주세요'라고 했다. 강릉 의료원에서 시신을 인수받고, 열사의 아버님께 합의서를 받았다. 노조에 장례절차를 위임한다는 내용이었다. 서울 의료원으로 옮겨왔다. 열사 어머님은 장례절차 위임서를 써 주시고 집으로 내려가셨다. 하지만 아버님은 남아 계시면서 우리에게 '돈을 얼마나 받아 줄 수 있나'라고 물어보기도 했다.

그러다 갑자기 그날 오후에 경찰 250명이 병원에 들이닥쳤다. 일요일이었다. 열사 아버지 전화 한 통을 받고 달려왔다고 한다. 미리 준비하지 않았다면 결코 가능한 일이 아니다. 어디 경찰이 일반 사람 전화 한 통에 아무런 조사도 없이 그렇게 병력을 투입할 수 있나. 정말 상상도 못 한 시신탈취가 일어난 거다. 과거 민주화 운동 시기에는 국가가 그런 시신탈취를 했다고 알고 있다.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세상이 변한 그때 일개 기업이 시신을 탈취할 것이라고는 정말... 믿을 수가 없었다. 그 일로 장례 방해 혐의로 노조 여러 간부가 구속된다. 그때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전 조합원이 일을 멈추고 상경해 삼성 본관 앞에 모여 싸우기 시작했다."

- 그 사건 진상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염호석 열사 사건 진상조사위'가 국회를 중심으로 구성됐지만, 결국 실체를 밝히지는 못했다. 이번 검찰 수사에서 반드시 진상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분명히 검찰이 확보했다는 문건 안에 있을 거다.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고, 우리는 시신도 찾지 못했다. 열사는 우리에게 자신을 맡겼는데 그걸 지키지 못했다. 장례나 제대로 치렀는지, 그 시신이 지금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 화장을 했다면 그 분이라도, 아니라면 열사의 시신이라도 돌려주실 간곡히 부탁하고 싶다."

- 검찰 수사가 진행 중이다. 바람이 있다면?
"6000건의 문서가 나왔고, 삼성전자서비스 지회 관련 내용이 많다고 들었다. 하지만 빙산의 일각일 것이다. 검찰이 압수수색한 직원이 우리를 담당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삼성지회, 삼성에스원지회, 삼성웰스토리지회 다 담당자가 따로 있었을 거다. 그리고 훨씬 그 이전부터 노조파괴가 진행돼 왔다. 삼성그룹 전체에, 삼성의 역사 전반에 노조 탄압의 진실이 밝혀져야 한다. 우리는 두 명의 열사가 나왔고, 조합원이 1500명에서 700명으로 줄었다. 탈퇴한 조합원들은 계속 회사에 남아 있었을까? 아니다. 탈퇴한 조합원 90%가 퇴사했다. 노조를 탈퇴할 때는 잘해주겠다고 꼬시지만, 탈퇴하고 나면 이제 회사에서 쫓아내려고 한다. 앞으로 잠재적인 조합원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하고 내쫓는 거다.

'S그룹 노사전략' 문건이 2013년에 공개되고, 실제로 조장희 삼성지회 부지회장이 부당해고라고 법원의 판단까지 받았지만, 고용노동부는 삼성에 면죄부를 줬다. 검찰도 관련 수사를 다 기각했다. 이번에도 어설프게 실무자, 담당자 몇 명 벌하고 끝낼 거면 안 하는 게 낫다. 그러면 삼성은 더 교묘하고 치밀하게 노조를 와해시키려고 할 것이다. 이 기회에 '무노조 경영'이라는 반헌법적 경영철학을 끝내야 한다."

- 삼성에게도 하고 싶은 말이 있나?
"우리가 그동안 수없이 삼성과 싸웠지만 단 한 번도 불매운동을 펼친 적이 없다. 삼성이 망하길 바라는 게 아니다. 정상적인 기업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법 위에 군림하지 않고, 노동자의 권리를 짓밟지 않는 기업이 됐으면 한다. 그게 국민들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삼성에서 노조하기 ②] 연승종 삼성에스원지회 부지회장
"18년 동안 안 보이던 노조가 나타났다" 삼성이 직원 불만을 급하게 해결한 이유


#삼성 노조 탄압#곽형수#염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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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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