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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님께서 고시원 방에 빨래 봉을 설치해주셨다. 빨래를 너무 많이 걸어두면 봉이 휘거나 빠질까 봐 조금씩 자주 빨래를 널어두는 편이었다. 그날도 변함없이 빨래를 주렁주렁 널어놓았다. 정수기에서 뜨거운 물을 받으려고 양손에 텀블러와 컵을 들고 공용부엌으로 나갔다. 방에 들어왔는데 빈손이 없다보니 우선 책상에 컵을 올려두었다. 문을 닫으려고 뒤돌았는데 빨래가 시야를 완전히 가려버렸다. 그리고 한 걸음을 더 내딛는 순간, 철문에 이마를 꽝 부딪치고 말았다. 

머리가 지끈지끈거리는 통증을 넘어서는 색다른 아픔이었다. 팔뚝을 이마에 세게 밀착시켜 엉거주춤한 자세로 몇 초를 버텼고, 괜찮겠지 하면서 거울을 본 순간 식겁했다. 이마가 세로로 찢어져 살이 갈라져 있었는데, 새빨간 피가 흐르고 있었다. 누군가 수술을 하려고 수술용 매스로 이마를 찢어놓은 것 같았다.  

급한 대로 근처 24시간 병원으로 달려갔다. 의사 선생님에게 가볍게 다친 상처라는 말을 직접 듣고 싶어 방문한 거였는데, 당장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 전개에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이 나이 될 때까지 수술이란 걸 받아본 적이 없어서 두려웠다. 누군가 옆에 있었으면 좋겠는데, 엄마와 아빠는 고향에 있었다. 아무도 내 곁에 없었다. 연락하고 싶었지만, 그만 두었다. 안 그래도 사서 걱정하는 성격인 엄마에게 걱정을 또 하나 얹어줄 수 없었다.  

이마 엑스레이 사진을 찍기 위해 은색의 널따란 판 위에 누웠다. 철의 차가운 기운이 온 몸으로 스며들어 몸이 경직되기 시작했다. 간단한 수술이라더니 병원에서는 나에게 수술동의서를 내밀었다. 병원 이름이 새겨진 외래환자복으로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고, 로비에 앉아 텔레비전을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수술이 두려운데, 하필이면 보험을 해지해서 실비 보험조차 없었다. 20만 원이 훨씬 넘는 금액 때문에 수술을 할까 말까 주저했다. 며칠 후에 다시 와서 해도 되는지 물으니 그때 하면 상처 봉합 시기가 늦어져 안 된다고 했다. 무섭고, 돈은 많이 나가고, 수술해도 흉터는 평생 남는다고 하니 삼중고였다. 별거 아닌 수술이라는데, 남들 다 혼자 와서 수술 받는다는데, 나는 왜 그렇게 불안하고 떨리던지.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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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마 상처를 봉합하기로 결정했다. 머리에 수술망을 쓰고 수술대 위에 누웠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커다란 원형 등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빛이 너무 눈부셔서 눈을 질끈 감았는데, 가슴이 떨려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수술 받는 동안 몸이 움직이지 않도록 간호사가 내 다리에 줄을 휘감아 고정시켰다.

가슴까지 두터운 담요를 덮어주고, 이마만 보이도록 얼굴에 덮개를 올려주었다. 그 순간 너무 무서워서 벌떡 일어났다. 불안해서 눈물을 흘리는 나를 보며 의사와 간호사가 위로의 말을 건네주었다. 이마에 마취주사를 놓는 순간 내 다리를 다독여주는 간호사의 손길이 느껴졌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런데 수술은 5분도 안 되어서 끝났다. 심지어 꿰매는 느낌도 그냥 이마를 살짝 건드리는 느낌이었고, 마취주사마저도 엄청난 겁쟁이인 내가 견딜 수 있을 정도였다. 서른 넘은 어른이 오두방정 떨었는데 너무 간단하게 끝나서 헛웃음이 나왔다.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나왔다.

다시 겪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하지만 앞으로 몸만 건강하다면 뭐든지 다 해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꿈을 이루기 위해 혼자 서울에서 고군분투중인 나에게 큰 깨달음을 주었다.

그날, 집에 돌아와 쉬는데 엄마에게 아무 일 없는지 안부를 묻는 문자가 왔다. 웬만한 일이 아니면 전화 문자 모두 자주 하지 않는 모녀 사이인데 연락이 와서 놀랐다. 물리적으로는 떨어져 있었지만 역시 심리적으로는 연결이 되어 있는 게 부모와 자식 사이인 걸까.  

결국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사실은 나 다쳤다고, 놀랐다고, 무서웠다고, 엄마한테 말하고 싶고 어리광부리고 싶었지만 어른이니까 그러지 않기로 했다. 걱정할까 봐 말할 수 없었다. 60이 넘은 노모의 어깨에, '나'라는 또 다른 짐을 얹어줄 수 없었다. 아프고 힘든 건 나 혼자만으로 충분했다.

이제 이마의 살은 잘 붙었지만 세로선은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있다. 얼굴에 지워지지 않을 흉터가 생겼다는 생각에 한동안 우울했고, 고향에서 평범하게 살 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하지만 곧 오기가 생겼다. 나는 남들처럼 살지 않고, 한번 뿐인 삶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그래서 약해지려 할 때마다 이 상처를 보며 정신을 붙들기로 했다.


태그:#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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