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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많은 이들이 문재인 대통령의 '파격 행보'로 꼽는 여러 가지 중에 한 가지는 당선 이후 첫 5.18 기념식이었을 테다. 5.18 유가족을 따뜻하게 포옹해준 것. 알려진 바로는 계획에 없는 일이었다고 한다. 누군가는 '쇼'라고 조롱했을 테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이번 정부가 아직 해결되지 못한 5.18을 매듭짓고자 하는 의지를 표명했다는 점이다. 책임소재를 분명히 하고 진상규명을 이루어 내고자 하는 의지가 이번 정부에는 확연히 드러난다.

1년이 지나 지난 18일, 문 대통령은 5.18 당시 자행되었던 성폭력을 뿌리 뽑고자 진상조사단을 꾸리겠다고 했다. 국방부와 여성가족부, 국가인권위원회가 참여할 것이라고 하면서 "짓밟힌 여성들의 삶을 보듬는 것에서 진실의 역사를 다시 시작하겠다"고 적었다.

삶의 바탕 위에서 써낸 그 날의 이야기

 <광주, 여성> 책 표지.
<광주, 여성> 책 표지. ⓒ 후마니타스

정부의 의지와는 별개로, 우리는 이 중요한 역사적 사건 앞에 여성들이 어떤 고초를 겪었는지 잘 알지 못하는 게 사실이다. 희미하게나마 극악무도한 국가폭력 앞에서 고통받음과 동시에 이를 해결하기 위한 주체였을 거라는 지점은 추측해볼 수 있겠다. <광주, 여성>은 광주전남여성단체연합이 내놓은 2010년 초판인 <구술로 엮은 광주 여성의 삶과 5.18>의 2012년 개정판이다.

책은 크게 3부와 좌담회로 나눠져 있다. 1부에서는 5.18 이전의 구술자들의 삶을 오롯이 그저 견뎌낼 수밖에 없었던 여성들의 이야기를, 2부에서는 5.18 당시 거리에서 항쟁을 직접 도왔던 이들의 이야기, 3부에서는 5.18 이후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굳이 세 개로 구분을 해 놓았지만 경중 없이 모두 중요한 일들이고 모두 우리가 여성들이 겪었던 항쟁의 역사를 말해야 한다면 모두 빼놓을 수 없는 서사들이다.

광주 사람들은 군부의 총칼에만 고통받은 것이 아니다. 통제되어 있는 언론은 광주항쟁을 왜곡, 폄하하기에 바빴고 제대로 된 정보를 얻기도 힘들었다. 당시 광주 양동시장에서 일했던 박수복씨는 택시에서 겪었던 일을 술회한다.

5.18 이후 서울 가서 많이 싸웠제. 주로 택시 기사들하고. "평화시장에 갑시다." 내가 그랬어. 긍께 "어디서 왔어요?" 하고 물어. "전라도 광주에서 왔소." 긍께 "전라도 광주는 왜 그랬대요?" 그래. 다 용공 분자라고 그러는 거야. 그래서 내가 "여보시오. 글믄 당신은 자식이 나가서 앞에서 총 맞아 죽고, 동생이 가서 맞아 죽고, 그래도 이불만 둘러쓰고 있겄소? 다 이유가 있으니까 나가지" 그랬지. 아, 그러고서는 "아저씨, 우리가 그렇게 다 빨갱이로 보여요?" 내가 그랬어. 그랑께로 서울 뉴스에서 그렇게 계속 나온다고 그러대.
내가 5.18 때문에 울산 가서도 한 번 싸웠소. 5.18 얘기가 나왔는디, 그때 형부가 다 빨갱이라고 하는 거야. (중략) 방송에는 그렇게 나온다고 (형부가) 그래서 "가만히 있어, 조금만 있어 봐, 10년만 있어 봐" 그랬지. 한참 뒤에 형부한테 전화가 왔어요, 사과한다고, 미안하다고, 광주가 그런 형편인지는 몰랐다고.


1부에서 구술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여성들 중 상당수는 시장에서 장사를 했고, 지금까지 하는 경우가 많다. 당시에 지방에서는 여성들에게 교육의 기회가 남성에 비해서 없었음은 그들이 학교를 가지 못했다고 얘기하는 지점에서 알 수 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당시 학생이나 시민군들을 숨겨주거나 먹을 것을 해주는 일을 자주 하곤 했다. 시장은 연대의 장소였다. 대인시장에서 장사를 하던 3년차에 5.18을 맞았던 하문순씨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전략) 근디 우리 학생들은 구호 외치면서 물을 못 먹어서 그냥 쓰러지고 배가 고파서 굶주리잖아요. 그때 엄청나게 더웠어요. 5월이어도 그때같이 더울 때가 없었어요. 그래서 어르신들이 "아야, 학생들이 굶고 있단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양동시장도 한다는데, 대인시장이 이러면 되겠느냐" 그랬죠. 그래 갖고 장사하는 엄마들한테 가서 5천 원도 걷고, 3천 원 걷고, 2천 원도 걷고 그랬어요. 1만 원을 주신 분들도 있고. 기름도 얻어 오고, 방앗간에서 밥 쪄오고, 가마솥에다가 소금하고 참기름하고 섞어 갖고 막 주물러서 박스에 담아서 실어 보냈어요.


 영화 <택시운전사> 스틸컷.
영화 <택시운전사> 스틸컷. ⓒ 쇼박스

영화 <택시운전사>에서도 시위대와 김만섭 일행에 물과 주먹밥을 제공했던 시장의 여성 상인들이 나온다. 당시 공수부대에 맞서 싸운 이들만 역사의 주인공이 아니라, 물심양면으로 도왔던 이들도 오롯이 기록되어 있는 셈이다.

현장에서 모두가 국가폭력에 맞서 싸운 주인공들이다. 당시 광주의 문제는 광주시민들이 끌어나갈 수밖에 없었다. 5.18 당시 도청에서 시신 수습을 위해 만들어진 '국민장례위원회'에 참여했던 윤청자씨는 책임지고 싸우려는 사람들이 있었는가에 대한 질문에 '민초'라고 답한다.

30년이 됐지만 우리는 책임 있는 참여자였거든. 그것이 다 민초였제. 79년에 12.12 사태 나고 예비검속이 되니까 다 흩어져 부렀잖아. 누가 있었어, 광주에. 지식인? 뭔 대갈통에만 들어 있지. 무책임한 것들. 책임이 강한 놈들이 누가 있었느냔 말이야. 즈그 살려고 광주공항까지 도망간 놈들도 있었다고. 즈그들은 그런 이야기를 안 하드만. 반성을 하려면 그런 것을 반성해야제. (중략) 민주화라는 것이 거저 얻어진 게 아니고, 보이지 않는 곳에 약자들이 지켜 가는 것이지.

'책임 있는 참여자'의 목소리를 기록할 의무

사실을 고백하자면, 2부 소개 글에서 항쟁 당시에 거리에서 싸웠다는 사람들을 막연히 노동운동을 했었던 여성 활동가가 아닐까 추측했었다. 위에서 말했듯 이 책이 1~3부로 나눈 것은 기준이야 존재하지만, 국가적 폭력 앞에 함께 맞서 싸우는 데에 활동가건 아니건 그게 무엇이 중요하겠는가. 윤청자씨의 말대로 그날의 광주사람 모두가 '책임 있는 참여자'이니까 말이다. 2부에서도 여전히 이 일을 자기의 일, 자기 가족의 일이라고 생각했던 이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좌담회 파트도 중요하게 짚고 넘어갈 부분이다. 좌담회에서는 김상봉 전남대 철학과 교수나 정혜신 정신과 전문의 등이 모여 왜 우리는 5.18에서 여성의 목소리를 기록해야 하는가, 그리고 오늘날 5.18에 대한 여성 구술사 작업을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 중 정혜신씨와 이화경씨의 발언을 소개한다.
"5.18이라는 것을 항쟁 때 총을 들고 도청을 사수하려고 했던, 장렬하게 죽음을 맞이한 주체들을 중심으로 이해하는 한, 당사자주의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죠. 5.18을 이야기할 때 자꾸 불편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같아요. 항쟁 때 총을 들었느냐, 죽었느냐 하는 문제에서 저희가 한 발자국도 못 나간다면, 5.18의 여성성이나 여성주의에 대한 논의도 더 이상 불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화경)

"선생님, 그때 심정이 어떠셨어요? 그때 어머니가 이렇게 하셨다는데 마음이 어떠셨어요?" 같은 질문을 (고문 피해자 분들에게) 계속 던지죠. 어떤 증거 서류보다도 한 인간의 삶으로 돌아와서 그 내면의 고통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거죠. 이런 것이 여성주의적 시각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질문을 던지다 보면, 본인이 겪은 경험, 무력감, 수치심 이런 것들이 나오기 시작하죠. 저는 그런 것들이 규명이 되어야 사건의 실체가 분명해진다고 생각해요." (정혜신)

여성주의가 지금만큼 주목받지 못했던 시절의 책이지만, 2018년에 다시 꺼내서 봐야 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어떤 비극의 사실관계를 규명하는 것만큼, 그 비극의 한가운데에 삶을 '살아낸' 이들의 목소리를 들어보는 것은 중요하다. 그 개인들이 모여 만들어낸 역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는 대개 남성 중심적인 관점에서 주류가 기록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는 관심 가지지 않는다. 그래서 기록되지 못한 것들을 기록하는 사람들의 역할은 사회과학에서 굉장히 중요한 작업이다. <광주, 여성>은 김상봉 교수의 말처럼 '정형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소중한' 결과물이다.


광주, 여성 - 그녀들의 가슴에 묻어 둔 5.18 이야기

광주전남여성단체연합 기획, 이정우 편집, 후마니타스(2012)


#광주,여성#5.18 광주항쟁#여성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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