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작품 한 점을 독자와 함께 감상하며 그림 속 숨어있는 이야기와 작가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보려고 합니다. 미술전문가의 입장보다는 관람객 입장에서 그림이 어떻게 느껴지는지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편집자말] |
작가 내면의 소리를 표현한 그림을 '표현주의'라고 부른다. 이들은 '영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인간의 어두운 감정 표출에 주목했다. 이들의 그림이 광기 서려 보이는 이유다. 에드바르트 뭉크, 키르히너, 에곤 쉴레등이 표현주의 작가들이다.
오스카 코코슈카 역시 표현주의 대가다. 현대인들의 예민함과 영혼의 어두움을 표현하기 위해 특히 초상화를 많이 그렸는데 의뢰인들은 그의 초상화를 탐탁지 않아 했다. 르누아르처럼 뽀얗게 그려줘도 모자랄 판에 숨기고 싶은 내면의 우울, 불안, 좌절과 같은 것들을 찾아내 부각시켰으니 그럴 수밖에.
그의 그림은 독특하게도 2인 초상화가 많은데 두 사람의 내면뿐 아니라 관계도 그림에 넣었다. 왜곡된 형상, 불규칙하고 굴곡진 선 처리, 차가운 색채, 거친 붓 터치. 그의 표현방식이다.
감당할 수 없는 존재를 사랑해 본 사람이라면
이 그림은 코코슈카의 '바람의 신부'라는 작품이다. 소용돌이치는 바람 속에 두 남녀가 껴안고 있다. 조개껍질 같은 요람은 폭풍우에 요동치고 남자는 결연한 표정으로 보랏빛 밤을 뜬 눈으로 지새우고 있다. 이 와중에 잠든 여인의 얼굴만이 평화롭다.
이 그림의 주인공은 코코슈카 자신과 그의 치명적인 사랑 '알마 말러'다. 인물의 심리상태를 표현함으로써 미래까지 예언한다고 해서 붙여진 그의 별명 '화필의 점사'답게 이 그림 또한 둘의 미래를 예언한 것 같다. 이별불안에 영혼을 잠식 당한 남자와 설사 이별이 코앞에 있다 하더라도 카르페디엠을 본능적으로 알고 그렇게 살았던 여자. 그래서 그는 불안하고 그녀는 평화롭다.
감당할 수 없는 존재를 사랑해 본 사람이면 이 남자의 불안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마음을 접을 수 없기에 행복한 불행의 터널을 지날 수밖에 없는 남자. 그는 그래서 그녀와 함께 있는 시간에도 맘 편히 눈을 감을 수 없다.
밤새 눈을 부릅뜨고 있어도 새벽이 오는 것처럼 두 손 꽉 잡고 있어도 이별은 온다. 화가인 동시에 시인이기도 했던 그는, 불안과 소유에 대한 감정을 날것으로 그려내며 이렇게 썼다.
"지상에서 맺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면 비바람 치는 밤하늘을 떠돌더라도 우리는 영원히 함께 있어야 한다." 알마 말러는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준 존재로 나의 워너비이다. 구스타프 클림트 '키스'의 모델로 알려진 그녀는 쳄린스키로부터 작곡을 공부한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이다.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구스타프 말러와 결혼한 그녀는 그가 사망하자 코코슈카를 만났다. 하지만 바우하우스의 창시자 그로피우스와 재혼, 이혼 후 작가인 베르펠과 다시 재혼. 다 나열하자면 열 손가락이 모자라다. 모두 그녀를 사랑했고 그녀를 모델로 그림, 음악, 문학을 창작했다.
그녀에게 바쳐진 수많은 작품들 중에 내가 가장 샘나고 부러운 작품은 코코슈카의 '바람의 신부'와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5번 4악장 아다지에토이다. 말러가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보내는 일종의 '사랑의 연서'인 이곡은 단순히 귀로 전달되는 곡이 아니다.
듣고 있자면 온 몸 구석구석을 열고 들어와 세포 하나하나에 파고든다. 가랑비에 젖듯 섬세한 음률이 몸을 휘감고 마침내 그의 마음이 내게도 와 닿는다. 내게 배달된 편지가 아님에도 되돌려 주고 싶지 않은 음악편지. 다시 그림으로 돌아가자.
이 그림을 그릴 당시 코코슈카가 보낸 사랑의 편지에는 이처럼 쓰여 있다.
"거의 다 완성되어 가오. 번개, 달, 산, 솟구치는 물, 바다를 비춰주는 벵골의 그 불빛, 그 폭풍에 날리는 휘장 끝자리에 서로 손을 잡고 누워 있는 우리의 표정은 힘차고 차분하오. 분위기가 적절히 표현된 얼굴 모습이 내 머리에 구체적으로 떠오르며, 우리의 굳센 맹세의 의미를 다시 절감했소! 자연의 혼돈 속에서 한 인간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감, 그리고 그 신뢰감을 신념으로 수용해서 서로를 안전하게 보호한다는 감이 잡혔으니, 이제는 몇 군데에 생명감을 불어넣는 시적인 작업만 남았을 뿐이오." - 알마에게 보낸 편지 중강한 부정은 오히려 긍정이 되듯 지나치게 확신에 찬 문구 또한 그 불안을 대변해 보인다. 7살 연상의 그녀는 손에 들고 있어도 쥘 수 없는 존재. '굳은 맹세의 의미'를 그녀에게 각인 시키고 싶었으리라. 그 불안이 화면에 가득하다.
예감대로 그녀는 떠났고 그는 실연의 아픔에 전쟁에 지원한다. 사람이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면 변한다고 하는데 머리에 심각한 총상을 입고 돌아온 그는 여전히 마음의 심각한 부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나 보다. 도저히 떨쳐지지 않는 그녀를 잊는 대신 실물 크기의 인형을 제작한다. 누가 봐도 알마를 닮은 인형에 '훌다'라는 이름을 붙이고 속옷과 명품드레스를 입혔다. 훌다와 함께 산책을 하고 잠을 자고 오페라를 보며 그 인형을 모델로 그림도 그렸다.(인형과 함께 있는 남자, 자화상)
'집착남'이라는 말에 반대한다
사람들은 그의 기이한 행동에 수군거렸다.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다. 어떤 이는 집착남이라는 간단한 단어를 붙여버린다. 나는 반대한다. 알마를 파괴하거나 괴롭게 하는 대신 자신의 숨 쉴 구멍을 찾은 거라 생각한다. 그것도 아주 그다운 방식으로.
그의 기행이 광기 어리지만 살려는 몸부림으로 읽힌다면 내가 너무 그를 이해하는 걸까. '이별의 눈물 보이고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남자'보다 나는 이 남자의 지독한 부대낌이 눈물겹게 좋다. 한번도 이토록 뜨거운 적 없었던, 연탄재만도 못한 삶이라 그런가. 저울질에 강한 나는 손해 보는 사랑 앞에 여차하면 돌아선다. 그래서 끌리나 보다. 그는 뜨겁고 나는 차다.
사랑의 완성이 결혼이 아니듯 사랑의 실패가 이별은 아니다. 사랑의 실패는 말 그대로 상대를 온전히 사랑하지 못한 것. 코코슈카는 전 생애에 걸쳐 그녀를 사랑했으니 그는 사랑에 성공한 셈이다.
20년이 지난 후 알마는 코코슈카에게 사과의 편지를 보냈고 그녀의 70세 생일에 그가 답장을 보낸다. 나는 이 편지를 읽고 '야생동물'이란 단어를 사랑하게 되었다. 누군가의 심장 속을 뛰어다니는 낭만적인 심쿵 단어 '야생동물.'
"사랑하는 나의 알마, 당신은 아직도 길들이지 않은 나의 야생동물이오. 당신의 생일을 준비하는 친구들에게 덧없는 달력의 시간에 나를 묶어놓지 말라하오...(중략)... 우리가 서로에게 불어넣은 그 뜨거운 열정과 비교되는 사랑은 없었으니까..."ps. 코코슈카의 가슴은 당신을 용서하기에.코코슈카의 '추신'에 방점을 찍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을 그토록 휘저어놓고 떠난 여자를 용서한 대인배로. 마음이 변하는 건 대체로 한쪽의 일방적인 행로가 아닐진대 용서받아야 할 일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읽는다.
"코코슈카의 가슴은 당신을 사랑하기에."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시사인천에도 중복게재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