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5월 1일자로 국립묘지로 승격되는 대구 신암선열공원의 입구 모습.
5월 1일자로 국립묘지로 승격되는 대구 신암선열공원의 입구 모습. ⓒ 정만진

대구 신암선열공원에 소설가 최고(崔杲)의 묘소가 있다. 이는 최고가 단순한 소설가가 아니라 독립운동가였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1960년대 중반 이후 대구에 거주하면서 교사 겸 소설가로 활동했던 최고 지사는 1924년 11월 19일 서울에서 출생했고, 1988년 8월 23일 타계했다. 국가보훈처 공훈록은 최고 지사를 '운동 계열 : 학생 운동 / 훈격(연도) : 애족장(1990)'으로 소개하고 있다.

최고 지사는 경복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1939년에 동교생 이현상·장의찬·명의택·주낙원·성익환·홍건표 등과 동지가 되어 조국 광복을 위해 친일파 및 일본인 고관을 처단하기로 결의하고 동지 포섭 등 준비 작업에 착수하였다.

 최고 지사의 묘소 앞 표지석
최고 지사의 묘소 앞 표지석 ⓒ 정만진
소설가로만 알려진 최고, 독립투사였다

그 후 목적 완수를 위해 계획을 진행하던 중, 자신은 1941년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에 진학하고 동지들도 각각 전문학교에 진학하게 되자 이들은 동년 가을에 당시 봉래동(현재 만리동)에 있던 주낙원의 집에 모여 정식으로 항일 학생 결사인 흑백당(黑白黨)을 결성하고 부서 및 선언문, 강령, 규약 등을 정하였다.

이들은 기본강령으로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칠 것, 절대 비밀, 책임 완수 등을 정하였고, 실천 행동 방략으로 친일파 처단 명부를 작성하였으며, 일인이 밀집하여 살고 있는 당시 욱정(현 남산동 부근) 일대를 방화하여 일인을 섬멸하는 계획도 세웠다. 이들은 일제의 패망과 조국 광복이 가까웠음을 알리는 격문을 각처에 뿌려 민족의 각성을 촉구했다. 그는 남상갑과 함께 자금을 모으는 일과 격문의 문안을 맡았다.

학교 무기고에서 소총 등을 빼내어 전투용으로 보관

흑백당은 특공대를 조직하여 경복중학교 무기고에서 교련용 38식 소총 2자루와 실탄 및 총검을 빼내기도 하였다. 그런데 1943년 10월에 흑백당의 동조자였던 보성전문학교 학생 김창흠이 귀향열차 안에서 우리말로 일제를 욕하다가 일경에 피체되어 가택수색을 당하였는데 이때 흑백당에 관한 문서가 발각됨으로써 흑백당의 조직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에 당원들은 긴급 모임을 갖고 국내 활동이 어려워지게 되었으므로 중국으로 건너가 광복군에 투신하기로 결정하였다.

 입구로 들어가면 바로 만나게 되는 안내판과 좀 더 안에 있는 사당 단충사가 보이는 신암선열공원 풍경
입구로 들어가면 바로 만나게 되는 안내판과 좀 더 안에 있는 사당 단충사가 보이는 신암선열공원 풍경 ⓒ 정만진

당원들은 일단 당원 김성근의 자형이 있는 만주 신민에서 집결하기로 하고 1943년 12월초부터 1∼2명씩 조를 나누어 떠났다. 그는 명의택과 한 조를 이루어 출발하였다. 그런데 이 사실을 탐지한 일경의 추격에 의해 그를 비롯한 선발대원은 1944년 1월경 만주의 북경·심양·신민·승덕 등지에서 전원이 피체되어 국내로 이송되었다.

그는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44년 12월 대전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5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8·15광복으로 출옥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폭탄을 비슬산에 숨겨둔 채 때를 기다린 조기홍 지사

 조기홍 지사의 묘소 앞 표지석
조기홍 지사의 묘소 앞 표지석 ⓒ 정만진
최고 지사의 묘소 서쪽은 조기홍(趙氣虹) 지사의 묘소이다. 지사는 1883년 7월 24일 대구에서 태어났고, 1945년 8월 2일 별세했다. 지사는 1919년 임시정부 특파원 강태동·이정래로부터 동포 관리들의 사직을 권고하는 전단과 임시정부 내무총장 이동녕 명의의 독립운동 촉구 포고문, 상인들의 폐점을 권유하는 포고문 등을 교부받았다.

그는 최익무·서상하·이종선과 함께 〈대한민보〉·독립축하가와 포고문을 등사판으로 수 백매씩 복사한 후 대구 시내 각 사립학교와 상점에 배포하여 민족의식의 고취에 힘썼다. 이 일로 일경에 피체되어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0년 6월 하순 양한위·권태일 등과 대구 남문시장에서 여러 차례 모임을 갖고 독립운동 방안에 관하여 협의하였는데, 조국 독립을 촉진하기 위해서는 일제에 협력하는 한국인 관리를 처단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데 뜻을 같이 하였다. 그러나 폭탄을 제조해서 대구 남방 비파산에 숨겨둔 채 기회를 기다리던 중 일경에 체포됨으로써 계획은 좌절되었다. 이 일로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 6월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그는 항일 독립 운동을 계속하다가 1943년 다시 일경에 피체되어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 결국 지사는 고문 후유증으로 1945년 8월 2일 순국하였다. 8월 2일이면 나라가 독립을 쟁취하기 불과 며칠 전이다. 그가 이 빛나는 날을 끝내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일을 생각하면 묘소에 참배 온 후대 사람의 마음은 저절로 애잔해진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조기홍 지사는 폭탄을 비슬산(국가보훈처 공훈록의 표현으로는 비파산)에 숨겨둔 채 기회를 기다렸다. 사진은 비슬산 대견사터 일원의 거대 바위 '토르(바위산)'를 보여주고 있다. 토르는 빙하기 암괴류의 일종이다.
조기홍 지사는 폭탄을 비슬산(국가보훈처 공훈록의 표현으로는 비파산)에 숨겨둔 채 기회를 기다렸다. 사진은 비슬산 대견사터 일원의 거대 바위 '토르(바위산)'를 보여주고 있다. 토르는 빙하기 암괴류의 일종이다. ⓒ 정만진

조기홍 지사의 묘소 아래에 있는 김석용(金碩用) 지사의 묘소로 내려간다. 김석용 지사는 1924년 2월 16일 경남 통영에서 출생했고, 1990년 7월 24일 타계했다.  

만 16세이던 1939년 3월에 일본으로 건너간 지사는 18세이던 1941년 6월 경도(京都)의 도촌토공에서 일하면서 궁진 중학을 졸업했다. 지사는 이 회사에서 전경원을 만나 독립운동에 헌신하기로 결의하였다.

 김석용 지사의 묘소 앞 표지석
김석용 지사의 묘소 앞 표지석 ⓒ 정만진
이들은 김말도·이상문 등 여러 동지를 확보한 뒤, 그해 9월부터 여사군 소재 미륵신사 경내에서 여러 차례 회합하면서 민족정신 고취 및 독립운동 방략을 논의하였다. 이들은 민족차별 철폐, 징병 제도 반대, 항공병 지원으로 일본군 기지 폭격, 일본 경찰에 들어가 대대적인 독립운동 전개 등을 펼치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러던 중 1944년 6월 일본 경찰의 토공 숙사 수색 때 전경원의 일기장이 발견됨으로써 동지들이 모두 체포되었다. 그는 오랜 기간 심한 고문을 받았고, 판결은 1년도 더 지난 1945년 9월에 이르러 경도지방재판소에서 받았다. 1년에 걸친 악랄한 고문과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의 형을 받고 출옥한 그에게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 표창)을 수여하였다.

52기에 이르는 독립지사들의 묘소를 계속 소개 중

대구 신암선열공원은 오는 5월 1일부터 국립묘지로 승격된다. 그 날 이후 신암선열공원은 국내 유일의 독립운동가 전용 국립묘지가 된다.

필자는 지난 4월 8일 신암선열공원에 대한 첫 기사 <유일한 독립운동가 전용 묘지, 비문은 '안습'>을 쓴 이래 오늘까지 모두 스물네 분의 독립지사를 지면에 게재했다. 독립운동가들이 영면해 계시는 국립묘지를 그냥 휙 둘러보고 돌아서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하는 마음에서, 할 수 있는 만큼 꼼꼼하게 그 분들의 생애와 업적을 독자들에게 소개했다. 그래도 아직 스물여덟 분을 더 소개해야 한다. (계속)

덧붙이는 글 | 국가보훈처 누리집 '독립유공자 공훈록' 참조



#최고#신암선열공원#김석용#조기홍#국립묘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