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박도 기자의 사진 근현대사] 35회에서는 전회에 이어 2007년 3월 6일에 제2차로 맥아더기념관에서 수집한 사진자료와 한국전쟁에서 원자탄 사용을 주장하다가 해임된 맥아더 이야기를 소개한다. -기자 말
한국전쟁과 맥아더 2007년 3월 6일, 제2차 맥아더기념관 탐방은 재미동포 박유종 선생과 동행했다. 그분은 임시정부 박은식 대통령 손자로, 특히 한국 근현대사에 대해서는 조예가 깊었다. 게다가 당신은 한국전쟁을 몸소 체험한 터라 나의 사진 검색 선별 수집 작업에 캡션 번역과 자문역으로 안성맞춤이었다.
2004년 2월 25일에 이어 꼭 3년 만에 다시 찾은 맥아더기념관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아키비스트 조벨(James W. Zobel)씨는 구면인 탓으로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아줬고, 자료실 안 벽 액자에는 만년의 맥아더가 옅은 미소로 우리 일행을 반겼다.
1950년 6월 26일 새벽, 깊은 잠에 빠져있던 맥아더는 비서가 건네준 이승만 대통령의 전화를 받았다.
"아, 맥아더 장군, 나 리승만이오. 이렇게 이른 시간에 전화를 걸어 미안하오만, 내가 가장 우려했던 상황이 발생했소?"
"우려했던 상황이란?"
"북한 공산군이 25일 새벽에 전면 남침을 했소. 아군 방위선이 무너지고 있소."
맥아더는 이미 트루먼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한국전 지원 훈령을 받고, 그날로 처지 준장을 한국에 급파해 한국군을 지원함에 무엇이 필요한가를 살피게 했다. 6월 27일 오후, 맥아더는 처지 준장으로부터 미 지상군의 개입이 필요하다는 보고를 받았다.
유엔은 1950년 6월 26일과 28일에 긴급 소집한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에 따라 7월 7일 유엔군사령부를 창설했다. 그런 뒤 미 극동군사령관 맥아더 원수를 유엔군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곧이어 자유진영 연합국의 병력들이 속속 도착해 마침내 유엔군이 편성됐다. 맥아더는 7월 15일 도쿄 미 극동군사령부 옥상에서 미 육군참모총장 콜린즈로부터 유엔기를 받았다.
유엔군은 대대로 한국전에 파병했지만 전선은 워커라인(낙동강 일대)에서 한 달 이상 교착상태에 빠졌다. 맥아더는 이를 타개하고자 1950년 9월 15일 군사전문가들조차 성공 확률이 5000분의 1이라는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했다. 이 작전으로 낙동강 전선을 한꺼번에 무너뜨림은 물론, 그해 9월 28일 서울 수복에 성공해 맥아더의 명성을 세계에 드날렸다.
중국군 참전1950년 10월 15일, 태평양의 웨이크섬에서 트루먼 미 대통령과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 간의 회합이 있었다. 이 자리에서 맥아더는 멀리서 찾아온 트루먼에게 자신감이 찬 목소리로 말했다.
"미국은 한국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할 것이며, 추수감사절인 11월 23일까지 북한군의 저항을 잠재울 것입니다. 한국에 파병된 미군은 크리스마스 이전에 일본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이에 트루먼은 맥아더에게 물었다.
"중국이 한국전쟁에 개입하지 않겠는가?""우리는 중국의 개입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 만약 중국이 한국전에 개입한다면 대량 살육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맥아더의 장담은 곧 빗나갔다. 트루먼과 맥아더의 웨이크 회합이 있은 지 열흘 만에 중국군 10만 명이 압록강을 건너 한국전쟁에 개입했다. 그때부터 한국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전개됐다.
사실 중국은 한국전쟁 개전 이래 소극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러다가 유엔군의 38선 돌파가 임박하자 미국에 대해 여러 차례 경고했다.
"우리는 전쟁을 원하지 않지만, 적들이 우리에게 전쟁을 강요하고 있다. 북조선의 불행을 이대로 좌시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우리 중국은 북조선을 원조하고 우리 자신을 지켜야 한다. 중국과 북조선은 순망치한(脣亡齒寒,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의 관계다."
하지만 미국은 중국의 경고를 무시한 채 계속 북진을 감행했다. 그러자 중국은 자국 국방에 위협을 느낀 나머지 '중국인민지원군'(아래 중국군)을 한국전에 참전시켰다. 중국군은 13병단의 4개 군, 포병 3개 사단, 1개 고사포연대, 1개 공병연대 등 25만5000명으로 편성했다.
'크리스마스 공격작전'첫 교전은 10월 하순에 치러졌다. 미국은 그때까지 중국을 종이호랑이로 여겼다. 세계 최강인 자신들에게 중국이 대항한다는 것은 무모한 도전이라고, 우습게 여겼다. 특히 맥아더는 중국군을 아주 형편없이 얕보며, 설사 중국이 참전하더라도 한국전쟁의 양상은 크게 바뀌지 않으리라고 판단했다. 그는 크리스마스 이전에 한국전을 끝내고자 최후 대공세로 '크리스마스 공격작전'을 준비했다.
유엔군의 '크리스마스 공격작전'은 11월 초 한만국경 폭격으로 시작했다. 미군 B-29 폭격기는 2주 동안 북한 대부분 지역을 초토화시켰다. 그러자 맥아더는 '크리스마스 공격작전' 사전 정지작업이 완료된 것으로 판단했다. 11월 하순, 맥아더는 유엔군 총병력 42만 명에게 크리스마스 총공격을 명령했다.
"적은 재기할 능력이 없다. 압록강까지 진격하라! 그대들은 크리스마스에 가족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1950년 11월 25일부터 마침내 유엔군의 '크리스마스 공격작전'이 시작됐다. 당초 유엔군은 자신만만했으나 중국군의 고전적인 공세와 벼랑 끝 전술로 나온 인민군의 거센 반격에 당황했다. 중국군은 뜻밖의 장소에서 밤낮으로 북과 꽹과리를 치고 나팔을 불며 불쑥불쑥 전투장에 나타나는 전법을 썼기 때문이다.
이에 유엔군 병사들은 중국군의 고전적인 전법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특히 그들은 중국군의 야간 공격 공포감에 질려 밤이 오는 게 두려웠다. 일종의 트라우마였다. 게다가 날씨조차도 유엔군 편이 아니었다. 더욱이 따뜻한 남쪽 나라에서 파병된 유엔군에게 영하 30~40℃를 오르내리는 북부지방의 강추위는 적군보다 더 무서운 적이었다. 이런 혹한 속에 유엔군은 중국군 참전 이후 2주일 동안 약 250km나 계속 후퇴했다.
한국전쟁 전세는 또다시 대역전을 거듭했다. 1950년 11월 말, 인민군과 중국군 연합 공산군은 청천강과 장진호에 이르는 동해안 지역까지 진출했고, 12월 6일에는 마침내 평양을 탈환했다. 맥아더는 마침내 중국군의 맹공과 강추위로 흥남 철수명령을 내렸다.
1950년 12월 25일, 공산군은 38선 이북의 거의 전 지역을 다시 장악해 맥아더의 코를 아주 납작하게 만들었다. 공산군은 12월 31일 밤 모든 전선에서 다시 38선을 돌파한 뒤 남하했다. 1951년 1월 4일 공산군은 서울을 다시 점령했고, 1월 중순에는 37도선 이북 지역을 점령했다. 워싱턴은 맥아더의 크리스마스 총공세가 대참패로 돌아가자 경악했다. 맥아더의 크리스마스 작전은 가장 기본인 천시(天時)와 지리(地利)를 무시한 졸전으로 패전을 자초했다.
'원자탄 투하' 고려미국이 그들의 역사상 처음으로 한국전쟁에서 가장 큰 뼈 아픈 패배를 당하자 트루먼 대통령은 비장의 카드를 뺐다. 그는 기자 회견을 통해 한국전쟁에서 원자탄 사용을 적극 고려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이로써 한국전쟁은 자본주의 진영 대 사회주의 진영 간 국제전으로 비화, 제3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였다. 그러자 세계 여론은 들끓기 시작했다.
대부분 나라들은 미국의 원자탄 사용계획을 비판할 뿐 아니라, 미국 국내에서조차도 반대 여론이 높아졌다. 미국 다음으로 한국전에 많은 지상군을 파견한 영국도 미국의 원자탄 사용계획에 적극 반기를 들었다. 영국 수상 애틀리는 화급히 워싱턴을 방문해 트루먼 대통령과 회담을 가졌다.
이들은 '한반도에서 방어선을 유지해 전쟁의 확산을 방지하면서 명예롭게 전쟁을 종식시키는 방향'에 대한 의견을 나눴다. 그러면서 한반도에서 결코 핵무기가 사용되지 않을 것임을 재차 확인하고, 유엔의 후원 하에 휴전을 모색키로 합의했다.
이러한 합의 배경에는 당시 미국의 주적은 소련이었기에 중국과의 전쟁에서 힘을 소비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와 함께 미국은 당시 일본방위를 위해 주한미군의 전력을 보존해야 한다는 등의 요인도 있었다.
마침내 미국은 전 세계적인 반대 여론과 그 무렵 소련의 핵무기 보유량이 급증하고 있다는 정보에 그만 한국전에서 원자탄 사용 카드를 접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중국군의 제3차 공세로 37도선까지 후퇴를 거듭했던 유엔군은 다시 전열을 가다듬은 뒤 대반격 작전을 펼쳤다.
유엔군은 1951년 3월 16일에는 서울을 재탈환했고, 3월 23일에는 38선 이남을 다시 장악했다. 그때부터 미국 내 여론은 확전보다 전쟁을 제한하는 기류로 흘러갔다.
맥아더 해임하지만 맥아더의 의견은 달랐다. 그는 그런 기류를 '전쟁에서 싸워 이기려는 의지를 상실한 것'이라고 강하게 비판하면서 트루먼 대통령에게 계속 원자폭탄 사용을 건의했다. 그는 구체적으로 26곳의 원자탄 투하 목표 지점을 세워두고 있었다.
하지만 트루먼은 제3차 세계대전의 발발을 두려워한 나머지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을 전격 해임으로 답했다. 1951년 4월 11일 트루먼 대통령의 맥아더 해임 명령서의 요지다.
"미합중국 군대의 최고통수권자이며 대통령인 나의 임무가 현재 미군 참모총장이며 미 극동군사령관이자 유엔군사령관인 귀관을 대신할 사람을 뽑아야 하는 점이라는 것에 대해 대단히 유감으로 생각하오. 지금 이 시간부터 귀관의 모든 권한을 리지웨이 중장에게 위임하기 바라오.…"
이로써 맥아더는 불명예 퇴진했다. 지금도 그때의 전황도, 상대를 모르는 국내 일부 극우 인사 가운데는 당시 맥아더의 원자탄 투하 주장이 옳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다. 만일 그때 미국이 맥아더의 건의대로 원자탄을 사용했더라면 제3차 세계대전으로 확전돼 오늘의 우리들 대부분은 생명을 부지치 못했을 것이다. 설혹 그 틈바구니에서 용케 살았더라도 원자탄 피폭 후유증에 정신적 육체적으로 신음하고 있을 테다.
원자탄, 곧 핵 무기는 여하한 경우라도 사용해서는 안 된다. 이는 이 지상의 사람뿐 아니라, 모든 생명을 살상하는 공포의 무기로, 어쩌면 악마가 과학문명에 방종하는 인류에게 보낸, 인류 스스로 핵 무기에 도취돼 자멸케 하는 사약과 같은 무기일 것이다.
1951년 4월 11일, 미 대통령 트루먼이 전격 단행한 맥아더의 해임은 제3차 세계대전을 막아냄과 아울러 동북아를 핵 재앙으로 구한 '복음'과 같았다.
2007년 3월, 그날도 맥아더기념관에서 끔찍한 장면을 많이 본 탓인지 돌아오는 길에 나와 박유종 선생은 한동안 말을 잊었다. 우리는 돌아올 때 채스팩만 다리와 해저터널을 거쳐 왔다. 그 길은 대서양을 가로 질렀는데 승용차가 바다 위 다리로 달리다가 갑자기 바다 밑 터널로 이어졌다. 바다 위를 달릴 때는 한창 저녁놀이 지고 있었다. 그 저녁놀이 일대 장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