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와서 비자림에 간다. 아니 비자림에 가야지 했는데, 마침 비가 온다. 숙소 앞, 젖어서 한 층 짙어진 풍경 속을 걸으며 어제까지 흥얼거리던 자작곡에 한 소절이 더 붙는다.
'노래지고 파래지고 노래지고 파래지고, 까매지고 붉어지고 까매지고 붉어지고'
비자림 입구. 반려동물과 동행할 수 없고, 마시는 물 외에 음식 반입을 금지하며, 정해진 탐방로를 이탈하지 말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비가 와서 강호를 집에 두고 왔는데 잘 한 선택이었다.
500년에서 최대 800년을 넘게 산 비자나무 2800여 그루가 사시사철 푸른 숲을 이루고 있는 비자림. 살짝 알싸한 비자향이 비가 와서 더욱 맑고 진하게 느껴진다. 가슴과 머릿속이 시원해졌다.
500년... 800년... 풍채와 기운이 남다른 나무들을 보면서 그들이 살아낸 시간을 짐작해보려 했지만 막막해질 뿐. '나무야, 나무야'가 아니라 '나무님, 나무님'이라 불러야 당연하지 싶다.
비가 오니 숲의 색과 향이 더욱 풍성해졌다. 듣고 있던 이어폰 속 음악을 끄고, 비와 숲이 만드는 소리에 이끌려 아예 귀에서 이어폰을 빼고 나니 황활한 야외 음악회의 절정에 다다랐다.
비자림에는 비자나무 외에도 향이 좋아 어린 잎으로 쌀이나 떡을 싸먹었다는 예덕나무, 몸 속 수분이 많고 잎이 넓어 숲의 소화기 역할을 한다는 아왜나무, 생김새를 본따 '인정이 두텁고 거짓이 없다'는 좋은 이름을 가진 후박나무 등이 같이 살고 있다.
제주 자연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숨골'. 온 땅이 들썩여 토해낸 용암이 굳고 깨져서 된 암석들 사이에 기적처럼 뿌리를 내려 자손을 번식시킨 식물. 오래고 오랜 세월 산전수전 함께 겪으며 돌과 한몸이 되어선 하늘이 주는 빗물을 받아 섬의 동식물을 고루 먹여 살린. 사람도 예외가 아니다.
기록에 따르면 1189년에 태어나 800살도 훌쩍 넘은 비자림의 터주 '새천년 비자나무'다. 사람 중에서도 극소수만이 100살을 겨우 넘기는데 800년 세월을 살 수 있다는 것은 대부분 인간이 이해하는 차원과는 지구와 우주 만큼 다른 세계의 존재가 아닐까?
'부디 무례한 인간들 용서하시고, 모든 생명들 두루 지켜주시고, 나무님도 건강하시길.'
'새천년 비자나무' 옆, 일명 '사랑 나무'라 불리는 연리목이다. 두 나무가 한 몸이 되는 현상을 연리라 하는데, 줄기가 연결되면 연리목, 가지가 연결되면 연리지라고 한단다. 이름만으로 달콤하고 즐거운 연애를 상상하기 쉽지만 그 사랑, 알고 보면 뼈와 살을 깎고 섞은 고통의 산물이니 함께 온 이와 그러할 수 있을 지 생각해보면 좋겠다.
돌아서 내려올 때는 숲 초입에서 만난 해설사가 권했듯 맨발로 걸어봤다. 비와 숲의 합주와 각각의 연주자들의 몸짓과 체취까지 한껏 음미한 뒤 하나의 감각을 더 열자 정말로 목욕을 하듯 상쾌하고 동시에 겸손해지는 자극이 찾아들었다. 비 오는 날의 숲이 이처럼 풍성한 배움과 기쁨을 줄 줄이야.
'이런 모습으로도 살 수 있구나. 이렇게나 제 속을 텅 비워내고도...' 마지막 한 나무까지도 다시금 발길을 멈추게 하고 한참을 쳐다보게 만든다.
숙소에 돌아와 낯이 익은 어린 길고양이에게 강호 밥을 나누어 주었다. 잠시 뒤에 보니 내겐 초면인 점박이 녀석과 싸우지 않고 적은 밥을 같이 먹고 있었다. 자주 느끼는 바인데, 아름답게 사는 지혜를 사람 아닌 식물과 동물이 훨씬 더 많이 알고 있는 것 같다.
오후는 강호와 함께. 반 나절 떨어져 있었지만, 따뜻한 방에 돌아와 이 보드랍고 따뜻하고 재미난 녀석의 존재를 마주 하니 반가움과 애틋함이 커진다. 내 생에 고양이들을 만난 건 내가 누리는 최고의 복 중 하나임에 틀림 없다. 이렇게 여행할 수 있는 현실과 함께.
덧붙이는 글 | 6년 전 귀향해 아주 작은 여행자 공간을 꾸리다 다시 여행자 신분으로, 내 안의 두려움과 무지를 깨고 더 넓은 세상을 만나고 싶어서, 다리가 두 개 뿐인 하지만 씩씩하고 명랑한 고양이 강호에게도 그런 세상을 보여주고 싶어 낯선 곳에서 한 달 살기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첫 한 달살이는 제주도에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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