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4월 27일은 분단의 상징이었던 판문점에서 남과 북의 정상이 만나는 역사적인 날이다. 부디 회담의 성공으로 '4.27'이 역사에 길이 기록될 평화의 날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기사를 쓴다. - 기자 말[기사 보강 : 26일 낮 12시 1분]정전회담 '소사'(小史)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한 한국전쟁은 처음에는 북에서 남으로, 인천상륙작전 이후는 남에서 북으로 해일처럼 한반도를 덮쳤다. 하지만 1950년 초겨울부터 중국군이 참전한 이후 유엔군의 1951년 1.4 후퇴로 양측은 38선 일대에서 교착했다.
유엔군과 공산군 양 측이 38선을 사이 두고 지루한 공방전을 펼쳤지만 피차 개전 초기와 같은 전선의 급격한 변동은 없었다. 그 무렵 전선은 서로 상대의 샅바를 거머쥔 채 상대방 허점만 노리며 씩씩거리는 씨름꾼의 형세였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1년이 지난 1951년 6월부터 유엔군과 공산군, 양 측은 그제야 비로소 단시일 내 상대편을 군사력으로 굴복시키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달았다.
그런 데다가 전선도 장기간 북위 38도선 일대에서 교착되자 국제 외교가에서는 정전 논의가 슬그머니 수면 위로 떠올랐다. 특히 한국전쟁 발발 당시 미국인들의 전쟁 지지도는 65%였으나, 1951년 2월에는 39%로 떨어졌다. 게다가 대통령 트루먼의 지지도마저도 전쟁 초기 43%에서 1951년 5월에는 24%로 곤두박질쳤다.
그러자 미 국무장관 애치슨은 1951년 6월 초, 당시 유엔주재 소련 대사 야곱 말리크와 비밀리에 접촉해 정전협상을 제의키로 했다. 미소간 비밀 접촉 끝에 사전 조율한 각본대로 주유엔 소련대사 말리크가 신호탄을 쐈다. 그는 유엔방송을 통해 '평화의 가치'라는 제목의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소련 인민은 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종용하고, 교전국 간의 정전협상 토의가 시작되기를 희망한다."
이 한 마디는 미국으로서는 '불감청고소원'이었다. 당시 세계 최강을 자부하던 미국은 한국전쟁에서 체면상 먼저 '정전'이라는 말을 차마 먼저 꺼낼 수 없었다. 그런 가운데 대외적으로 소련 측에서 이를 먼저 제의하자 미국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미국은 자신들의 본심을 숨긴 채 몽니를 부렸다. 그런 뒤 겉으로는 말리크 소련대사의 체면을 살려주는 척, 의뭉스럽게 슬그머니 정전협상 테이블에 나갔다.
개성에서 최초 정전회담이 열리다국제 여론 역시 대체로 조속한 종전 방향으로 흘러갔다. 말리크 소련대사의 연설이 있은 지 얼마 뒤인 1951년 6월 29일 유엔군 총사령관 리지웨이는 원산 앞바다에 정박 중인 덴마크 병원선에서 정전회담을 열자고 제의했다. 하지만 공산군 측이 개성에서 회담하자고 제의했고, 이에 따라 1951년 7월 10일, 개성 봉래장에서 유엔군과 공산군 양측이 최초의 정전회담을 열었다.
이에 대한민국 이승만 대통령은 완강하게 반대 의사를 표시했다. 전국에서는 연일 휴전반대 관제 데모가 일어났다. '통일 없는 휴전은 있을 수 없다'며 학생들까지 나섰다. 하지만 미국은 이를 철저히 묵살했다. 개성에서 정전회담이 열리자 유엔군과 공산군 양측은 본회담 시작 17일 만에 5개 항의 의제와 의사일정에 전격 합의했다.
한 서방 기자는 한국전쟁 정전회담 취재 차 3주간의 출장 명령을 받고 한국에 왔다. 그만큼 서방 대부분 나라는 한국전쟁의 정전회담이 쉽게 끝날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섣부른 판단이었다. 막상 정전회담에 참석한 양측은 서로 전장(戰場)은 아니더라도, 정전협상 테이블에서만은 이기고 싶었다.
특히 미국은 그들이 깔보던 북한과 중국과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는 것 자체에서 치욕을 느꼈다. 그래서 미국은 그들의 구겨진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정전회담에서 상대방에게 줄곧 무리한 요구를 했다. 그들은 상대에게 최대의 피해를 주면서 정전회담을 우아하게 끝내고 싶었다.
한편, 중국도 이참에 국제 사회에 '종이 호랑이'로 실추된 자존심을 살리고자 미국의 무리한 요구를 즐기면서 일축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정전회담장에서 미국과 대등하게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는 모습을 서방 기자들에게 보여주면서 중국인 특유의 만만디(慢慢的)를 즐기는 모양새였다.
정전회담은 전쟁을 멈추기 위한 회담이 아니라, 교전국의 체면을 세우기 위한 또 하나의 치열한 전쟁터가 됐다. 그래서 한국전쟁 정전회담은 그 어느 전쟁 강화회담보다 매우 지루하고도 잔인하게 그리고 장기간 계속됐다.
정전회담장에서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은 특히 포로 송환문제를 둘러싸고 팽팽한 줄다리기를 이어갔다. 양측은 서로 상대를 압박하고자 무력 공세도 서슴지 않았다. 유엔군은 폭격기로 북한의 수풍·장진댐을 비롯한 수력발전소를 폭격했고, 그밖에 군수공장에도 폭탄을 쏟아부었다. 공산군도 이에 맞서 지상공세를 강화했다. 정전회담 기간 중 전선에선 포로로 잡힌 병사보다 훨씬 더 많은 병사들이 죽어갔다.
판문점, 새로운 정전회담장이 되다1951년 8월 공산군 측은 정전회담이 열리고 있는 개성 일대에 대한 유엔군의 야간 폭격에 격분해 정전회담 결렬을 선언했다. 그러자 1951년 9월 6일, 유엔군 측 리지웨이 사령관은 이를 타개하고자 회담장소를 바꾸자고 제의했다. 그러자 공산군 측은 1951년 10월 7일, "회담장소를 개성 동남쪽, 송현리 서북쪽에 있는 널문리로 정하자"라고 회답했고 유엔군은 이에 동의했다.
이로써 정전회담장은 개성에서 널문리로 옮겨졌다(해방 이전 행정구역상 주소는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널문리). 당시 널문리는 초가집 세 채와 주점 한 곳이 있었을 뿐이었다. 유엔군은 작은 마을 앞 콩밭에 회담장을 지었다. 유엔군, 중국군, 조선인민군이 당사자로 참여하는 이 정전회담의 회담장은 영어, 중국어, 한글로 표시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런데 '널문리'라는 지명은 중국어로 표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당사자들이 의논한 결과 널문리에서 널문, 곧 '판문(板門)', 주점(酒店)에서 점(店)을 떼어낸 뒤 '판문점(板門店)'으로 작명했다. 이리하여 영어 표기는 'Panmunjom' 중국어로는 '板門店' 한글로는 '판문점'으로 확정했다.
하지만 양측 대표들은 회담장소가 바뀌어도 여전히 정전회담장에서 지루한 입씨름만 벌였다. 그런 가운데 전쟁 당사국들에게 정전회담을 조속히 매듭지어야 하는 사정이 발생했다.
미국에선 1952년 말 대통령 선거에서 아이젠하워가 당선하면서 상황이 급반전됐다. 아이젠하워는 대통령 선거에서 한국전쟁의 종전을 선거 공약으로 내세웠다. 미국인들은 장진호 전투와 1.4후퇴의 악몽을 잊지 않고 있었던 터라, 아이젠하워의 대선 종전 공약은 설득력이 있었다.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출범하지마자 한국전쟁을 끝내고자 적극 노력했다. 아이젠하워는 취임 전 대통령 당선자 신분으로 한국 전선을 조용히 시찰하기도 했다.
그런 데다가 소련에선 1953년 3월에 스탈린 수상이 사망했다. 스탈린의 사망은 미국에 대한 소련의 냉전 기류를 완화시켰다. 중국 역시 내전을 마친 지 1년 만에 한국전쟁에 참전한 터라 피폐한 국내 사정이 있었다. 한국전쟁을 마냥 오랫동안 끌고 갈 수 없었다.
'정전'이었다, 결코 '평화'가 아니었다이런 상황에서 1953년 5월, 공산군 측은 유엔군 측의 주장을 반영한 포로교환 수정안을 제시했다. 그 수정안에는 '송환을 원치 않는 포로는 중립국 포로송환위원회에 넘겨 처리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 수정 포로교환 협정이 체결됨으로서 비로소 정전회담의 최대 난제가 해결될 실마리가 보였다.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정각. 동쪽 입구로 유엔군 측 수석대표 해리슨 장군과 실무자가 판문점 정전회담장으로 입장했고, 그와 동시에 서쪽 입구에서 공산군 측 수석대표 남일과 실무자가 들어와 판문점 정전회담장에 착석했다. 양측 대표는 서로 목례도, 악수도 없는 시종 냉랭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양측 대표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정본 9통, 부본 9통의 정전협정문에 부지런히 서명했다.
양측 대표가 서명을 마치자 양측 선임 참모장교가 그것을 상대편에 건넸다. 그런 뒤 그들은 정전협정서를 교환하고 아무런 인사도 없이 곧장 회담장을 빠져나갔다. 그때가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12분이었다. 이날 정전협정 조인식은 회담장 분위기조차 글자 그대로 '정전'이었지 결코 '평화'가 아니었다.
한국전쟁 정전협정은 소련이 정전협정을 제의한 지 25개월 만에, 모두 765차례 회담 끝에 이뤄졌다. 1953년 7월 27일 오후 10시, 그제야 정전협정으로 새로이 만들어진 155마일 휴전선에 비로소 총성이 멎었다.
세계적인 명소가 되기를유엔군과 공산군은 이후 정전협정 기구들의 원활한 회의진행을 위해 정전회담장을 옮겼다. 위도는 그대로 유지한 채 경도를 옛 판문점 회담장에서 동쪽으로 500미터 떨어진 지점에 새 판문점 정전회담장을 지어 이동한 것. 그런 뒤 정전회의장 건물과 마당을 공동경비구역(JSA)으로 설정했다.
공동경비구역 북쪽에 있는 '판문각'은 1964년에 지은 육각정을 헐고 1969년 9월에 신축한 뒤 1994년에 증축한 3층 석조 건물로 북한 대표부가 쓰고 있다. 남쪽에 있는 '평화의집'은 1989년 12월에 준공한 3층 석조 건물로 남측 대표부가 쓰고 있다. 이번에 이곳이 역사적인 4. 27. 남북정상회담장이 된다.
사람 팔자도 알 수 없듯이, 땅 팔자도 알 수 없다. 전쟁 전 개성 동남쪽 송현리 서북쪽에 초가 세 채의 자그마한 널문리 마을이 세계의 이목을 집중한 정전회담장으로, 그동안 양 진영의 첨예한 대립 장소로 65년의 명맥을 이어왔다.
이번 2018년 4월 27일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남북의 8000만 겨레는 한결같이 '판문점'이라는 지명이 '분단'과 '대립'의 상징에서 '화해'와 '평화'의 상징 땅으로 도약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리라.
문재인 대한민국 대통령과 김정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국무위원장은 이러한 8000만 겨레의 성원에 보답해야 한다. 아무쪼록 화해와 평화의 큰 발자취를 남겨주시길 기원한다. 그리하여 판문점은 우리 겨레 화해의 광장, 만남의 광장으로, 후일 '4.27 평화의 광장'으로 명명, 세계적인 명소가 되기를 기대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쓰고자 다음의 도서를 참고했음. 1) 신광수 엮음 눈빛출판사 <끝나지 않은 전쟁> 2) 박태균 지음 책과함께 <한국전쟁> 3) 이태호 엮음 눈빛출판사 <판문점과 비무장지대 4) 강준만 지음 인물과 사상사 <한국현대사산책 1950년대 1권>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